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에스 마에스(Nicolaes Maes)
마에스의 작품에서 인물은 공간에 종속되며, 공간은 서사되는 이야기의 주요 매개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마에스를 우리에게 친숙한 화가로 기억시키는 주요한 가치가 아닐까?
니콜라스 마에스(Nicolaes Maes: 1634-1693), 그는 네덜란드 황금기의 풍속화와 초상화 화가였다. 마에스는 도르드레흐트에서 부유한 상인 헤리트 마에스와 이다 헤르만 클라에스도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에스는 12살이 되는 1646년부터 18살이 되는 1652년까지 렘브란트 밑에서 6년간 도제생활을 한다.
이 당시 마에스는 <아브라함의 희생>과 같은 극적인 역사화를 전문으로 그렸다. 렘브란트의 제자 니콜라스 마에스, 그는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에서 가장 사랑받는 거장으로 성장한다. 마에스의 화풍은 처음부터 분명 그의 스승 렘브란트의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한편, 마에스는 카렐 파브리티우스와 같은 시기 렘브란트의 도제로 생활하면서 일상생활을 독창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그린다. 그의 화풍은 점차 델프트의 피터르 더 호흐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같은 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면서 델프트 학파의 화풍을 조성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 마에스는 그의 작품에서 특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트롱프뢰유' 기법에 대한 것도 렘브란트에게서 물려받은 듯하다. 특히 1650년대 그의 원근법에 대한 관심은 카렐 파브리티우스와 사무엘 반 호흐스트라텐과 같은 스승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작품제작을 하는 과정에서 익히게 되면서 그의 작품을 특징짓는 요소로 자리하게 된다.
(* 트롱프뢰유(trompe l'oeil)는 회화에서 대상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보는 사람이 그 대상의 물질적 실체에 대해 착각하게 만드는 기법이다. 마에스 작품에서 간혹 반쯤 열린 문을 통해 선반 위의 다양한 물건들이 보이거나 방문을 통해 보이는 실내 가구들의 트롱프뢰유(trompe l'oeil) 기법으로 사용되었다.)
마에스는 1650년대 초 독립 예술가로서 초기에는 몇 가지 성서적, 신화적 장면을 그렸다. 마에스의 역사화, 특히 성서 작품은 분명 그의 스승 렘브란트의 이미지를 따르고 있지만 동시에 그가 주체적으로 해석한 성서와 도상학적 선례를 보여준다.
그러나 도제생활을 마친 후 마에스는 1653년경 도르드레흐트로 돌아와 매우 독창적인 풍속화 화가로 자리를 잡는다. 그는 초상화도 그리기 시작했고, 곧 이 분야에 전념을 하게 된다.
그가 그린 풍속화들은 기본적으로 ‘가정’이라는 장르를 담고 있었다. ‘가족’, ‘하녀’, ‘바느질꾼’, ‘책을 읽으며 졸고 있는 노부인’ 등의 매력적인 이미지들은 거의 대부분 1653년부터 1657년 사이에 완성한 작품들이다. 뿐만 아니라 마에스 가족은 그의 가장 매력적인 장르화 중 하나인 ‘아이들과 함께 한 젊은 엄마’의 모델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에스는 점차 자신만의 장르화를 설정하고 동시에 독자적인 초상화를 그려나간다. 1650년대 후반부터 마에스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기 그가 그린 작품들 역시 소규모로 가정 미술 장르에 전념하며 렘브란트에게서 배운 색채의 마법을 자신만의 색채로 상당 부분 그림으로 표현해 낸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소재는 여성들이 실을 잣거나, 성경을 읽거나, 식사를 준비하는 가정 내 생활상을 다룬 주제였다. 또한 그는 레이스 뜨기에 특히 매료되어 이 주제를 다룬 거의 12가지 버전을 제작하기도 한다. 이처럼 그가 초기에 생활상을 다룬 풍속화에 몰두하면서 델프트 화가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1660년대에 들어 마에스는 초상화에 집중하기 시작하는데, 1660년대 중반 앤트베르펜을 방문한 후 그의 스타일은 더욱 극적으로 변한다. 그는 초기 화풍의 붉은 색조를 버리고 더 넓고 밝고 차가운 계열(갈색 색조 대신 어두운 부분에 회색과 검은색)을 사용했으며, 당시 그가 전문으로 다루던 유행하던 초상화들은 렘브란트보다는 반 다이크에 더 가까웠진듯 하다.
이전 풍속화 작품들에서 보여준 친밀함과 화려한 색채 조화를 버리고 반 다이크의 영향을 암시하는 우아함을 추구하랴는듯 마에스의 작품들은 어느새 변화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너무나 급작스럽고 변화의 폭이 컸기에 브뤼셀 출신의 또 다른 마에스가 존재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한다.
그는 1673년까지 도르드레흐트에 거주하다가 본격적으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정착한다. 아마도 암스테르담의 초상화, 특히 집단 초상화에 대한 주문이 쇄도하면서 이를 소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였다. 더구나 당시 네덜란드 황금기의 미술시장이 호황을 누렸기에 재정적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화가들에게는 대단히 매력적인 상황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암스테르담에서 그가 그린 초상화들은 렘브란트를 능가할 만큼 대단한 호평을 받으며 마에스의 초상화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마에스가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는 거의 일주일에 두세 점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마에스는 결국 과로로 쓰러지고 169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나이 59세로 암스테르담에서 숨을 거둔다.
당시 마에스의 인물 묘사는 반 다이크와 렘브란트를 섞은듯한 솜씨라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그의 작품들에 대한 인기는 버킹엄궁을 비롯해 베를린, 브뤼셀, 상트페테르부르크, 헤이그, 프랑크푸르트, 하노버, 오타와, 뮌헨 미술관 등 유럽 유명 박물관에 그의 작품이 걸려있다는 점을 볼 때 알 수 있다.
마에스 작품의 매력 중 하나는 그가 대상을 대하는 유머와 품위의 조화, 그리고 시선이나 침묵을 나타내는 손가락과 같은 제스처를 통해 인물과 관객 사이에 형성되는 친밀한 공범 관계에 있다. 그러나 마에스를 실내 회화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의 공간 표현 방식인데, 이는 페르메이르와 더 호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마에스의 작품에서 인물은 공간에 종속되며, 공간은 서사되는 이야기의 주요 매개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마에스를 우리에게 친숙한 화가로 기억시키는 주요한 가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