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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원 Jul 07. 2023

#1 제대로 된 명상은 생각보다 힘들고 괴롭다


몇 해 전에 지인이 명상 지도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시간을 내어 그가 말한 장소로 갔는데, 막상 가보니 그 외에 세 사람이 더 있었다. 이렇게 명상을 배울 기회가 흔치 않으니, 지인들도 불러 왔다는 것이다. 아무튼 최초 의뢰를 했던 그는 요즘 업무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듯했다. 흔히 알기로 ‘명상’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방법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그 때문에 내게 연락을 한 듯했다. 


지인 외에는 다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명상에 대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줄은 나도 알지 못 했다. 다만 보편적인 방법으로 시작했다. 다같이 차를 한 잔 마시며 몸의 긴장을 어느 정도 풀어준 뒤, 호흡을 통해 입정에 들었다. 제대로 된 명상을 하고자 했다. 허리를 곧추세워 반가부좌로 앉고, 손도 안으로 모았다. 빛에 감각이 산만해질 수 있으니 조명은 최소화했고, 음악은 틀어놓지 않았다. 명상을 하는 데에 음악은 필요하지 않다. 공간은 적막하고 고요했다. 하지만, 조용해진 것은 물리적인 ‘외부 공간’이었을 뿐이다. 


명상은 오로지 ‘나 자신이’ 하는 것이다. 지도자는 어느 길로 가야 할지 그 ‘방법’만 알려줄 뿐, 그  길을 걷는 건 전적으로 내 몫이다. 그런데 그렇게 명상을 시작한지 채 십 분되 되지 않았는데, 한 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아무 말도 없이 그는 천천히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눈을 엷게 뜨고 있었으므로 그가 나가는 과정을 알아채고 있었다. 다만 나가는 그를 붙잡지는 않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명상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나가면 나가는대로, 그저 알아차리기만 하는 것이다. 명상은 그가 나간 이후로도 한 시간 정도 더 진행되었다. 꽤 쉽지 않았는지 사람들은 앓는 소리를 냈는데, 보편적인 반응이다. 한편, 다 끝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조용히 나도 그가 나간 문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어두운 복도 한쪽 구석에서 그는 핸드폰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액정에서 나온 빛으로 그의 얼굴만이 빛나고 있었다. 내가 나온 것을 보고 그는 핸드폰을 접은 채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명상을 하는 게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힘들어서 저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났어요. 미안해요.”


먼저 나서서 사과하는 그의 모습은 내가 혹시라도 그의 행동을 무례하다거나 이상하다고 여길 거라 염려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단단한 오해다. 명상을 처음 접한 그의 행동과 반응은 전혀 무례할 것도 없고 특이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다. 명상을 하는 것이 편안하지 않고 되레 고통스럽고 힘들다는 것.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인, 명상에 있어서라면 당연하디 당연한 반응이다. 




세상이 발전됨에 따라 요즘은 세상에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명상이 나와있다. 워낙 많고 다양해서 어떻게든 딱 잘라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다만 그 많은 명상들은 크게 둘로 구분하자면, 명상을 처음 시작할 때의 드는 느낌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분류는 소위 ‘편안한 명상’이다. 명상을 시작하자마자 마음이 편안해지는 명상. 요즘 우리가 도심에서 즐길 수 있는 명상은 대개 이런 종류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명상’의 이미지도 거의 그렇다. 그 때문에 우리는 명상이 곧 ‘편안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다. 이런 명상을 할 때에는 도구를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초록이 우거진 초원의 가운데 앉아 명상을 하는 것이다. 또 대표적인 것은 음악을 틀어놓는 것인데, 유튜브 등에 ‘명상 음악’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걸 틀어 놓으면 그걸 듣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이게 명상의 전부는 아니고, ‘전형’도 아니다. 


반면 두 번째 명상은 오히려 그와 정 반대다. 두 번째 경우의 명상은 명상을 시작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마음이 더 복잡해진다. 그 복잡함은 때로 사람을 더 힘들고 심란하게도 만든다. 누가 날 괴롭힌 것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그렇게 된다(왜 그렇게 되는 건지는 다음 글에서 이야기해보자). 그날 명상을 시작한지 십 분도 되지 않아 뛰쳐 나갔던 사람이 대표적인 경우다. 다만 이런 명상의 특징이 있다면 굳이 어떤 음악을 틀어놓는다거나 아름다운 광경을 찾아다니지 않는다. 어디서건 고요해질 수만 있다면, 명상을 바로 시작할 수 있다. 


결국 ‘명상’이라는 이름은 같지만 그 형태와 결과는 전혀 다른 셈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들으면 짐짓 의아해질 수가 있다. 결국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기에 명상을 하는 이유는 마음이 편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하지만 되레 마음이 복잡해진다면 그건 ‘명상’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게 아닌가? 또 왜 굳이 그걸 해야 하나? 나는 행복을 원하는데 왜 오히려 괴로워져야 하는 건가? 물론 충분히 낼 수 있는 의문이긴 하다. 하지만 그 차이는 어떤 방식의 명상이든 결과로 얻게 되는 ‘마음의 평화’가 장기적이냐 단기적이냐에 따라 갈린다. 


음악 등의 도구를 활용해 당장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명상은 그 명상을 ‘하고 있을 때는’ 물론 좋다. 하지만 명상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복잡한 마음을 마주해야 한다는 게 문제다. 만약 우리가 일상 속에서도 ‘늘’ 명상이란 걸 할 수 있다면 좋았을 거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매 순간 귀에 이어폰을 꽂고 명상 음악만 들으면 살아갈 수는 없다. 


반면 소위 ‘힘든 명상’의 초점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닌 장기적인 ‘삶’ 전반에 맞춰진다. 지금은 힘들고 복잡할지라도 그 힘듦을 피하지 않은 채 마주하고 겪어내며, 괴로운 생각과 감정을 어떻게 다루고 대해야 하는지를 배워간다. 그처럼 적절한 대처법을 알게 되면 명상을 삶 전반에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괴로움의 실체를 마주하는 명상은 괴로운 생각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방법을 알게 해주어, 명상을 하지 않을 때에도 평화로운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어쩌면 비단 명상만이 아니라도 산다는 것이 으레 그렇다. 당장 달콤한 것들은 지금 이 순간을 나를 행복하게 해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내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힘든 삶을 살아내는 것은 지금은 참 괴로울지라도, 그 경험은 삶 전체에 절대적인 도움이 된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사람은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온 사람보다 인생의 여러 어려움을 헤쳐나갈 힘이 생기는 것이다. 


어떤 명상을 할지는 당연히 개인의 선택이고 자유이다. 다만 지금 명상을 하는데 통 마음이 평화롭지 않고 힘들다면, 오히려 내가 아주 잘 하고 있다는 신호다. 명상이 힘들다면, 삶이 점점 단단해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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