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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 학파 4-3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 37점

by 박종수


“페르메이르의 작품 37점을 주제별로 살펴보면, 고전적이거나 우화적이고 성서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들 5점, 도시 풍경을 담은 작품 2점, 여성을 다룬 작품 4점, 그리고 주택 실내를 담은 26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페르메이르 작품 이해를 위한 데이터들은 2025년 9월 2일 현재 마지막 업데이트된 것이다.)



○ 시작하며


1. 성 프락세디스: 많은 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진품으로 인정했음에도 여전히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2. 최근 <플루트를 들고 있는 소녀>를 소장자인 워싱턴 국립미술관측이 페르메이르의 작품목록에서 제외했다. 이 작품은 페르메이르의 작업실을 드나들던 익명의 관람객이 그린 작품이라는 주장 때문이다. 그러나 네덜란드 국립미술관측은 이 작품을 진품으로 인정하고 있다.


3. <버지널에 앉은 젊은 여인>은 그동안 많은 진위논란이 있었으나 페르메이르 전문가들과 암스테르담 레이크스미술관이 2023년 페르메이르 특별전을 개최하면서 이 작품을 진품으로 인정했다.


* 페르메이르의 그림 중 세 점만 페르메이르 본인이 직접 날짜를 기입했기 때문에, 이 글에서 제시한 각 그림의 제작 연도와 날짜는 다른 자료들과 다소 차이가 날 수 있다. 여기서는 네덜란드 국립미술관과 페르메이르에 대한 권위 있는 학자들, 즉 Albert Blankert(페르메이르: 1632–1675, 1975), Arthur K. Wheelock Jr.(페르메이르 시대의 공적과 사적, 2000), Walter Liedtke(페르메이르: 작품 카탈로그, 2008) 및 Wayne Franits(페르메이르, 2015)가 추정한 날짜 범위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 암스테르담 레이크스미술관에서 ‘2023년 페르메이르 회고전’을 개최하면서 제시한 작품제작 날짜와, Wikimedia에서 공개하고 있는 자료들 역시 모두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점도 기억하면 좋겠다.


* Johannes Vermeer는 흔히 한국어로 ‘죤스 베르메르’라고 표기하기도 했지만 그는 네덜란드 출신이기에 그의 한국어 표기는 영어식이 아닌 네덜란드어 발음으로 표기하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지금은 한국어로 ‘페르메이르’라고 쓰도록 표준화했기에 이를 따르도록 한다.



1. 디아나와 그녀의 동료들(1653-56, Diana and her Nymphs, 98.5x105cm, Mauritshuis: The Hague)


페르메이르는 21살이 되는 1653년 카타리나 볼네스와 결혼을 한 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가 택한 첫 번째 그림 소재는 당시 헤이그 인근의 부유한 귀족들이 좋아하던 고전주의적 취향에 어필하기 위해 ‘신화’의 한 장면을 선택한다. 그래서 페르메이르의 첫 작품 <디아나와 그녀의 동료들>이 탄생한다.


이 작품은 화가들이 일반적으로 그리는 풍경화나 정물화가 아닌 역사화이다. 페르메이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그의 초기 작품으로 생각했던 건 다름 아닌 그리스 신화 이야기 <다아나와 그녀의 동료들>과 성서 이야기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였다.

디아나와 그녀의 동료들

페르메이르가 어디서 누구와 함께 공부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그림의 구도와 채색, 그리고 인물묘사 등을 볼 때 역사화에 정통한 스승에게서 수업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고 그가 독학으로 그림을 배워 이처럼 완성도 높은 그림을 그렸다면 그야말로 천재가 아니고서는 흔치 않은 일이겠다. 심지어 페르메이르가 그의 고향 델프트에서 수습 과정을 마쳤다는 증거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페르메이르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로 <황금방울새>를 그린 카렐 파브리티우스가 언급되기도 하는데, 그는 1650년대 초 렘브란트의 제자로서 가르침을 받고 델프트에서 그의 작품 특성에 대해 소개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파브리티우스가 <황금방울새>에서 보여주는 빛과 색을 조형 요소로 다루는 방식이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특징과 유사점이 있지만, 파브리티우스가 1652년 10월 성 루카 길드에 입회했고 페르메이르는 1653년 12월에 가입을 한다. 따라서 페르메이르가 그 이전에 파브리티우스를 만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더구나 파브리티우스가 1650년 델프트에 도착하고 1654년 화약폭발 사고로 사망을 한다. 당시에는 화가들이 공식 등록 전에는 도제를 받을 수 없었기에 페르메이르가 그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디아나와 그의 님프들>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AC8 년에 쓴 15권으로 구성된 그리스 로마신화 서사시 <변신이야기> 제3권에 실린 <디아나와 악타이온>에서 발췌한 이야기이다. <변신 이야기>는 서양문화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 중 하나인데, 단테를 비롯한 보카치오나 셰익스피어나 등 유럽의 유명작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감을 주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당시 17세기까지 이국적이고 폭력적인 이야기를 묘사하는 데 열중했던 화가들에게 이 같은 ‘디아나와 악티이온의 이야기’는 그림의 소재로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페르메이르가 묘사한 다이애나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다.

그리스 로마신화 서사시 <변신이야기> 표지

순결을 상징하는 사냥의 여신 다이애나는 이마에 있는 작은 초승달로만 식별할 수 있다. 페르메이르는 다이애나와 그녀의 수행원들을 옷을 입은 모습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체 묘사와는 다른 방식이다. 다이애나는 고요한 사색에 잠겨 있으며, 두려움에 떨던 그녀의 성격은 드러나지 않는다.


페르메이르가 여성의 신체를 다루는 방식은 암스테르담의 거장 렘브란트의 접근 방식과 유사하며, 부드러움과 공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이후 페르메이르 그림의 특징이 되었다. 특히 그가 그린 새틴 드레스의 재단은 당시 유행을 암시하며, 그 색깔은 페르메이르가 평생 노란색에 매료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페르메이르가 나중에 실내 풍경화에서 보여주는 세련된 모피 장식의 재킷을 그릴 때 이러한 취향을 대부분 반영한다.


뿐만 아니라 다이애나의 검소한 복장과 발치에 놓인 황동 세면대와 흰 천은 순결과 순수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미덕은 신화보다는 기독교 전통에 더 부합하는 엄숙함이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 균형을 이룬다. 17세기에는 신화와 성경 이야기 사이의 유사점이 자주 그려졌는데, 페르메이르는 이 그림에서 이 두 이야기를 융합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다.


기독교 관습에서 발을 씻는 행위는 정화뿐만 아니라 겸손과 죽음의 도래를 상징한다. 다이애나의 동반자가 그녀의 발을 정중하게 돌보는 모습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의 발을 눈물로 씻기거나, 예수가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기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 이 작품은 페르메이르가 복잡한 이미지를 구성하는 데 가장 성공적인 회화적 도구 중 하나인 원형 구도에 얼마나 능숙했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진정한 원형 구도는 원형 물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여러 물체를 조합하여 원형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원형 구도는 보는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켜 내면으로 이끌 수 있다. 특히 예술가가 중심 주제나 주제를 강조하고 싶을 때 효과적이다. 원은 여러 문화권에서 깊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통일성, 전체성, 무한성, 영원성과 같은 개념을 나타낼 수 있다. 페르메이르는 원형 구도가 이러한 문화적, 상징적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열정적이고 특징적인 작품으로 출발한 페르메이르가 초기 작품들을 완성한 다음 역사화의 길을 벗어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아서 K. 휠록 주니어가 말했듯이, 그는 자신이 성서와 신화 속 장면을 그리는 데 재능이 있었지만, 자신의 진정한 천재성은 일상생활에서 끌어낸 이미지 속에서 그에 버금가는 품위와 목적의식을 전달하는 능력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2.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1654~56,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ia, 160☓142cm, National Gallery of Scotland: Edinburgh)


페르메이르의 초기 작품으로 알려진 <디아나와 그녀의 친구들>,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는 당시 미술 이론가들이 가장 고상한 유형의 주제로 여겼던 "역사"에 속한다. 페르메이르가 그린 이 두 번째 작품 역시 성경 속 이야기(누가복음)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길 가다 마르타의 집에 들어가게 된 예수가 마르타에게 말씀을 전하는 대목이다. 마르타는 예수를 대접하기 위해 분주히 일을 하는데 마리아는 일은 안 하고 예수 옆에 딱 붙어 앉아 팔을 턱에 괴고 그의 말만 경청하고 있다. 이에 짜증이 난 마르타가 마리아의 행위에 대해 짜증 어린 말을 하자 예수께서 “그냥 놔두어라, 내 말을 잘 듣고 따르는 게 더 나을 테니 말이다...” 대충 이런 의미를 담은 대목이다.


그런데 페르메이르의 작품 37점 모두 똑같은 특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인간이 없는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는 듯 페르메이르는 모든 작품에 인물 위주로 그림을 그렸다. 심지어 페르메이르의 풍경화로 알려진 그림 두 점 역시 모두 인물이 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03. 성 프락세디스(1655, Saint Praxedis, 101.6x82.6cm, National Museum of Western Art: Tokyo)


이 작품은 언뜻 보기에 피케렐리의 ‘성 프락세디스’를 그대로 옮겨온 것처럼 보이지만 모티브와 양식 면에서 차이가 있다. 페르메이르 모작에는 성인의 손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지만 원본에는 십자가가 없다. 모작의 강렬한 명암 대비는 더욱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뚜렷하게 배치되어 움직임과 빛의 극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젊은 페르메이르는 초기 역사화에서 이미 평생 동안 여성의 내면에 매료되어 온 마음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디아나와 그녀의 동료들>과 <마르타와 마리아 집의 그리스도>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우리는 작가의 관심이 임박한 서사의 주인공뿐 아니라 여성 개인에게도 있음을 감지한다.


페르메이르의 초기 역사화를 살펴보면 그의 예술적 궤적에 대한 흥미로운 관찰을 얻을 수 있다. 특히, <디아나와 그녀의 동료들>, <마르타와 마리아 집에 있는 그리스도>, <성녀 프락세디스>와 같은 작품들은 그가 여성 인물의 내면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초기 경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주제적 관심은 그를 동시대 다른 여러 장르 화가들과 차별화시키며, 그의 후기 작품들을 규정하는 더욱 깊은 감정적 함의의 전조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성 프락세디스

성 프락세디스와 같은 신앙심 깊은 그림은 페르메이르가 1653년 결혼 직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추정과 델프트 예수회와의 관계와 잘 들어맞는다. 특히 페르메이르가 피케렐리의 작품에 추가한 성자와 십자가의 중요성은 예수회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강렬한 숭배와 잘 어울린다. 성 프락세디스가 예수회의 의뢰를 받았는지는 여전히 추측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페르메이르의 모사품과 피케렐리의 원본 ‘성 프락세디스’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무릎을 꿇은 성녀의 손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페르메이르의 수석 전기 작가 존 마이클 몬티아스는 예수회가 이 젊은 델프트 화가에게 이 그림의 복제품을 제작하도록 의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아마도 예수회가 페르메이르에게 성인의 손에 황금 십자가를 쥐어주라고 지시했을 것이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십자가는 상징적인 물건이었고, 무엇보다도 그 소유자가 로마 가톨릭 신앙에 충실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참고 사항

위작설에 휩싸여 있던 <성 프락세디스>, 2023년 네덜란드 레이크스 박물관에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페르메이르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전시회”에 일본 국립서양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성 프락세디스> 작품이 참여한다. 이 작품을 네덜란드 레이크스박물관이 철저한 검증과정을 거쳐 최종 위작이 아니라 진품이라고 결론짓고 전시회에 전시를 결정한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화가 펠리체 피케레리(1605-60)의 작품을 모사한 작품으로 화면 왼쪽 아래에 서명과 연도(Meer 1655) 표시로 볼 때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특히 의복의 목 부분과 팔소매에 쓰인 백색납은 페르메이르의 초기 작품에서 쓰인 것과 매우 흡사한 화학 성분의 안료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성 프락세디스>, 이 작품은 지난 2014년도에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일본기업에게 624만 파운드(약 109억 원)에 낙찰되었다. 작품 한 점만 소개되어도 블록버스터 전시가 되는 페르메이르의 인기에 비해 낙찰가격이 낮았던 이유는 이 작품이 그동안 진위문제로 시달려왔기 때문에 페르메이르의 작품 명단에 올라있지 않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일본 국립서양미술관은 이 작품을 낙찰받은 기업으로부터 <성 프락세디스>를 영구임대해 국립서양미술관에 전시 중이다.



4. 뚜쟁이(1656, The Procuress, 130x143cm, Gemäldegalerie Alte Meister: Dresden)


밝은 노란색 옷을 입은 창녀와 그녀의 가슴을 슬쩍 만지면서 여자의 손에 은전을 쥐어주는 남자, 이 남자와 창녀의 묘한 거래를 이어주는 나이 든 뚜쟁이 여자, 그리고 화면 좌측에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 등 모두 4명이 등장한다.

뚜쟁이

화면의 빛을 받는 젊은 여인은 이미 술에 취한 듯 두 뺨에 홍조를 띠고 있고 손에는 와인잔을 들고 남자가 주는 은전을 받으려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 옆으로 델프트 자기도 빛나고 있어 싸구려 술집 같다는 느낌은 없다. 더구나 여인을 감싸고 있는 카펫이 당시 네덜란드의 대외무역으로 재미를 보고 있는 항구도시 델프트의 부유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 곁에서 깜짝 모습을 드러낸 페르메이르, 그는 이제 “안 참을 거야!” 하는 듯 처음 보여준 성서이야기의 작품들과 정반대의 세속적 풍습을 담은 뚜쟁이를 통해 반전을 보여준다. 페르메이르도 점차 본색(?)을 드러내며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한편, 페르메이르의 자화상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있는 37점의 작품 중 자화상은 한 점도 없다. 그런데 페르메이르는 다행히 자신의 작품 속에 그의 초상을 이렇게 슬쩍 숨겨 놓았다.



05. 잠자는 여인(1656-57, Young woman sleeping, 87.6x76.5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잠자는 여인

이 그림의 단서는 문 뒤에 있다. 이 그림을 X선 촬영을 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림 속 문 뒤편에 강아지 한 마리와 남자 한 명이 있다는 사실이다. 문 뒤편 쪽으로 남자는 떠나가고 강아지는 떠나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그림을 다시 보면 그림 속 여인은 졸고 있는 게 아니라 떠나간 연인에게 원망 어린 감정을 느끼고 슬퍼하고 있는 게 아닐까? 과연 페르메이르는 문뒤에 있던 강아지와 남자의 모습을 왜 없애버린 것일까? 어떤 의도가 있길래 여자를 졸고 있는 여인으로 단순화시켜 버린 것일까?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06. 장교와 웃음 띄운 여인(1657~60, De Soldaat en het Lachende Meisje, 50.5x46 cm, Frick Collection: New York)

장교와 웃음 띄운 여인

젊은 여인이 제법 지위가 있어 보이는 장교와 마주하고 앉아 있다. 여인의 눈동자는 묘한 표정으로 남성에게 어떤 무언가를 암시하듯 웃음을 짓고 심지어 손을 내밀고 남성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듯이 하고 있다. 벽에는 세계지도가 걸려있고 창문은 활짝 열어놓아 환한 빛이 방안 가득하다.


앉아 있는 남성은 세계를 누비는 장교일 것이고 잠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려는 듯하다. 여인은 어쩌면 장교에게 휴식의 대가를 요구하면서 그를 유혹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07 델프트의 어느 골목 풍경.(1657-61, Gezicht op huizen in Delft bekend als 'Het straatje, 54.3x44㎝, Rijksmuseum: Amsterdam)

델프트의 어느 골목 풍경

작은 거리로 알려진 델프트 어느 골목길 풍경, 1658년, 왼쪽 하단 창문 아래 벽에 그의 서명이 보인다. 이 골목풍경은 실제 그가 장모집에서 거주하던 집을 배경으로 한 그림인데, 델프트에 있는 또 다른 구교회 건물에 붙어 있는 집에서 페르메이르가 그의 아내와 신혼생활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지세히 보면 어린아이들이 골목에서 놀고 있는 모습도 보이는데 페르메이르는 바로 그 집을 기억하고 싶어 했던 게 아닐까?


더구나 그림 속 아이들의 놀이 모습이 등장하는데 페르메이르의 아이들이 집 앞 골목에서 놀고 있는 모습이 아닐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게 한다. 또한 그림 속 왼쪽 아래편에 창문이 있고 그 창문을 받치고 있는 흰색받침대에 페르메이르의 사인이 있다. 그의 그림에서 그의 사인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 작품에 그가 사인을 뚜렷이 한 이유가 무엇일지 그것도 궁금하다.


1658년 피터르 더 호흐는 그의 대표작 <델프트 주택의 안뜰>을 그린다. 이 작품은 페르메이르의 <골목 풍경>에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08. 우유 따르는 하녀(1657~61, Het melkmeide, 45.5x41cm, Rijksmuseum: Amsterdam)


그림 속 여인은 지금 우유를 따르고 있다. 그 앞에는 빵바구니가 놓여있다. 그런데 우유를 따르는 하녀의 팔을 보면 살갗 색상이 다르다. 일을 꽤 오랫동안 했기에 저리 팔의 색깔 위아래가 다를 테지. 팔소매를 걷어 올린 간격과 앞치마의 주름, 그녀가 쓰고 있는 머리의 두건과 단순한 디자인의 겉저고리 모양새 등, 뿐만 아니라 벽 모서리에 걸린 소품과 바닥 뒤켠에 보이는 또 다른 소품 등도 보인다.


페르메이르는 그녀를 통해 네덜란드의 일상적인 생활상을 자세히도 보여주고 있다. 단순한 그림처럼 보이지만 단순하지가 않다는 말이다. 어쩌면 페르메이르의 맛(?)이 바로 이런 단순함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이 아닐까?

우유 따르는 하녀

페르메이르는 다른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이 그림에 엄청난 제작비를 투입한다. 그림 속 여인의 직업이 하녀임이 분명할 진데 그녀가 입고 있는 치마에는 감청색의 염료를 칠했다. 가장 비싼 염료이다. 울트라마린(감청색)을 구입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과연 페르메이르는 어떻게 구입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일까?

한편, 2023년 4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은 페르메이르 작품 37점 중 28점을 모아 <페르메이르 특별전시회>를 열었다. 그 결과 대표작인 '우유를 따르는 여인'을 정밀 촬영해 덧칠된 캔버스 이면에서 항아리 받침대와 바구니를 찾아냈다. 다른 작품에서도 밑그림이 발견되면서 아주 느리고 정교하게 작업하는 화가로 알려진 그의 작업 방식은 “기교적이고 엄격하다”라고 재평가된다.


1650년대 후반 페르메이르는 당시의 풍속화에서 영감을 받아 <장교와 웃는 소녀>, <우유 따르는 하녀>를 그리는데 페르메이르는 가장 밝은 부분에 밝은 색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점묘법을 사용해 그의 다른 작품에서는 보기 드문 밝은 광채를 선사한다. 그러나 페르메이르는 그 후 노동자 계층의 인물을 두 번 다시 그리지 않는다.



09 숙녀의 연주를 방해하는 남자(1658~61, Girl Interrupted at Her Music, 39.3x 44.4cm, Frick Collection: New York)


이 그림에서 페르메이르는 음악을 연주하는 한 여성과 그녀 옆에 한 신사를 묘사한다. 그림 속 남자는 유행하는 옷차림으로 보아 상류 계층일 가능성이 높다. 이 그림은 17세기 유럽의 전형적인 구애를 보여준다. 또한 사랑에 있어 음악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숙녀의 연주를 방해하는 남자

그들이 그려진 방은 상류층의 방일 가능성이 높다. 사자머리 장식이 달린 의자들과 책상 위에는 악기도 놓여 있고 와인잔일 것으로 보이는 델프트블루 와인잔도 놓여 있다. 그림 왼쪽에는 여러 장식이 있는 창문이 있는데, 이 창문에서 빛이 공급되고 있다.


페르메이르는 다른 9개의 작품(음악 레슨, 와인잔을 든 소녀, 와인 잔, 장교와 웃는 소녀, 하녀와 편지를 쓰는 여인, 물병을 든 여인, 류트를 든 여인, 저울을 든 여인, 진주 목걸이를 한 여인)에서도 동일한 창문 디자인을 사용했다. 일부 전문가 들은 이 그림이 페르메이르의 작품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의 정밀함은 오히려 이 그림이 폐르메이르의 진품임을 증명한다고 여겼다.


장면 배경의 흐릿한 그림은 큐피드이다. 그림 속의 그림은 1907년 복원 후 발견되었는데, 벽과 바이올린에 가려져 있었다. 큐피드 그림은 다른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에서도 벽면 장식액자로 여러 번 나타난다.



10. 숙녀와 두 남자(1659~62, A Lady and Two Gentlemen, 78x67cm, Herzog Anton_Ulrich Museum: Braunschweig)

숙녀와 두 남자

한 남성이 여인에게 와인잔을 권하고 있다. 여인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이 와인잔을 받아 들고 있는데, 주변에는 한 남성이 졸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고 벽에 걸린 액자 속의 또 다른 남성이 그림이지만 이들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다.


탁자 위에는 신맛 나는 과일이 놓여 있는데, 레몬의 신맛은 신맛 나는 사랑과 거짓된 우정을 의미한다. 흔히 이런 신맛 나는 과일은 미와 사랑의 여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11. 창가에서 편지를 읽고 있는 소녀(1657-59, Girl Reading a Letter by an Open Window, 83x64.5cm Gemäldegalerie Alte Meister: Dresden)


독일 드레스덴 박물관은 페르메이르의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라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드레스덴 박물관 측은 이 작품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그림 속 소녀가 있는 뒤편 벽면에 아무것도 없이 휑한 게 이상하기만 했다.(아래 왼쪽 작품) 그래서 드레스덴 박물관측은 전자현미경을 통해 세밀하게 관찰하게 되었고 누군가 이 부분을 덧칠했음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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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57-59_Vermeer_Girl_Reading_a_Letter_by_an_Open_Window.JPG
1) 창가에서 편지를 읽고 있는 소녀, 2) 복원작업을 마친 '창가에서 편지를 읽고 있는 소녀'


드레스덴 국립 미술관측은 2017년부터 1년 반에 걸쳐 복원작업을 진행한다. 복원 과정에서 그림 안에 또 다른 그림이 발견되었는데, 편지를 읽는 소녀 위, 뒤편 벽에 큐피드 그림이 나타난다. 사랑의 큐피드가 지켜보는 가운데 소녀가 사랑의 편지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드러난 큐피드가 더해짐으로써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의 작품은 완전히 낭만적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큐피드의 존재는 과학적 분석 결과 페르메이르가 사망한 지 오랜 후에 은폐된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그림 속 주인공이 페르메이르의 부인 카타리나 볼네스가 아닐까라고 추측을 한다. 다른 그림 속 여인들 중 임신한 모습의 <편지 읽는 여인> 등을 볼 때 얼굴 옆모습이 비슷하기도 하다.



12. 델프트 풍경(1660-63, View of Delft, 98.5x117.5cm, Mauritshuis: The Hague)


네덜란드 도시에는 대부분 운하가 있고 이곳을 통해 대부분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이 같은 운하를 포함한 도시 풍경은 일반적인 특징 중 하나일 것이다. 멀리 교회 첨탑이 보이는데 구교회와 신교회, 그리고 개신교 교회로 사용 중인 구교회가 우측에 보인다.


델프트 풍경

전통복식의 여인들도 보인다. 페르메이르가 그린 풍경화는 단지 2점뿐인데 그가 살던 고향 델프트를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 속에도 페르메이르의 아이들(?)이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페르메이르 풍경 역시 철저한 원근법을 적용해 그리고 있다.


어쨌든, 윌리엄 1세는 페르메이르의 그림을 정말 좋아했을 것 같다. 그림 오른쪽 가운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교회의 탑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탑은 신교회의 일부로, 그의 전임자인 오렌지 공 빌렘(16세기 통치)의 대리석 묘비가 안치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1822년 네덜란드 정부가 당시 상당한 금액인 2,900 네덜란드 길더에 구입하여 국왕의 갤러리에 전시한다. 이는 숙련된 장인의 연봉 약 6배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당시 네덜란드 도시의 스케치와 판화는 17세기와 18세기 네덜란드 시장에서 매우 인기 있는 상품이었다.



13. 포도주 마시는 여인(1658-61, The Glass of Wine, 65x77㎝, Gemäldegalerie: Berlin)

포도주 마시는 여인

포도주 마시는 여인과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한 남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실내에 놓인 가구와 와인으로 남자의 경제력과 신분을 짐작케 한다. 여인은 와인을 마시고 있고 남자는 술병을 들고 그녀가 술을 다 마시면 또다시 술을 따라줄 요량으로 술병을 붙들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와인이 담긴 흰색 도자기가 있고 남자는 이미 취한 것 같은 여성에게 자꾸 와인을 권하는 음흉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그림 속에서도 자기로 만든 포도주 병과 와인 잔은 유혹과 부유함의 메타포로 묘사돼 있다.


그런데 가만 보면 페르메이르의 특징인 왼편 창가의 모양과 빛의 밝기가 방안 분위기를 묘하게 규정하고 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곧 어둠이 찾아올지도 모를 것 같은...



14. 주전자를 들고 있는 여인(1662~65, Young Woman with a water pitcher, 45.7x40.6㎝,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주전자를 들고 있는 여인

한 여성이 금칠을 한 주전자와 대야를 가지고 간단한 세안을 하고 하얀 린넨 덮개로 드레스와 머리카락을 보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하루를 시작하는 여인의 사적인 모습을 관음증적으로 엿보게 한다.


이 그림 역시 페르메이르의 특징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왼쪽 창에서 들어오는 빛, 모델 뒤편에 그림액자, 탁자 위를 덮은 테피스트리, 이런 것들은 대부분 페르메이르 그림 속 특징을 보여주는 요소들이다. 이 그림에도 적지 않은 ‘울트라마린’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15. 창가에서 류트를 연주하는 소녀(1662-65, Woman with a Lute near a window, 51.4x45.7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창가에서 류트를 연주하는 소녀

젊은 여인이 류트를 조율하면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책상 위에는 펼쳐진 노래책이 놓여 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부유한 가정의 젊은이들은 교육의 일환으로 음악을 공부했기에 이 젊은 소녀 역시 공부의 일환으로 음악공부를 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한편, 그녀가 있는 방안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지도는 당시 네덜란드 가정의 장식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더구나 그 지도의 내용이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유럽과 인근 지역을 보여줌으로써 네덜란드가 세계중심이라는 자부심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6. 편지를 읽고 있는 여인(1662-65, Woman reading a letter, 46.5x39cm, Rijksmuseum: Amsterdam)

편지를 읽고 있는 여인

작품 속 여인은 아이를 임신한 여인네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내온 반가운 님의 편지를 읽고 있는 듯하다. 그녀가 서 있는 방안에는 세계지도가 걸려있어 그녀 남편이 어쩌면 해외로 나가 있어 그곳에서 보내온 편지를 읽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작품 역시 페르메이르의 전형적인 그림 속 특징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림 속 여인은 임신 중인 모습인데 많은 미술사학자들이 그녀를 페르메이르의 부인 카타리나 볼네스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17. 저울을 들고 있는 여인(1662~65, Woman holding a balance, 42.5x38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저울을 들고 있는 여인

작품 16번 <편지를 읽고 있는 여인>과 17번 <저울을 들고 있는 여인>에 등장한 모델은 동일인이다. 더구나 두 모델 모두 임신 중으로 보인다. 일반 여성의 체형이라기 보다는 임신으로 배가 불러와 어쩌면 조만간 해산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일 듯하다.

여하튼, 저울을 들고 있는 여인의 그림 속에 또 다른 그림, 즉 액자가 걸려 있다. 그림 속 그림은 <최후의 심판>처럼 보인다. 저울은 하늘나라에서 천국과 지옥으로 가기 위해 저울에 올라가 심판을 받게 되는 상징적인 행위를 대신한다. 보석을 앞에 놓고 여인은 저울질을 하지만 그것이 주는 의미는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어찌해야 하는 지를 의미심장하게 보여주고 있다.



18. 진주 목걸이를 한 여인(1662~65, Young Woman with a Pearl Necklace, Gemäldegalerie: Berlin)


상류층 출신으로 추정되는 젊은 여성이 주황색 리본을 머리에 꽂고 진주 귀걸이와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 여인의 정면 벽에 액자같이 보이는 것은 거울로 추측된다.

진주 목걸이를 한 여인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에 델프트 학파의 일원인 페르메이르는 가정 내 장면을 묘사하고 그 장면에 어울리는 여인들을 많이 그렸다. 노란 옷을 입은 여인의 화려함은 이 여인이 중산층 이상의 가정 출신 여인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림의 많은 부분은 흰색 벽이다. 이는 화가가 주인공인 젊은 여성에게 무대를 마련해 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녀 뒤의 벽에는 아무런 장식이나 장치가 없기 때문에 관객은 주인공의 표정과 행동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림 왼쪽에 드리워진 짙은 파란색 식탁보는 작품에 강렬한 대비를 더한다. 페르메이르는 그림의 기하학적 구성을 유지하기 위해 대비되는 지점을 만들고 여인의 노란색 옷에 대비되는 보색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19.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1665~67, Meisje met de parel, 46.5x40cm, Mauritshuis: The Hague)


이 그림은 수세기에 걸쳐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20세기 말에 이르러 그림 속 소녀가 착용한 귀고리를 따서 현재의 제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그림은 또한 트로니(tronie)로 추정되는데, 트로니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특정 모델의 초상화가 아닌 일반적인 '두상'을 일컫는 용어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전문가들이 트로니로 단정 짓는 이유 중 하나가 그림이 그려진 17세기 중반 네덜란드에서 10대 소녀가 값비싼 진주와 금값에 해당하는 블루 염료로 만들어진 블루 터번을 두른 것이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 설정이기 때문에 화가가 만들어낸 트로니에 해당될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림은 "이국적인 의상"과 "동양풍 터번"을 착용하고 매우 큰 진주로 보이는 귀고리를 한 소녀를 묘사하고 있다. 그림의 주인공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실제 모델이 있었을 가능성과 화가가 더 일반화해서 신비로운 여인을 창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2014년 마우리츠후위스 미술관이 앞으로 이 작품을 미술관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헤이그를 찾아가야만 한다. 또한 2014년, 네덜란드의 천체물리학자 빈센트 이케는 귀고리의 재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반사광과 귀고리의 큰 크기 등을 근거로 진주보다는 광택이 있는 주석에 가깝다고 주장을 한다. 어쩌면 이리 큰 진주귀걸이를 페르메이르가 준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던 차에 진주 비슷한 주석일 가능성 제시에 관심이 간다.


최근에는 새로운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2025년 10월, 이 그림의 모델이 페르메이르의 주요 후원자인 피터르 클래스 판 라위번의 12세 딸인 막달레나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그녀는 델프트 구도심의 황금 독수리라는 집에서 살았으며, 개신교 신자였던 가족은 성경 속 마리아 막달레나를 기려 딸에게 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성경 속 인물처럼 옷을 입은 이 초상화는 막달레나의 세례를 기념하기 위해 그렸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Andrew Graham-Dixon(2025년 10월 14일). “How I unmasked the real Girl with a Pearl Earring”. (www.thetimes.com)



20 음악 레슨(1662-65, The Music Lesson, 73.3x64.5cm, Royal Collection: Buckingham Palace, England)

음악 레슨

페르메이르 그림의 특징 중 하나는 화면 구성을 하면서 벽에 액자를 하나, 또는 두 개를 걸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대개의 경우 두 개중 하나는 목가적이고 평화스러운 풍경화이고, 다른 하나는 다소 에로틱하고 사랑을 주제로 하는 그림이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한 여인이 하프시코드를 연주하고 있는데 그녀가 있는 방안의 풍경은 목가적인 풍경화가 낭만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고, 큐피드가 활을 들고 3이라는 카드를 한 장 들고 있는 모습은 정적이지만 한 사람에게만 고백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을 보여준다. 과연 그녀가 연주하는 음악은 과연 어떤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17세기 낭만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연찬양과 근대화에 대한 저항이었다. 화가들이 그리는 목가적인 특징은 낭만주의를 표현하는 수단이자 방법이었다. 따라서 낭만주의를 사용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끌리는 사람들의 감성적이고 에로틱한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21. 콘서트(1663~66, The Concert, 72.5x64.7cm, 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 Boston)

콘서트

그림의 배경으로 두 개의 그림이 벽에 걸려 있다. 왼편은 나무를 그린 목가적인 풍경이고 오른쪽은 중매인이 나서서 사랑을 사고파는 행위를 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위트레흐트 출신의 Dirck van Baburen(1590-1624)이 1622년 제작한 것이다. 이 그림은 페르메르의 장모 집에 걸려 있던 것인데 장모의 컬렉션은 페르메르의 작품 주제 구성에 영감을 주는 주요한 원천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그림은 1990년 3월 18일 미국 보스턴에 있는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Isalbella Stewart Gardner Museum)에서 전시 중 도난을 당한다. 35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 행방이 묘연하기만 하다. 박물관 측은 도난당한 그림을 제외한 액자틀만 전시실에 여전히 걸어놓고 있다고 한다.


22. 글을 쓰고 있는 여인(1662-67, A Lady Writing, 45x39.9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그림 속 여인은 고급의류를 입고 있다. 그녀의 옷은 일반인이 입기에 쉽지 않았을 텐데 페르메이르는 그녀의 옷을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고급스러움을 더 하고 있다. 유난히 섬세하게 표현한 페르메이르의 표현은 그의 아버지 영향일 거라는 판단이다. 페르메이르의 아버지는 그가 어려서 고급 의류원단에 채색 면직물인 카파(Caffa)를 생산하는 일을 했다. 이 사실은 페르메이르가 그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옷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이유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글을 쓰고 있는 여인

그뿐 아니라 페르메이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미술품을 소개하는 화상 딜러로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 후 1652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페르메이르는 그의 아버지 뒤를 이어 섬유봉제공장일과 미술 딜러 사업을 이어받는다. 페르메이르도 아버지처럼 봉제기술자 겸 미술딜러가 된 것이다.


편지를 쓰고 있는 여인뿐 아니라 다른 여러 그림들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의상이 다소 화려하지는 않지만 제법 고급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연유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편지를 쓰고 있는 여인이 입고 있는 질감 좋은 노란색 겉저고리를 페르메이르는 다른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들에게도 똑같이 입혔다는 사실이다.


<기타 치는 여인>, <창가에서 류트 연주하는 여인>, <편지를 전해주는 하인과 여인>, <연애편지와 류트를 들고 있는 여인>, 그리고 <진주목걸이를 하고 있는 여인> 등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이 모두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걸치고 있다. 그러나 입고 있는 옷의 질감표현은 다 다르다. 섬세하고 정밀한 표현이 가히 사실적이란 말이다. 그래서 같은 옷이지만 다른 옷처럼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23. 젊은 여인의 초상(1665-67, Portrait of a Young Woman, 44.5x40㎝,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젊은 여인의 초상

이 그림은 의뢰된 초상화가 아니라 당시에 특이한 의상을 입은 한 소녀를 대상으로 작가가 임의로 그린 트로니(tronie) 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페르메이르의 아이들 중 한 아이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젊은 여인의 초상은 페르메이르 특유의 풍부한 배경이 없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대신 소녀는 짙은 검은색 배경에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고립된 효과는 소녀의 취약성을 상쇄하고 관객은 소녀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유발하게 되는 효과를 주고 있다.





24. 소녀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하녀(1666-68, Lady and Maidservant Holding Letter, 90.2x78.7cm, Frick Collection: New York)


이 그림은 우아한 여주인과 하녀가 방금 받은 연애편지를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는 페르메이르의 주요 화풍이 나타나 있다. 여인의 우아한 모피 안감이 달린 외투에는 노란색이, 실크 식탁보와 하녀의 앞치마에는 파란색이 강렬하게 사용되었다. 그림의 초점은 책상에 앉아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 두 여인이다.

소녀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하녀

페르메이르는 여인들이 등장하는 가정 풍속화로 유명했다. 그림 속 빛은 왼쪽에서 들어와 여주인의 얼굴에 닿는데, 이는 그녀의 다리에 드리운 테이블 그림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 그림은 언뜻 보기에는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더 깊은 심리적 함의를 담고 있다.


그림을 똑바로 보면 여주인이 봉인된 연애편지를 바라보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아마도 아주 멀리 있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녀와 여주인은 서로에게 몸을 기울이는 은밀한 눈빛과 몸짓을 통해 은근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여주인은 생각에 잠긴 듯 입술을 살짝 벌리고 손끝을 턱에 대고 의문을 품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여주인의 옆모습은 약간 흐릿하고 불분명하며, 페르메이르의 다른 그림인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처럼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다.



25. 빨간 모자를 쓴 소녀(1665-67, Girl with a Red Hat, 23.2x18.1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2022년 10월 8일부터 2023년 1월 8일까지 워싱턴 국립미술관에서 ‘페르메이르의 비밀’이라는 전시회가 열렸다.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은 모두 37점인데 그중 워싱턴 국립미술관이 4점이나 소장하고 있다. <빨간 모자를 쓴 소녀>를 비롯해 <저울을 든 여인>과 <편지를 쓰고 있는 여인>, 그리고 <플루트를 든 소녀>가 바로 워싱턴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빨간 모자를 쓴 소녀

한 전문가가 1669년경에 그린 <빨간 모자를 쓴 소녀>가 사실 페르메이르의 첫째 딸 마리아가 그린 자화상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고 한다. 더욱이 로렌스 베슐러가 ‘Atlantic’ 신문에 기고한 보도에 따르면, 그녀는 네덜란드 거장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몇몇 작품들을 직접 그렸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내놓기도 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플루트를 들고 있는 소녀, 1669/ 1675년경>가 신원 미상의 수습생의 작품일 가능성이 밝혀지면서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사실들의 가능성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1670년대의 페르메이르 작품에 대한 빈스톡의 가설은, 마리아가 아버지의 조수로 일하며 아버지의 기법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포함하여 그동안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제작 연대와 상당히 다르다.


그는 <플루트를 든 소녀>와 <빨간 모자를 쓴 소녀>를 마리아의 초기 자화상으로 분류했는데, 그 이유는 그 작품의 구도뿐 아니라 다소 어색하고 아마추어적인 양식 때문이라고 했다. 두 그림 모두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었으며, 빈스톡은 마리아의 10대 후반 시기와 일치하도록 1672년을 선택했다.


그동안 페르메이르와 조수가 함께 작업한 적이 없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는데 암스테르담의 레이크스국립미술관이 <플루트를 든 소녀>를 재평가하면서 이러한 추측은 재고되었다. 빈스톡에 따르면, 당시 예술가들은 자녀를 화가 조합에 도제로 등록할 의무가 없었는데 이것이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마리아가 1675년 아버지 페르메이르가 사망한 후 그림 제작을 중단한 이유는 1674년 마리아가 결혼을 하고 페르메이르의 집을 떠났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26. 회화의 기술(1662-68, The Art of Painting, or The Allegory of Painting, 120x100cm,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페르메이르의 그림들 크기가 일반적으로 50cm를 넘지 않는다. 그러나 <회화의 기술>은 다른 작품과는 달리 크기가 100cm가 넘는다. 아마 페르메이르 작품 중 가장 큰 규모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회화의 기술

그림 속에서 한 예술가가 스튜디오에서 파란색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을 그리고 있다. 여성의 뒤에는 여러 국가를 그린 큰 지도가 걸려있다. 여성이 오른쪽에는 서명이 있지만 날짜는 보이지 않는다. 작품 속 화가와 그가 그리고 있는 모델로 삼은 여인의 모습이 강조되고 있다.


또한 대리석 타일 바닥의 표현 또한 눈에 띈다. 타일바닥의 화려한 표현, 화려한 황금 샹델리에의 표현은 페르메이르의 원근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여준다. 특히 왼쪽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매우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페르메이르의 빛이 사물과 만나 자연스러운 반사와 흡수표현을 구현해 팩 표지의 미끄러움이나 푸른 천의 광택 등 사물의 질감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 작품은 페르메이르의 재정상태가 어려워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던 상황이었는데도 누구에게도 이 작품을 팔지 않았던 그림이다. 페르메이르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 작품으로 볼 때 모델인 여성은 그의 딸 마리아일 가능성이 높고 그림 속 그림을 그리는 작가 역시 페르메이르 자신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많다.



27. 천문학자(1668, The Astronomer, 50x45cm, Louvre: Paris)


페르메이르 작품은 대부분 여성이 주인공이다. 남성이 주인공인 작품은 딱 두 점만 알려져 있다.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천문학자>와 프랑크푸르트 슈테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지리학자>가 바로 그것이다. <천문학자>와 <지리학자>는 로테르담의 한 지방장관의 의뢰로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레벤후크는 페르메이르가 이 작품들을 그릴 때 요도쿠스 혼디우스가 반세기 전에 만든 지구본을 빌려와 소품으로 사용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지구본을 포함하여 그림에 보이는 과학적 특징들 까지도 페르메이르가 표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 그림을 그릴 때 그가 알던 의사이자 측량사였던 야콥 스프루스의 도움도 받았다고 한다. 이런 도움으로 지리학자와 천문학자로서의 특징과 분위기를 그림 속에 잘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페르메이르가 그린 <천문학자: 1668>와 <지리학자: 1669>의 작품 속 모델이 다름 아닌 페르메이르의 친구 안토니 반 레벤후크라는 사실이다. 두 그림을 자세히 보면 각각의 그림 속 모델의 모습이 거의 쌍둥이처럼 같은 사람임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천문학자(

<천문학자>에 등장한 남성은 의외로 까만 밤하늘 아래가 아닌, 햇살이 화사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방 안에서 하늘의 지도가 그려진 ‘천구의’를 들여다보고 있다. 책상 위의 책들 또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볼 수 있는 천문학과 관련된 책들이다. 그의 뒤쪽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은 피터 렐리의 ‘모세의 발견’이다.


‘천문학자’에 빛이 투영된 후면 배경의 좌측 옷장에는 리파의 ‘엠블럼’이라는 포스터가, 우측 벽에는 모세의 ‘그림액자’가 있는데 이에 대해 페르메이르는 리파의 ‘엠블럼’과 ‘천구의’, 그리고 ‘천문학자’라는 인물을 긴밀하게 연결시켜 ‘지혜’를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리파의 ‘엠블럼’이란 사실상 유럽에서 점성술과 관련되어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출생차트(birth chart)가 은근히 표현된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즘도 구미 점성술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다트게임(dart game) 판 같은 출생차트를 사용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우측 벽의 ‘모세의 그림’은 강에 띄워 보내진 아기 모세가 이집트 공주에 의해 생명을 건지는 장면이다. ‘출생차트’와 ‘모세의 그림’을 연결하면 모세가 도움을 받아 살아났음을 의미한다. 산 자만이 출생차트가 있는 것이고, 살았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 또는 존재가 등장하는 것이다. 더구나 점성술에서는 사람의 운명을 별자리와 관련하여 해석하므로 당시 점성술과 천문학의 구분이 막연한 상황에서 천문학자, 모세, 출생차트를 배열했다는 것은 발견과 탄생과 존재의 의미를 암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발명으로 천문학과 지리학이 발전하면서 사회도 함께 변화하기 시작하던 시절, 그래서 천구의와 지구본을 한 쌍으로 제작·판매하는 것도 일반적이었다.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와 과학자는 <천문학자>와 <지리학자>라는 두 개의 그림으로 과학의 길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28. 지리학자(1668~69, The Geographer, 53x46.6cm. Städelsches Kunstinstitut: Frankfurt am Main)


페르메이르가 ‘천문학자’를 내놓은 지 1년 만에 이번에는 <지리학자>라는 작품을 그린다. 가만 보면 ‘지리학자’의 방도 ‘천문학자’의 방 그대로이며 그림의 주인공도 그대로이다. 그는 다름 아닌 페르메이르와 같은 해에 델프트(Delft)에서 태어난 안토니 반 레벤후크 (Anthony van Leeuwenhoek, 1632~1732)라는 미생물학자이다.

지리학자

페르메이르는 <천문학자>와 <지리학자>의 모델로 레벤후크를 그렸다. 심지어 그림의 구도조차 비슷하다. 그림의 뒤편 벽에는 당시 발행된 벽걸이용 지도가 결려있고 방바닥에는 종이 뭉치가 흐트러져 있다. ‘지리학자’는 오랫동안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듯한데 자기가 중요시하는 지구의를 가구 위에 소중하게 올려놓고 그의 왼손은 그가 보던 책 위를 짚고 오른손에는 컴퍼스를 들고 무언가를 측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천문학자가 왼손으로 짚고 있는 책상 위에는 아드리안 메티위스(Adriaan Metius, 1571~1635)가 구약에서 영감을 얻어 쓴 <천문지리법제(Institutiones Astronomicae Geographicae)>가 펼쳐져 있다. 히브리 민족을 이집트로 달과 별을 보며 인도한 족장 모세가 최초의 천문학자임을 암시한다. 왼손 위쪽 옷장에는 자신의 서명과 제작연도가 보인다. 원래 짝을 이루어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의 한쪽은 현재 프랑크푸르트 슈테델미술관(Staedel Museum)이 소장한 <지리학자>이다.



29. 연애편지(1667~70, The Loveletter, 44x38.5cm, Rijksmuseum: Amsterdam)

연애편지

그림 속 여주인공이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는데, 실제로 페르메이르 작품 대부분에서 모델이 누구인지 확인된 바가 없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페르메이르가 당대 다른 장르 화가들처럼 자신의 가족 구성원을 모델로 삼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여주인의 노란색 새틴 모닝 재킷은 페르메이르의 유품 목록에 등재된 것으로 추정되며, 아마도 페르메이르의 아내 카타리나 볼네스의 소유였을 것으로 보인다. 델프트에서는 만텔트게(manteltge)라고 부르는 이 재킷은 네덜란드 상류층 여성들이 집안일을 하는 동안 혹독한 네덜란드의 겨울 추위를 견딜 수 있도록 해 준다. 네덜란드에서 17세기 중반 당시 만텔트게는 매우 인기 있는 의류였을 것이다.



30. 레이스 뜨는 여인(1669-71, The lacemaker, 24.5x21㎝, Louvre: Paris)

레이스 뜨는 여인

이 그림 속 여주인공의 실체 역시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비평가들은 그중 일부가 그의 직계 가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 그림의 제작연대와 페르메이르의 큰딸 마리아와 엘리자베스의 나이를 고려할 때, 그들 중 한 명이 이 그림의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바느질이나 레이스 만들기는 덕망 있는 젊은 네덜란드 여성의 교양 교육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어쨌든, 이 인물의 얼굴 생김새는 같은 시기의 작품인 <하녀와 함께 편지를 쓰는 여인>에서 편지에 몸을 숙이고 있는 젊은 여성의 얼굴 생김새와 유사한 느낌이기도 하다.


의상 전문가들이 한정된 기간 동안 유행했다고 말하는 레이스 장인의 헤어스타일과 늘어진 머리카락은 일반적으로 양식적 이유로 이 그림의 제작 연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특히 늘어진 머리카락은 같은 해에 그려진 <버지널 앞에 앉은 젊은 여인>의 머리카락과 비슷하다.



31. 하녀와 함께 편지 쓰는 여인(1670-71, Lady writing a letter with her maid, 71.1x58.4cm, National Gallery of Ireland: Dublin)


편지를 쓰고 있는 그녀는 레이스 장식이 살짝 드러나는 아름다운 풀 먹은 흰색 모자, 푹신한 흰색 소매가 달린 깔끔한 녹색 보디스, 그리고 페르메이르에게는 흔치 않은 액세서리인 은은한 보석 브로치를 착용하고 있다. 여주인이 비록 화면의 가장 오른쪽에 위치하지만, 그녀의 펜을 잡은 오른손과 편지지를 누르고 있는 그녀의 왼손의 묵직함은 그녀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하녀와 함께 편지 쓰는 여인

페르메이르는 여러 차례 자신의 그림에서 인물들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관습적인 위계질서에 도전하는 개념을 다루었다. 이 작품에서도 하녀는 하층 사회 계층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그림의 정중앙에 위치하며, 여주인보다 더 높은 위치에 서 있다.


네덜란드 풍속화에서는 하녀를 때로는 더 온건한 역할, 즉 집안일을 부지런히 하거나, 아이들을 돌보거나, 가장의 감독을 받는 모습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페르메이르는 하녀를 중립적인 인물로 묘사하면서도 작품 속에서 그녀의 사색적인 시선은 여주인이 글쓰기에 몰두하는 모습을 더욱 강조한다.


페르메이르의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어쩌면 ‘그림 속 그림’ 기법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천문학자>에서도 동일한 ‘모세’가 등장하지만 크기는 훨씬 작다. 이는 현대 관람객들에게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감상할 때 17세기의 삶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상상력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치밀하게 구성된 작품임을 상기시켜 준다.


벽에 걸린 그림은 “모세의 발견”(1634)이다. 성경 속 장면들은 종종 우화적으로 해석되어 신의 뜻이 깃든 복잡한 계략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장면(출애굽기 2:1-10)은 이집트 파라오의 딸과 그녀의 시녀들이 늪지대에서 바구니에 담긴 히브리 아기를 발견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파라오의 딸은 아기를 구해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 이 이야기는 신의 개입과 대립하는 세력을 화해시키는 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로 자주 여겨졌다.


페르메이르는 어쩌면 신의 섭리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 인지도 모를 일이다. 모세의 교훈을 통해 페르메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32. 버지널에 앉아 있는 여인(1670-75, Lady seated at a virginal, 51.5x45.5cm, National Gallery: London)

버지날에 앉아 있는 여인

페르메이르 그림 속 인물 중 신원이 확인된 적은 없지만, 몇몇은 다시 등장하는 듯하며, 미술 평론가들은 이들이 작가의 가족 구성원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경우가 많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 속 앉아 있는 악사는 몇 년 전 헤리트 다우(Geritt Dou)가 그린 작품 속 젊은 악사와 약간 닮았는데, 이는 페르메이르에게 이 작품의 직접적인 영감을 제공했을 것으로 보인다.


페르메이르의 소녀는 보는 이를 향해 상냥하게 미소 짓고 있지만, 그녀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녀의 얼굴은 대담한 단순함과 뛰어난 섬세함으로 표현되었지만, 입술과 눈의 형태는 너무나 평범하다.

젊은 음악가의 우아한 복장에 드러나는 부풀어 오른 린넨 소매는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 중 하나로 손꼽힌다. 자연스러운 흰색 천의 주름과 접힘은 정확한 묘사는 부족하지만, 일부 작가들은 그 촉감이 명시적으로 묘사된 것이라기 보다는 암시적인 것이라고 묘사했다.


드레스의 푸른 오버스커트가 세련되지 못한 것을 지적하며 일부 작가들은 페르메이르의 예술적 역량이 쇠퇴한 게 아닌가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그림에 기울어진 비올라와 버지널의 표면 등 정교한 회화 기법이 세련되게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완성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있다.



33. 기타 치는 소녀(1670-73, The Guitar Player, 53x46.3㎝, Kenwood House, London: England)


17세기에 기타는 독주 반주에 널리 쓰이면서 유행 악기로 부상했다. 기타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류트보다 더 강렬했는데, 이는 류트가 낼 수 없는 방식으로 화음을 울려 퍼뜨렸기 때문이다. 이 무렵, 류트는 기타의 등장으로 과거의 인기를 받던 시대와 점점 멀어지는 듯했다.


기타 테두리의 흑백 장식적인 상감 세공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묘사되었다. 시각적으로 강조된 이 효과는 그림의 생동감을 증폭시키고 음악적 주제에 맞는 리듬감을 불어넣는다. 정교하게 손으로 조각한 사운드 홀은 과감한 임파스토 기법으로 묘사되어, 윤기 있고 울퉁불퉁한 표면을 빛이 스치 듯한 모습을 생생하게 포착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일부 현은 초점이 약간 흐릿하게 보이는데, 이는 17세기 미술에서는 보기 드문 기법인 진동을 암시한다.

기타 치는 소녀

한편, 페르메이르의 <여주인과 하녀>를 포함한 다섯 점의 그림에도 이와 비슷하게 우아한 모피 장식이 있는 노란색 모닝 재킷이 등장한다. 이 옷은 페르메이르의 아내 카타리나 볼네스의 유품에도 포함되어 있다. 재킷의 주름이 그림마다 매우 다르게 묘사되어 마치 다른 원단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 점의 그림("글을 쓰는 여인", "진주 목걸이를 한 여인", "여주인과 하녀")에서 모피 장식의 얼룩 모양과 분포를 비교해 보면 같은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미술사학자 그레고르 베버는 기타리스트의 머리 뒤에 걸려 있는 그림 속의 그림을 피터 얀츠 반 아쉬의 <신사와 개들이 있는 숲 속 풍경>이라고 확인했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에서는 반 아쉬의 작품이 오른쪽과 아래쪽이 약간 잘려 있어 ‘신사와 개 무리’는 기타리스트 머리에 가려져 있다.


페르메이르의 모티브에서 종종 간과되지만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는 회칠한 벽이다. 이 절제된 벽은 작가가 절제된 드라마를 위한 배경이 되어 다양한 회화적 목적을 달성한다. 이 벽은 그림의 공간적 깊이를 정의할 뿐만 아니라 조명 구성과 분위기를 놀라울 정도로 정밀하게 구축한다. 더 나아가, "음의 공간"으로서 구성적 균형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네덜란드 실내 화가의 작품에서는 벽이 이처럼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그 평범한 표면이 세심하게 탐구된 경우는 거의 없다.



34. 버지널 앞에 서있는 여인(1670-74, Lady Standing at a Virginal, 51.7x45.2cm, National Gallery: London)


이 그림의 모델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기록 역시 없다. 페르메이르는 이 젊은 여성의 생김새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는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그녀의 특이한 표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녀가 자리 잡은 공간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하는 힘이 있다.


특이하게도 인물 얼굴의 그림자가 녹색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칙칙한 안료인 녹토(green earth)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페르메이르는 다른 후기 그림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같은 색조를 사용했다. 당시 화가들은 더 어두운 살색의 그림자를 위해 대부분 갈색 색조를 사용했다.

버지날 앞에 서있는 여인

서 있는 음악가는 실크가 아닌 새틴 소재의 정장인 타바르드(tabbaard)를 입고 있다. 타바르드는 뻣뻣한 새틴 가운과 그에 어울리는 보디스(tabbaardslijft)를 합친 형태이다. 이러한 앙상블은 당시 상류층 패션의 특징이었다.


한편, 벽에 걸린 액자들이 눈에 띄는데, 맨 왼쪽 액자는 정교하게 조각된 프랑스식이다. 이 액자는 다른 어떤 것과도 겹치지 않은 유일한 오브제이며, 주변 환경과 거의 무관하게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닌다. 페르메이르는 큐피드의 흑단 액자가 지닌 음울한 검은색 기하학적 무늬와 대비를 이루기 위해 이처럼 반짝이는 액자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미술사학자 그레고르 베버는 이 전통적인 풍경화를 페르메이르 아버지의 친구이자 페르메이르가 알고 지냈을 델프트 출신 화가 피터 그뢰네베겐의 <여행자들이 있는 산 풍경>을 참조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페르메이르는 금박 액자를 설정하고 그에 맞게 그뢰네베겐의 작품 중 오른쪽 절반만 사용했다. 또한 원본 그림에 있는 하늘을 배경으로 실루엣을 이루는 성은 제거되었다. 아마도 페르메이르의 그림 속 액자 ‘큐피드’는 예술적 창작물이 아니라 1676년 그의 미망인의 소유물 목록에 "큐피드"로 언급된 실제 그림이었을 것이다. 이 그림은 페르메이르의 실내 풍경에 반복적으로 보이고 있다.


또한 밝은 파란색 벨벳으로 장식한 의자는 페르메이르의 실내 풍속화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프란스 반 미에리스의 작품 등 네덜란드의 실내 풍속화가들의 작품에서도 이와 비슷한 의자가 자주 등장한다.



35. 가톨릭 신앙의 우화(1672-74, Allegory of the Faith, 114.3x88.9㎝,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USA)


네덜란드가 합스부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빌렘 오렌지공은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을 하고 독립을 선언한다. 이런 상황에서 페르메이르가 이 작품을 그리고 있을 당시에 이미 가톨릭은 공개적인 교회의 중심역할을 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1672년부터 1678년까지 네덜란드는 신성로마제국,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전쟁을 하게 된다. 이후 이 전쟁은 6년간 지속되다가 1679년 12월에 프랑스와 네덜란드 사이에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끝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네덜란드 역사에서 최악의 해로 꼽히는 1672년의 네덜란드 미술시장은 붕괴될 수밖에 없었을 테고, 시민들 역시 비참한 생활을 감수해야만 했을 것이다. 페르메이르 역시 더 이상 그림을 팔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궁여지책을 강구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때 장모 마리아 틴스는 페르메이르에게 한 가지 묘책을 제시한다.

가톨릭 신앙의 우화

페르메이르가 1672~1674년 사이에 <가톨릭 신앙의 우화>를 그릴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다. 아마도 옆집에 사는 가톨릭 수사들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거나, 그림 속 여인은 오른발로 세계를 상징하는 지구의를 밟고 있다. 그뿐 아니라 바닥에는 악의 상징인 뱀이 피를 흘리고 죽어 있다. 그 조금 뒤쪽에는 아담과 이브 이야기의 원죄를 연상시키는 사과도 놓여 있다. 더구나 그녀의 앞에는 십자가와 성배가 놓여 있고 그녀 뒤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성화가 걸려 있다.


이 예수 성화는 플랑드르 예술가 야콥 요르단스(Jacob Jordans)의 작품인데 쾰른 발라프 리하르츠 미술관(Cologne Wallraf-Richartz-Museum)의 소장품 <십자가 처형, Crucifosis>이라는 대형 그림이다. 이 작품의 가품이 페르메이르의 개인 미술 컬렉션 목록에 들어있다.


그림에는 대부분의 페르메이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소품으로 테피스트리가 등장한다. 테피스트리는 흔히 특정의 그림이나 내용을 수를 놓은 것이 많기 때문에 이를 벽에 장식으로 걸어놓거나 탁자 위에 펼쳐놓아 사용한다. 카펫처럼 바닥에 깔아놓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림 왼쪽에는 델프트 스피어링크스 공방이 제작한 웅장하고 값비싼 테피스트리가 커튼처럼 걸려 있다. 이 테피스트리는 40명의 직원들이 직접 작업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십자가, 성배, 그리고 미사 경본은 이 그림이 로마 가톨릭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그림 속 여인의 뒷배경에 있는 요르단스의 십자가 그림은 크기가 매우 커서 개인 주택보다는 가톨릭 교회나 기도소에 더 어울린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어쩌면 이 그림은 장모 마리아 틴스가 사는 주택 건너편에 있는 가톨릭 수사들의 기도소가 있는 3개의 방 중 한 곳에서 그린 것일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 그림은 처음 제작된 후 4세기 동안 여러 주인을 거치게 된다. 그런데 1899년 네덜란드 마우리츠후위스 박물관의 관장이었던 아브라함 브레디우스가 개인적으로 이 그림을 구입했지만, 1928년에 미국 기업가 프리트잠에게 팔았고, 프리트잠은 1931년에 이 그림을 뉴욕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기증한다.



36. 플루트를 들고 있는 소녀(1665-70, Girl with a flute, 20x17.8cm, USA National Gallery: Washington, DC)


이 중성적인 소녀의 정체 역시 밝혀지지 않았다. 그녀의 이목구비는 수많은 전문가들이 종종 펜던트로 간주하는 작품인 <빨간 모자를 쓴 소녀>와 유사하다. 이 작품에서 소녀의 얼굴 묘사는 같은 그림의 소녀보다 눈에 띄게 덜 정교해 보인다. 이런 차이는 그림의 중요 부분들이 미완성이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 덧칠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현재 묘사는 초기 단색 언더 페인팅 이후 흔히 사용되는 과정인 소위 "워킹업" 단계를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밝고 어두운 부분의 넓고 단순화된 변화는 해부학적 특징과 빛의 유희를 모두 보여준다. 그러나 소녀의 본래 표정을 크게 훼손하는 부분은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간과하고 있다. <빨간 모자를 쓴 소녀>의 신비로운 깊이를 표현하는 데 핵심적인 페르메이르의 뛰어난 하이라이트는 이 작품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문제는 눈이 이례적으로 흐릿함과 입술이 수분 부족으로 보이는 등의 문제와 관련이 있겠다.


플루트를 들고 있는 소녀

모든 측면을 고려할 때, 페르메이르의 현존하는 작품 중 가장 안 좋은 상태에 속하는 그림이지만 이 그림에 대해 결론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이 소녀가 페르메이르의 딸 중 한 명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객관적인 근거 역시 부족하다.


그림 속 독특한 복장은 당시 유행하던 패션과 유사하며, 페르메이르가 일상 풍경 묘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새틴과 모피로 장식한 의상을 선호했던 것을 반영하는 듯하다. 부분적으로 덧칠이 되었지만, 재킷은 <콘서트>에서 가수가 입었던 것과 유사하다.


배경 태피스트리는 이 작품을 빨간 모자 소녀와 연결하는 또 다른 연결 고리를 형성한다. 배경의 태피스트리는〈회화의 기술>이나 〈신앙의 우화>에 나오는 태피스트리와 같은 것이라는 논리적 추정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식별을 가능하게 하는 합리적 근거가 부족하다.


이와 관련해 미국 국립미술관인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17세기 페르메이르의 유화 4점 중 1점이 다른 화가의 작품인 것으로 확인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스미소니언 매거진은 내셔널갤러리가 지금껏 페르메이르의 작품으로 알려진 '플루트를 든 소녀'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붓질의 정교성 등과 함께 마무리 단계에서 저렴한 염료가 사용됐다는 점에 주목해 페르메이르 본인의 작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2022.10.15) 페르메이르는 마무리 작업 과정에 호화스러운 염료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화가다. 다만 이 작품은 위작이 아니라 페르메이르에게 그림을 배웠거나, 페르메이르의 공방에 고용돼 함께 작업을 한 제자의 솜씨로 보인다는 것이 내셔널갤러리 측의 설명이다.



37. 버지널 앞에 앉아있는 젊은 여인(1670-72, A young Woman seated at the Virginal, 25.2x20cm, Leiden Collection/ Philadelphia Museum of Art: United States)


이 소녀의 얼굴 묘사는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게 한다. 그녀의 우울한 미소와 다소 흐릿한 시선은 비슷한 시기에 그린 작품 <버지널에 앉은 여인>에 등장하는 유사한 소녀에게서 볼 수 있는 기교가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 여인의 헤어스타일, 특히 늘어진 머리 스타일은 <레이스 뜨는 여인>의 헤어스타일과 매우 흡사하다. 가는 붉은 리본은 원래부터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림 복원 과정에서 더욱 강화된 듯하다.


버지날 앞에 앉아있는 젊은 여인

그림의 진위 여부를 확인한 미술 전문가 위원회는 소녀의 얼굴 그림자에 녹색 안료가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녹색 안료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이 살색으로 드물게 사용했던 다소 평범한 안료이다. 놀랍게도 이 안료는 페르메이르의 후기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어린 소녀의 숄은 페르메이르 팔레트의 특징적인 안료(기본 노란색은 납주석 노란색)로 만들어졌지만, 그의 탁월한 기법과 명암법 조형의 솜씨를 반영하기에는 일반적으로 부족하다는 평을 받는다. 숄의 원단(어떤 사람은 양모로, 어떤 사람은 새틴으로 인식)이나 복잡한 주름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버지널과 악보는 페르메이르의 두 작품, <버지널 앞에 서 있는 여인>과 <런던의 버지널 앞에 앉은 여인>에 나오는 악보대와 유사하지만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페르메이르의 진품 작품은 구성과 서사 모두에서 훨씬 더 정교하다.


현재 작품의 진위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특별 위원회가 실시한 기술 분석에 따르면, 배경 벽을 칠하는 데 사용된 밝은 회색 혼합물에서 군청색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페르메이르는 이 안료를 광범위하게 사용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파란색 물체뿐만 아니라 배경 벽의 밝은 회색 톤을 밝게 하는 데도 사용했다.



○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관련 역사 연표


1632년 10월 31일: 출생

- 안트베르펜 출신의 아버지가 1615년 디그나 발텐스와 결혼 후 델프트로 이주한다.

- 성 루카 길드에 가입하고 마술중개상을 하면서 여관('메헬렌')을 운영한다.


1653년 21세

- 실내와 안뜰 풍경을 그리는 거장 피터르 더 호흐, 그는 페르메이르 작품과 자주 연관되는 화가인데 하를럼에서 델프트로 이주한다.

- 4월 20일, 페르메이르 결혼식


- 12월 29일, ‘성 루카 길드’ 회원으로 등록한다. 다른 예술가들처럼 6년간의 도제 과정을 거쳐야 했으나 사실 확인이 어렵자. 특히 6 길더의 입회비를 전액 납부할 수 없어 1.5 길더만 납부한다.


- 델프트의 랑엔다이크 거리에 있는 장모 마리아 틴스의 집에서 페르메이르 부부가 신혼살림을 시작한다. 이 집에는 지하실, 현관이 있는 아래층 홀, 큰 홀, 홀에 인접한 작은 방, 안방, 작은 뒤쪽 주방, 조리실, 세탁실, 복도, 그리고 두 개의 방이 있는 위층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페르메이르의 작업실로 사용되었다.


1654년 22세

- 유실된 작품인 '목성, 금성, 수성'은 페르메이르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페르메이르는 당시 부유한 귀족 궁정에서 유행하던 고전주의적 취향에 어필하기 위해 신화적 장면을 담은 그의 첫 작품 ' 디아나와 그녀의 친구들'을 그렸을 것이다.


- 델프트 돈더슬라그'(Delftse Donderslag)는 10월 12일 델프트에서 일어난 대규모 화약고 폭발 사고를 일컫는데, 이 사건으로 시가지 상당 부분이 파괴되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최소 1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200채가 넘는 가옥이 파괴되고, 수백 채가 피해를 입었다. 도사의 상징인 구교회와 신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박살 나고 지붕도 손상되었다. 화가 카렐 파브리티위스 사망과 그의 작품 대부분 소실되었다.


1655년 23세

- 델프트 돈더슬라그 사건 1년 후, 네덜란드 정부는 페르메이르 어머니 디그나에게 피해보상금을 지불한다. 디그나는 남편의 죽음 이후 시내에 있는 ‘메헬렌’ 여관을 직접 운영하며 그곳에 거주했는데, 화약 폭발로 여관이 피해를 입었다.


- 페르메이르와 피터르 더 호흐, 니콜라스 마에스, 헤리트 테르 보르흐 같은 델프트 학파 화가들이 중상류층 ‘실내 풍경화’를 개척한다.


- 페르메이르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피터르 더 호흐는 하를렘에서 온 지 2년 후 델프트의 성 루카 길드에 합류한다. 그는 1660년까지 델프트에 남아 최고의 작품들을 그렸다.


1656년 24세

- 12월에 페르메이르의 장모 마리아 틴스는 그녀의 딸 카타리나와 페르메이르에게 상당한 금액인 300 길더를 선물한다. 페르메이르는 이 돈으로 1653년에 지불하지 못한 성 루카 길드의 가입비(4.5 길더)를 지불한다.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주가가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에서 폭락하면서 많은 투자자들이 파산한다. 그중에는 당시 50세인 화가 렘브란트도 있었는데, 그는 파산 선고를 받았고 그의 재산이 매물로 나온다.


1657년 25세

- 장모 마리아 틴스는 유언장 초안에서 페르메이르의 딸들에게 보석(반지와 금목걸이)을 물려주고, 페르메이르와 그의 아내 카타리나 볼네스에게는 상당한 액수인 300 길더를 물려준다고 적었다. 같은 유언장에서 마리아 틴스는 페르메르의 첫째 딸 마리아에게 200 길더를 유언으로 남긴다. 이 아이 이름을 마리아로 정한 것은 페르메이르와 장모 사이에 존재했던 선의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 이 시기에 페르메이르는 아마도 자신의 본래 가족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처럼 자녀에게 어머니나 아버지의 이름을 붙이지 않은 것에서 드러난다. 1658년 이전에 태어난 그의 첫 두 딸은 장모와 시누이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와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지었다.


- 11월 30일, 페르메이르와 그의 아내는 델프트의 부유한 시민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피터르 클라에스 판 루이벤으로부터 200 길더를 빌린다. 그는 앞으로 몇 년 동안 페르메이르의 작품 20여 점을 구매할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이 돈은 향후 작품 구매에 대한 일종의 선급금일 가능성이 있었다.


- 판 루이벤은 당시 페르메이르의 유일한 후원자로 여겨졌지만, 가끔 다른 사람에게 작품을 팔기도 했다. 판 루이벤은 페르메이르보다 일곱 살 위이며, 페르메이르와 단순 고객 관계를 넘어선 개인적 친분 관계를 맺고 있었다.


1658년 26세

- 피터르 더 호흐, 그의 최고 작품 중 하나인 <델프트 주택의 안뜰>을 그린다. 더 호흐의 안뜰은 페르메이르의 <골목풍경>에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피터르 더 호흐, <델프트 주택의 안뜰>

1659년 27세

- 1650년대 후반, 페르메이르는 당시의 풍속화에서 영감을 받아 유난히 밝은 실내 풍경 두 점을 그린다. <장교와 웃는 소녀>와 <우유 따르는 하녀>에서 페르메이르는 유명한 "점묘법" 기법(구도에서 가장 밝은 부분에 밝은 색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기법)을 사용한다. 페르메이르는 이 작품 이후 하층 노동자 계층의 인물을 두번 다시 그리지 않는다.


1660년 28세

- 페르메이르가 성 루카 길드의 수장으로 2년 임기로 임명된다.


1661년 29세

- 페르메이르는 <델프트 풍경>을 그리면서 카메라 옵스큐라의 시각 효과를 탐구한다. 그 효과는 <창가에서 편지 읽는 소녀>와 <장교와 웃는 소녀>, 그리고 <우유 따르는 하녀>에서도 분명해졌다. <델프트 풍경>은 서양 미술사 최초의 진정한 도시 풍경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662년 30세

- 1660년대 페르메이르의 수입은 전쟁이 심해지는 1670년대보다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1660년대에는 그림 판매 수익과 특히 장모의 상당한 재정적 기여를 합쳐 연간 850 길더에서 1,500 길더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공 한 명의 수입이 연간 500 길더 정도였는데, 당시 네덜란드 평균 주택 가격은 1,000 길더였다.


- 페르메이르 작품에 등장하는 악기 '버지널'은 예술가가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물건들은 부유한 문화인이나 안트베르펜의 부유한 은행가였던 디에고 두아르테와 같은 고객들로부터 빌려온 것일 수 있다.


- 페르메이르의 영향을 받은 가브리엘 메추의 작품, <편지를 읽는 여인: 1662–1665>과 <편지를 쓰는 남자: 1662–1665>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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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메추, <편지를 읽는 여인>과 <편지를 쓰는 남자>


1663년 31세

- 1663년경 페르메이르에게 요하네스라는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 아들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1664년 32세

- 페르메이르, <저울을 든 여인: 1662–1665>과 피터르 더 호흐, <금을 저울질하는 젊은 여인>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그림을 그린다.


1665년 33세

- 페르메아르의 후원자 피터르 판 라우이벤과 그의 아내 마리아 크누이트가 유언장에서 페르메르에게 상당한 액수인 500 길더를 남긴다. 이 사람은 생전에 페르메르의 작품 중 상당 부분, 아마도 절반 이상을 구매했을 것으로 보인다.


- 영국 해군은 6월 3일 로스토프트 앞바다에서 네덜란드 함대를 격파하며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한다.


1666년 34세

- 9월 2일, 푸딩 레인에서 런던 대화재 발생, 이로 인해 런던 시가지 약 5분의 4가 파괴된다. 이 화재로 역설적이게도 질병을 옮기던 쥐들이 대부분 사망하면서 치명적인 흑사병 확산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


1667년 35세

- 6월 21일, 브레다 조약으로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64~1667)이 종식되고 네덜란드는 수리남 섬을 대가로 맨해튼 섬에 있는 뉴암스테르담을 영국에 양도한다.


1668년 36세

- 2월 7일,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에 대항하는 동맹을 체결한다.


1669년 37세

- 페르메이르의 어머니 디그나 바르텐스는 28년간 소유한 ‘메헬렌’ 여관을 구두 수리공에게 3년간 임대해 준다. 그 후 디그나는 델프트의 블라밍스트라트에 있는 딸 게르트루이와 함께 살게 된다.


- 10월 4일, 렘브란트의 아들 티투스가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1670년 38세

- 페르메이르의 어머니가 2월 13일 델프트 신교회에 묻힌다. 페르메르의 여동생 게르트루이 레이니어 페르메이르도 5월 초 델프트 신교회에 묻힌다.


- 7월 13일, 페르메이르는 어머니가 운영하던 '메헬렌' 여관을 물려받고 구두 수선공인 반 아커다이크에게 임대한다.


- 페르메이르는 두 번째로 성 루카 길드의 수장으로 임명된다.


- 네덜란드 상선의 규모가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을 합친 것보다 커졌다.


1671년 39세

- 7월에 페르메이르가 공증인 아센델프트 앞에 출두하여 누이의 재산에서 148 길더의 상속 재산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1672년 40세

- 페르메이르는 ‘메헬렌’ 여관을 약사에게 6년간 임대해 준다.


-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침략한 후 페르메이르의 수입은 1660년대보다 상당히 낮았을 것으로 추정되었기에 많은 자녀를 키우고, 부족한 제작비와 제한된 고객층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이 더욱 심화된다.


- 류트보다 기타 선율이 이 시기에 인기를 끌었다.


- 4월 29일, 프랑스의 루이 14세 네덜란드를 침공한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경제와 미술 시장은 사실상 붕괴된다.


- 6월 15일, 네덜란드의 오렌지 빌렘 3세가 수문을 개방해 홀란드 지방을 홍수로 덮어 프랑스의 루이 14세로부터 암스테르담과 홀란드 지방을 구한다.


- 네덜란드와 영국 사이의 세 번째 전쟁이 발발해 네덜란드의 경제적 쇠퇴가 시작된다.


1673년 41세

- 페르메이르가 자신이 물려받은 가족 소유의 '메헬렌' 여관을 자신의 이름을 딴 약사에게 6년간 임대해 주고, 연봉 180 길더를 받는다.


- 7월 21일, 페르메이르는 총 800 길더 상당의 채권 두 개를 매각한다. 그중 하나는 500 길더 상당으로, 1657년에 페르메이르가 돈을 빌린 피터스 클라에스 반 라우이벤의 딸 막달레나 피터스(1655~1682)의 명의로 발행된 것이다.


1674년 42세

- 페르메이르의 후원자였던 피터 판 루이벤(Pieter van Ruijven)이 사망한다. 판 루이벤은 페르메이르의 작품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약 20점을 구입했다.


- 페르메이르의 큰딸 마리아는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은 델프트의 부유한 비단상인 요하네스 길리스존 크라머의 아들과 결혼한다. 결혼식은 페르메이르의 결혼식처럼 스키플루이에서 거행되었고, 아마도 가톨릭 성사가 거행되었을 것이다.


- 2월 9일, 영국이 네덜란드로부터 뉴욕을 탈환하는데 열흘 후인 2월 19일 네덜란드와 영국이 웨스트민스터 조약에 서명하고 뉴욕을 영국에게 넘긴다. 한편, 웨스트민스터 조약으로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2년간 전쟁이 종식된다.


1675년 43세

- 페르메이르가 암스테르담 상인에게서 1,000 길더를 빌린다. 이는 석공의 2년 치 수입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마리아 틴스는 페르메이르에게 그가 빚진 돈을 갚아준다.


- 페르메이르가 7월 20일 구교회에 안장된다. 그는 미망인과 열한 명의 자녀를 남겼는데, 그중 열 명은 아직 미성년자였다. 그의 아내는 그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자녀들의 무거운 짐 때문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그는 너무나 힘들어했습니다. 그는 마치 광기에 빠진 듯 갑자기 건강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 구교회의 장례 기록에는 1675년 12월 15일 "구교회에 있는 아우데 랑엔다이크의 화가 얀 폐르메이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내 카타리나 볼네스는 열 명의 자녀와 엄청난 빚을 지고 살아야 했다. 다행히 그녀는 어머니 마리아 틴스의 애정 어린 도움으로 겨우 살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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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 구교회에 묻힌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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