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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연

루이 에르네스 바리아스

by 박종수

이 작품에는 조금씩 다른 느낌의 작품 제목이 붙기도 한다. 먼저, ‘과학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연’, 두 번째는 ‘자연이 스스로를 드러내다’, 그리고 ‘과학보다 먼저 자신을 드러내는 자연’이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한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의미는 결국 “인간의 가치가 인공적인 가치를 앞선다”는게 아닐까?


1.

1895년 프랑스 정부는 국립예술공예 학교의 주 계단을 장식하기 위해 에르네스 바리아스에게 작품제작을 의뢰한다. <과학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연: 1899>, 이 작품은 그렇게 탄생한다. 이 작품은 1899년 프랑스 살롱전에 출품해 인기를 누리기도 했는데 그 후 1931년까지 룩셈부르크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에르네스 바리아스 1899, <과학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연>, 오르세 미술관

이 작품은 알제리산 폴리크롬 컬러 대리석과 오닉스(줄마노, 또는 줄무늬가 있는 석회암)로 만들었는데 여기에 회색 화강암으로 만든 받침대와 공작석으로 만든 풍뎅이 조각품, 그리고 청금석 리본을 사용해 제작했다. 이 작품의 전체 무게는 830Kg으로 엄청난 무게를 지니고 있다. 제작에 사용한 객관적인 자료와 세공과정 등을 보기만 해도 작품의 특징과 느낌이 엄청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이 작품의 진짜 진가는, 1895년 프랑스 정부가 작품제작에 사용한 대리석을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명했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가 서둘러 작품 매수를 결정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편, 이 작품 <과학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연>은 1889년에 이미 보르도에 새로운 의과대학이 설립되면서 학교 장식을 위해 제작된 것이다. 젊은 여인과 자연의 우화를 지닌 이 작품은 그녀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베일을 천천히 들어 올리고 있는 모습에서부터 자연과의 대화가 시작되는 듯하다.


바리아스는 보르도의 의과대학이 제작의뢰한 작품을 흰색 대리석으로 제작하고, 파리에 있는 국립예

술공예 학교 계단에 설치할 두 번째 작품을 위해 조각상을 여러 가지 색으로 디자인한다. 이를 위해 알제리 채석장에서 나온 다색대리석과 오닉스 등을 사용해 제작한다.


재료의 장식적 특성을 높이기 위해 이 작품의 여러 부분을 세밀하게 살펴보면 작가의 노력이 얼마나 세심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먼저, 베일의 리본 모양을 오닉스로 만들어 제작과정의 세밀함에 놀라게 된다. 또한 모델이 마치 붉은 대리석으로 만든 알록달록한 드레스를 걸친듯한 모습으로 표현한 것도 놀라울 뿐이고, 또한 드레스를 고정하고 있는 청금석과 공작석으로 화려함은 물론이고 행운과 치유까지 고려한 작가의 의도가 이 작품을 더욱 의미 있는 작품으로 승격시킴으로써 작가 특유의 표현기법이 무척이나 화려하고 멋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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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전반적인 효과는 놀라울 정도로 풍부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조각상은 그동안 많은 인기를 얻으며 적지 않은 복제품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바리아스의 인기 있는 작품은 그 복제품만큼이나 작품 제목도 조금씩 다른 느낌의 작품 제목이 붙기도 한다. ‘과학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연’, 또는 ‘자연이 스스로를 드러내다’, 그리고 ‘과학보다 먼저 자신을 드러내는 자연’이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한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의미는 결국 “인간의 가치가 인공적인 가치를 앞선다”는게 아닐까?



2.


루이 에르네스 바리아스((Louis Ernest Barrias: 1841-1905), 그는 로댕(1840-1927)과 비슷한 시기 태어나 작품활동을 한다. 로댕의 작품이 투박하고 거칠면서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면 바리아스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따뜻하고 감성적인 인간의 모습을 느끼게 한다. 로댕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까미유 끌로델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느껴지게 되는 것이 로댕작품을 버겁게 하는 이유일지 모르겠다.


오귀스트 로댕, 지옥의 문(1880-1917), 오르세 미술관

로댕의 그 어떤 유명한 작품을 보게 되는 순간이라도 떠오르는 작품에 대한 느낌과 감정은 역시나 “작품은 어느새 한 작가의 내면의 세계를 배제하고는 탄생할 수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어떤 작품이든, 누구의 작품이든 그것은 이미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작품 이전에 작가 그 자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1880년 로댕은 장식예술박물관을 위한 작품 제작 의뢰를 받고 단테의 신곡에서 모티브를 얻어 지옥의 문을 만든다. 1888년 거의 완성이 되었지만 로댕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손질을 한다. 지옥의 문은 어쩌면 까미유 끌로델이 죽을 때까지 그렇게 계속 가두워두려했던 문이 아니었을까?


여하튼, 바리아스의 작품은 어쩌면 그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작가적 유산으로 풍부한 감성과 재질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루이 에르네스 바이아스, 그는 파리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도자기를 굽고 그림을 그리는 화기이기도 했다. 바리아스의 형도 화가였다. 바리아 스도 형처럼 어려서부터 예술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아버지의 도자기 사업을 이어받기 위해 예술을 직업으로 택하게 된다. 하지만 바리아스는 그림을 포기하고 조각을 선택한다.


1858년 바리아스는 파리에 있는 예술학교(E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한다. 6년 후 바리아스는 드디어 로마상을 수상한다. 그는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파리 오페라와 호텔 드 라 파이바 건설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 후 바리아스는 낭만적 사실주의 양식으로 장 바티스트 카르포의 영향을 받아 여러 조각상을 제작하는데 그중 대부분을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1881년 드디어 바리아스는 미술 부분 명예훈장을 받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 기사로 임명된다. 이후 그는 1차 대전에 장교로 임관해 사령관까지 역임한다. 군을 퇴임한 후 바리아스는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는데 국립박물관협의회 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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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더비 경매에 나온 작품들, 각각 약 3천만원, 5천만원, 1억원 정도에 낙찰


바리아스의 작품이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은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성의 관능적이고 에로틱한 모습을 통해 보여주는 자연친화적인 아름다움이 그가 보여주려 한 특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은 역시나 <과학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연: 1899>이라고 하겠는데, 이 작품을 여러 소재를 가지고 다양한 작품을 제작한다. 대리석은 물론이고 청동과 백옥, 등 다양한 소재의 돌과 철 등을 사용해 제작한다.


과학 앞에 모습을 드러낸 자연(1900), Mitsuo Kaji 개인소장,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작품의 크기도 다양한데 사람크기를 시작으로 73cm 크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73cm의 대리석 작품은 8,000유로에 팔린 반면, 같은 크기의 작품을 크리셀레판틴(Chryselephantine) 기법으로 제작한 작품은 27,000유로에 판매되어 열광적인 호응을 얻기도 했다.


특히 크리셀레판틴* 조각상은 시각적으로 눈길을 끌 뿐만 아니라, 세밀한 작업 과정을 거쳐야 하는 작품이기에 이를 제작하거나 제작 자금을 지원한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와 문화적 업적을 드러내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조각상을 제작하는 데는 조각, 목공, 보석 세공, 그리고 상아 조각에 대한 전문 기술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렇기 때문에 클리셀레판틴 기법으로 제작한 작품은 고귀하고 우아하기 이를 데 없는 거의 완벽한 작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 크리셀레판틴은 크리소스(금)와 엘레판티노스(상아), 즉 금과 상아를 사용해서 만드는 조각 기법을 말하는데, 대단히 귀하고 비싼 재료로 만들기 때문에 완성된 작품은 엄청난 제작비는 물론이고 신성하고 위엄 있는 느낌을 준다.)



3.


바리아스의 또 다른 작품들이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메가르의 어린 소녀: 1870>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작품인데, 작품 크기가 높이 126cm이고 무게가 361kg에 이른다. 이 작품은 1870년 프랑스 정부가 직접 매수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로마에서 가져온 대리석으로 제작한 작품인데 1870년도에 살롱전에 출품해 인기를 얻은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여러 크기와 다른 소재로 만든 작품들이 인기리에 판매되었는데 높이 31cm 크기로 만든 가장 작은 조각상이 6000유로에 판매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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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사다의 어린 소녀(1890), 메가르의 어린 소녀(1870), 악어사냥꾼(1894), 오르세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에는 바리아스의 또 다른 작품이 하나 더 있다. <악어사냥꾼, 또는 누비아인: 1894>이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인데, 1898년 개관한 파리 자연사박물관의 인류학 갤러리 장식을 위해 1893년 프랑스 정부가 바리아스에게 청동고부조 모형으로 작품 제작을 의뢰한다. 이 작품은 벽토로 제작되었는데, 1898년 프랑스 살롱전에 출품되었다.


바리아스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1878년 아클리마타시옹 정원에서 큰 성공을 거둔 퍼포먼스 행사를 회상한다. 허리띠를 두른 누비아 여인들이 사냥 장면을 흉내 내는 것이 인상적이었기에 그들이 악어와 대치하고 있는 엄청난 긴박감이 감도는 모습을 표현하려 했다. 창을 든 남자가 악어의 이빨에서 여자를 구해낼 수 있을까? 아이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런 느낌을 바리아스가 표현한 작품이 지금도 오르세 미술관을 지키고 있다.


이외에도 바리아스의 인기 있는 여러 작품들이 있지만 그중 <부 사다의 어린 소녀: 1890>가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작품은 상아와 은도금한 청동, 그리고 나무, 자개, 청금석(18~19세기) 등으로 제작해 화려함이 돋보인다. 꽃을 뿌리는 알제리 소녀의 이 조각상은 바리아스가 알제리 부 사다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현재 파리 몽마르트 묘지에 묻힌 동양화가 G.A. 기요메의 무덤을 위해 제작한 대리석 조각상을 재현한 것이다.


딱딱한 돌이나 대리석, 또는 청동으로 만든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 작품에 내재된 감성이 감정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단순한 물건일 뿐이다. 어떤 작품이든 우리에게 하나의 감정과 감성을 전해주는 따스한 작품이라면 그건 아마 대단한 작품임에 틀림없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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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아스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주제를 부각하기 위해 처음에 누드 작품을 제작했고, 이를 응용한 작품을 같이 만들었다. 첫번째 누드작품은 르망에 있는 테세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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