살로메, 일곱 베일의 춤
“어쩌면 모든 이야기가 선행하는 이야기를 다르게 보고 달리 그리면서 새로이 태어나는 게 아닐까,...”
역사적으로 19세기에 이르러 나폴레옹이 유럽 여러 나라들을 침략하자 국가 간의 교류는 더욱 활발히 이루어지게 된다. 전쟁은 적지 않은 희생을 전제로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여러 국가들이 지닌 고유문화와 사회적 가치들이 공유되는 계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으로 당시 예술가들은 그동안 닫혀있던 세계의 여러 문화나 신화 등을 접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놀라움을 그림이나 글로 펴 트리기 시작한다. 이들이 퍼트린 신화중 한 가지는 성서에 기록된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성경 속 인물로서 살로메에 대한 이야기가 주목을 끌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특히 그동안 금기시 되었던 성적 담론이 살로메에게 덧씨워지면서 사람들 관심이 집중된다. 살로메가 추는 “일곱 베일의 춤”은 그림과 희곡으로 상세히 묘사되면서 급속히 번져나간다.
성서에서 살로메는 세례 요한을 처형하는데 직접적인 원인이 된 인물로 나온다. “마가복음(6:14-29)‘과 ’마태복음(14:1-12)‘에 따르면, 헤로데 안티피스는 이복형 헤로데 필리우스와 이혼한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일로 인해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세례 요한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헤로데는 민심이 두려워 그를 죽이지는 못하고 감옥에 가두는데 평소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헤로데가 그의 생일날 살로메에게 원하는 그 어떤 것이든 줄 테니 춤을 출 것을 요구한다. 세례 요한이 자신의 결혼을 비난한 게 몹시도 화가 났던 헤로디아는 딸 살로메를 부추겨 세례 요한의 목을 쟁반에 받쳐 가져다줄 것을 부탁하라고 한다.
그러던 중 헤롯왕의 생일날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살로메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헤롯왕이 살로메에게 춤출 것을 요구하고 그 대가로 살로메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를 계기로 살로메는 그녀의 어머니 헤로디아가 사주한 세례 요한의 목을 잘라 젱반에 받쳐 가져다줄 것을 요구한다.
살로메가 헤로데가 원하는 춤을 마치고 세례 요한의 목을 원하자 헤로데 왕은 다른 것을 받기를 설득하지만 살로메는 끝내 세례 요한의 목을 원한다. 헤로데 왕은 하는 수 없이 그의 목을 잘라 가져오도록 명한다. 살로메는 그 머리를 쟁반에 받쳐 어머니에게 가져다준다.
1891년 오스카 와일드는 살로메 이야기를 프랑스어 희곡으로 발표한다. 그리고 3년 후인 1894년 와일드의 친구 더글러스 경이 영어로 번역해 영국에서 출판한다. 이때 오브리 비어즐리의 그림들이 처음 살로메의 삽화로 함께 사용된다.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가 1905년 12월 9일 독일 드레스덴 오페라극장에서 첫 공연을 갖는다. 이 오페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같은 제목의 희곡 '살로메'를 바탕으로 오페라로 각색한 것인데, 일반 오페라와는 다르게 오페라를 1막으로 구성해 중간에 쉬지 않고 1시간 45분 동안 계속 진행한다.
그런데 이 오페라가 첫 공연을 마치자 무대에서 보여준 살로메가 세례 요한의 머리를 부여안고 그의 입술에 키스하는 장면과 살로메가 헤롯왕 앞에서 보여준 거의 나체에 가까운 일곱 베일의 춤 등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충격을 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이나 당시로서는 거의 생소하다시피 한 무대장치, 더 나아가 세례 요한의 극혐에 이른 목이 잘린 머리를 은쟁반에 받쳐든 살로메의 모습 등은 충격적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당시 상황에서 이런 오페라는 거의 상상할 수 없었던 무대일 뿐 아니라 이에 더해 교계의 반발까지 가해져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는 상연 금지령을 내렸을 정도였다.
가히 퇴폐적이라고 할 만한 인간의 탐욕과 성적 묘사 등은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를 보고 난 후 오랫동안 그 충격이 가시지 않고 남아있게 된다. 그리하여 팜므파탈의 상징처럼 살로메의 이름이 점차 회자되기 시작한다.
살로메의 자극적인 성적 표현을 바탕으로 한 팜므파탈로서의 이미지, 거기에 관음증까지 더해지면서 살로메라는 여인을 통해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여러 화가들이 가장 그리고 싶어 하는 주제이기도 했다.
일곱 베일의 춤은 문학과 회화 분야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살로메는 궁극적으로 성서와 신화 이야기의 교차점에 자리하고 있는 핵심 인물로 등장한다. 아무리 에로틱하고 관음증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라 하더라도 살로메가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임이 분명하기에 이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기원전 1세기. 유대의 왕 헤롯의 궁전에는 화려한 연회가 열리고 있다. 유대의 왕 헤롯은 형을 죽이고 왕이 된다. 또한 헤롯왕은 형의 부인인 헤로디아스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조카딸 살로메의 의붓아버지가 된다. 그러나 헤롯왕은 살로메의 고혹적인 모습에 매료되어 살로메에게 욕정을 품는다.
연회장 문 앞에서는 경비대장 나라보트와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다. 그 앞으로 왕비가 된 헤로디아스와 살로메 공주가 정원을 가로질러 연회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때 살로메를 흠모하는 나라보트가 홀린 듯 그녀를 쳐다보지만 살로메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이 순간 궁전 감옥에 갇혀 있는 세례자 요하난(세례 요한)이 큰 소리로 남편을 죽이고 남편의 이복동생 헤롯왕과 혼인하고 왕비가 된 헤로디아스를 비난하며 “죄를 회개하라“고 외친다.
세례자 요하난은 계속해서 헤롯왕이 지배하는 왕국이 곧 멸망할 것임을 경고한다. 그가 살로메의 어머니 헤로디아스를 질타하자 살로메는 이런 예언자 요하난의 모습에 오히려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세례자 요하난은 살로메까지 모욕을 하는데 살로메는 오히려 그런 세례자 요하난에게 더욱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 그에게 키스하고 싶은 충동까지 느낀다.
이때 살로메는 자신에게 탐욕을 가지고 있는 계부 헤롯왕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아 연회장을 벗어나려 한다. 그런데 이때 세례자 요하난의 목소리를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경비대장 나라보트에게 갇혀 있는 세례자 요하난을 데려오게 한다. 문득 세례자 요하난의 목소리와 그의 외모에 욕정을 느낀 살로메는 “나는 당신에게 반했어요. 당신의 입술에 키스할 거예요”라며 욕망을 드러낸다.
흠모하는 여인, 살로메가 자기에게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도 않고 세례자 요하난에게 욕정을 드러내자 충격을 받은 경비대장 나라보트는 자살을 한다. 갑작스러운 그의 자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살로메는 최면에 걸린 듯 세례자 요하난에게 구애를 계속한다. 하지만 세례자 요하난은 “당신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갈릴리 예수뿐”이라고 말하고 감옥으로 되돌아간다.
잠시 후 헤롯왕이 살로메를 찾으러 밖으로 나온다. 이때 유대인들이 세례자 요하난을 처형하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세례자 요하난에게 두려움을 느낀 헤롯왕은 이를 묵살한다. 이때 다시 세례자 요하난의 비난 가득한 원망의 소리가 들려온다. “죄를 회개하라”는 요하난의 외침에 왕비 헤로디아스는 귀를 막으며 “저 소리를 멈추게 하라”고 외친다.
한편 살로메에게 욕정을 품고 있는 헤롯왕은 연회장에서 살로메에게 자신을 위해 춤을 추면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주겠노라고 약속을 한다. 그러자 살로메는 관능적인 음악에 맞춰 요염한 몸짓으로 베일을 한 겹씩 걷어내면서 그 유명한 ‘일곱 베일의 춤’을 춘다.
춤이 끝나고 살로메는 헤롯왕에게 약속대로 그녀의 바람을 말한다. 살로메는 “은쟁반에 세례자 요하난의 머리를 담아서 달라”라고 요구한다. 이 말에 놀란 헤롯왕은 거절하고 만다. 헤로디아스 왕비는 딸이 요구한 세례자 요하난의 목을 달라는 말에 기뻐하지만 헤롯왕은 살로메를 달래며 요하난의 머리 대신 비싼 보석이나 멋진 다른 물건을 살로메가 요구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살로메는 끝까지 세례자 요하난의 목을 원한다.
헤롯왕은 하는 수 없이 살로메가 원하는 대로 이를 허락한다. 헤로디아스 왕비가 헤롯왕의 손에서 죽음의 반지를 뽑아 병사에게 전하며 그것을 사형집행인에게 전달하도록 한다. 사형집행인은 세례자 요하난이 갇혀있는 감옥으로 가 세례자 요하난의 목을 잘라 은쟁반에 받쳐 들고 살로메에게 가져다준다.
살로메는 기뻐하며 “Ah, du wolltest mich nicht deinen Mund kuessen lassen”(요하난 너는 내가 네 입에 키스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Ah, Ich habe deinen Mund gekuesst.(나는 이제 네 입술에 키스한다.)라고 외치며 ”Ah! Ich habe deinen Mund gekuesst, Jochanaan(아! 요하난 난 그대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네)“라는 노래를 부른다.
Salome
Ah! Ich habe deinen Mund gekuesst, Jochanaan
(아! 요하난 난 그대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네)
Ah! Ich habe ihn gekuesst, deinen Mund
(아! 나는 그대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네)
Es war ein bitter Geschmack auf deinen Lippen...
(네 입술은 씁쓸한 맛이 나네)
Hat es nach Blut geschmack?
(이건 피의 맛인가?)
Nein! Doch es schmeckte vielleicht nach Liebe...
(아니, 어쩜 이건 사랑의 맛일 거야!)
Sie sagen, dass die Liebe bitter schmecke...
(사랑은 쓴맛이 나는 거니까...)
Allein, was tut's?
(혼자서는 뭘 할 수 있지?)
Was tut's?
(뭘 할 수 있냐고?)
Ich habe deinen Mund gekuesst, Jochanaan
(요하난 난 그대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네)
Ich habe ihn gekuesst, deinen Mund.
(나는 그대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살로메’ 중에서)
사람들은 이 광란의 장면을 차마 보지 못하고 놀라 도망치거나 땅에 엎드린다. 헤롯왕도 참을 수 없다는 듯 살로메를 바라보다 왕비 헤로디아스를 재촉해 계단을 내려가 밖으로 나간다.
살로메는 여전히 세례자 요하난의 머리가 담긴 은쟁반을 놓고 그 위에 쓰러져 사랑의 신비는 죽음의 신비보다 더 위대하다며 죽은 세례자 요하난의 입술에 열정적으로 입맞춤을 한다. “요하난의 목에 키스하였노라”를 노래하는 살로메의 노랫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채운다.
밖으로 나가려고 계단을 내려가던 헤롯왕은 이 모습을 바라보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병사에게 살로메를 죽이라고 외친다. 그러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방패로 살로메를 눌러 죽이며 막이 내린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나오는 살로메 이야기를 근거로 수많은 작품들이 탄생한다. 살로메라는 인물은 성서에 등장하던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아주 특이한 캐릭터이다. 헤롯왕의 의붓딸로서 나이가 어린 그녀는 팜므파탈로서의 강한 이미지뿐 아니라 아직 나이 어린 여성으로서 성적 피해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성적 유혹을 할 만큼 성에 눈뜬 팜므파탈 여인으로서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쟁취할 수 있는 여인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살로메’의 분위기와 느낌은 인간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원동력처럼 작용하며 ‘사랑’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게 만든다. 사랑이란 개념은 결국 인간 간의 관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개념이기 때문일 것이다. 점차 문학은 물론 회화와 음악 등에서 까지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애욕과 증오, 그리고 성적 매력 등의 개념들을 어떻게 작품으로 표현해 내는가 하는 것이 주요 과제처럼 제기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에는 여전히 성적 이미지를 공개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금기시되던 시기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네의 ‘올랭피아’였다. 1863년 마네는 올랭피아를 그린다. 이 그림은 사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그림의 다른 복사본이라고 해도 무방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그림을 마네가 파리 살롱전에 제출하자 누드를 지금까지 신화와 관련된 작품 이외에는 허용하지 않던 보수적인 파리화단은 용납하지 않는다.
전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파리화단은 여전히 인간 간의 관계에 대한 감정들은 무시한 채 정밀화를 빼닮은 그림들만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러나 마네를 필두로 자유로운 영혼들이 새로운 유파를 형성하며 틀에 박힌 파리화단의 전통적 견해를 박살내고 만다. 소위 인상주의라는 이름아래 여러 유파를 이루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작품들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20세기를 전후한 시기 파리 이외에서도 드디어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표방하며 일단의 예술가들이 활동을 시작한다. 이름하여 유겐트스틸(Jugendstill), 또는 아르 누보(Art Nouveau.)라고 부르는 예술활동이 그것이다.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형식의 예술활동이 여러 각도에서 전개되기 시작한다. 살로메가 점차 다른 모습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사실주의나 표현주의, 또는 초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살로메의 또 다른 자유로운 모습을 담은 작품들이 어쩌면 지금 바로 우리 곁에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일곱 베일의 춤', 바빌로니아 이쉬타르 신화에서 차용한 것으로 정확한 유래는 다소 불확실하다. 그러나 일곱 베일의 춤을 추기 위한 기본 전제는 7번 옷을 벗으며 마지막에 알몸으로 춤을 추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바빌로니아 신화의 주인공 이쉬타르 역시 지하세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7개의 지옥문을 지나갈 때마다 옷을 하나씩 벗으면서 마지막에 결국 알몸이 되어 지하세계에 당도한다는 이야기이다.
살로메의 일곱 베일의 춤과 이쉬타르의 지하세계를 찾아갈 때 7개의 관문을 지나며 옷을 하나씩 벗는다는 이야기 구조가 같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모든 이야기가 이처럼 선행하는 이야기를 다르게 보고 달리 그리면서 새로이 태어나는 게 아닐까,...
영국 대중지 텔레그래프는 지난 2008년을 며칠 안 남기고 특별한 소식을 전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Salome)’에 실렸던 비어즐리(Aubrey Vincent Beardsley, 1872-1898)의 13개 삽화 중 행방이 묘연했던 두 작품, ‘클라이맥스(The Climax)’와 ‘플라토닉 비탄(A Platonic Lament)’이 최근 80년 만에 경매에 나와 약 20만 파운드(한화 약 4억 원)에 낙찰됐다.”라고 보도한다.
두 작품은 우연한 기회에 기자가 한 남성의 집을 방문했다가 집을 떠나기 직전 들른 화장실에서 이 작품들이 걸려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소장자는 미국의 대학교수이자 고미술품 애호가인 할아버지에게 이 그림들을 물려받았다고 하는데, 작품들 가치를 전혀 몰랐고 보관할 장소도 마땅치 않아 지금까지 화장실에 걸어 놨다고 한다.
비어즐리, 그는 19세기말 25년의 짧은 생을 살았던 삽화가로 알퐁스 무하와 더불어 아르누보의 대표적 삽화가로 꼽힌다. 생전 그는 에로티시즘으로 가득한 선으로 부르주아계급의 퇴폐성을 비꼬는 내용의 삽화를 그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비어즐리의 섬세하고 관음증을 자극하는 그림들은 단순히 내용을 부각하는 장치로서 뿐 아니라 미학적 활동 측면에서도 현대 아르누보 스타일로의 변화를 나타내는 중요한 신호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