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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원 Oct 22. 2023

미워할 자유는 사실 없다



얼마 전에 한 친구가 작은 고민 거리를 들고 내게 찾아왔다. 그의 고민은 아니고, 자기 지인의 고민이라 했다. 원래는 자기가 들어주면서 해결해주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자기 선에서는 해결책이 안 보인다면 내게 들고 온 것이었다. 듣고 보니 분명 가벼운 고민은 아니었다. 다만 내용 자체는 간단했다. 


지인이라는 사람은 범죄심리학을 전공 중인 대학원생이라 했다. 범죄심리학. 흔히 말하기로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르는 데에 어떤 심리가 있는지를 살피고 이해하는 학문이다. 왜 범죄를 저지르는 줄 알아야 추후 비슷한 범죄를 막을 수 있으니, 요즘처럼 다양한 범죄가 나오는 사회에 꼭 필요한 학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오히려 그 부분이 이 학생의 고민이라고 했다. 결국 그 공부의 본질은 범죄자의 개인적인 사정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범죄자를 점점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그게 그에게는 딜레마라고 했다. 사회적으로 본다면, 범죄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일종의 금기다. 범죄자를 이해하려 들게 되면 그 범죄 행위 역시 옹호할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죄자는 이해가 아니라, 미워해야 한다는 게 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다. 그런데 범죄심리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미워지는 게 아니라 이해가 되니, 그게 그에겐 어려운 문제였다. 범죄자가 이해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뭔가 자신이 반인륜적이고 반사회적인 인간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한편,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문득 수년 전의 이슈가 떠올랐다. 일본 관련 문제, 당시 ‘노노재팬’이라고 하는 보이콧이 우리 사회 전반에 있었다. 일본제 물건은 사지도 말고 일본은 가지도 말자는 운동이었다. 보이콧은 최초 일본 정치인과 기업인의 역사 관련 망언에서 촉발됐다. 우리에겐 아직 제대로 아물지 않은 아픈 상처가 있다 보니, 반감은 단순한 ‘일본 제품’이 아니라 일본과 일본인 전체로 번졌다. 한 마디로 해서 그땐 우리는 일본이 참 미웠다. 하지만 이 ‘미움’이란 감정이 나 개인에게는 쉽지만은 않았다.


개인적인 얘기를 하자면 나는 그 전부터 일본을 미워했다. 요즘에야 일본에서 온 연예인들도 많아져 친근해졌지만, 한 15년 정도 전만해도 그렇지는 않았다. 과거의 아픔이 아직 매듭 지어지지 못 했으니 일본에 대한 반감은 꽤나 보편적인 편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일본에 대한 나 개인의 미움은 단순히 일본 때문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비단 일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도 나는 원체 성격이 무엇에 대해서든 호불호가 심한 편이었다. 좋아하는 것은 아주 좋아하고, 싫으면 아예 쳐다보기도 싫을 정도로 아주 싫어하는 스타일. 지금에서야 깊이 반성하지만 사람에 대해서도 그랬다. 한 번 싫어하거나 미워하게 된 사람이 있으면 오랫동안 미워하곤 했다. 


그렇다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작정 누군가를 미워한 것은 아니었다. 내 나름에는 항상 분명한 이유가 있긴 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찌 느낄지 모르지만, 내 주관적인 기준에서 판단했을 때는 충분히 미워할 만했던 타당한 이유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특히 지금처럼 사회 전반에 미움의 감정이 팽배해진 소위 ‘혐오의 시대’에는 오히려 그 이유가 더 생략된다. ‘남을 내 마음대로 미워할 자유’도 보장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대인 것이다. 늘 그렇게만 살아오다가 내 삶이 획 바뀐 건,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국화와 칼>은 2차 대전 이후 전범 국가인 일본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 의식으로부터 쓰여졌다. 일본에 대해 잘 몰랐던 미국은 일본에 대한 적절한 처리를 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일본을 이해해야 했다. 미 정부는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를 불러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인류학적 분석을 의뢰했다. <국화와 칼>은 그 결과로 만들어진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참 흥미롭게 읽었다. 처음 폈을 때부터 완독할 때까지 나흘 정도가 걸렸는데,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른 채 흠뻑 매료됐다. 책은 외부인의 입장에서 ‘일본 문화’에 대해 설명했다. 그 합리적인 설명 속에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진 그들이 저지른 만행이 그저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나쁜 것이 맞긴 하다. 다만 지금까지는 내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알아보지 않고 ‘결과’만 보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제까진 맥락과 원인을 알아보긴커녕, 그런 게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그런데 책을 읽는 과정에서, 그런 행동이 나오게 된 ‘맥락’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세상 모든 것엔 원인이 있으니 일본의 과거 만행에도 원인은 있었고, 나는 점점 그게 이해되어갔다. 


이해가 되었다는 것은, 곧 책을 읽고 내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분명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 대한 내 마음은 오직 ‘미움’ 뿐이었다. 그런데 고작 책 한 권 읽은 것만으로 미움의 감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가슴 속엔 그저 청량한 후련함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나도 이런 내 마음의 변화가 낯설고 이상했다. 과연 저 사람들을 이렇게 이해해도 되는 걸까. 가해자에게 맥락과 서사를 부여해도 되는 걸까. 이게 옳은 걸까. 하지만 그 시비의 여부가 어떻건 미움의 감정이 사라진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일본에 대한 마음이 달라진 건 내겐 큰 일이었다. 그 나비효과는 내 삶의 다른 영역까지 번졌다. 하지만 이 책이 내게 준 선물은 단순히 일본에 대한 ‘지식’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 희망이었다. 미워하던 것도 이해하고자 하면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게 되면 더 이상 ‘미움’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책 속에서 베네딕트는 이러한 희망과 태도를 한 문장으로 깔끔히 설명한다.


“인류학자는 경험상 아무리 기괴한 행동이라도 결국은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때부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나 현상이 있으면 그저 ‘왜 저래?’라고 몰이해로 몰고가거나 일단 미워하고 봤다. 하지만 이젠 오히려 이해 안 되는 것이 생기면 마음이 설레었다. 왜 이해가 안 되는 것인지가 더 궁금해져서, 그 내막과 맥락을 파고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내 경험으로 보건데, 베네딕트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다만 한 가지를 바로 잡자면, 어떤 기괴한 행동도 이해할 수 있다는 건 ‘믿음’이 아니라 ‘진실’의 영역이었다. 그의 말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지금껏 살아온 내 삶까지 돌이켜 볼 수 있었다. 내가 미워해온 많은 사람들. 나는 그들을 어떤 이유에서 미워하고 있는가? 이유가 뭐가 되었건, 결국 누구에게나 그들의 말이나 행동을 내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어서’ 미워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던 것은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해하고자 하기만 한다면, 실로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없다. 단지 ‘내가’ 이해의 노력을 포기했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일 뿐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누군가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무작정 미워하는 건 상대방의 입장에선 참 억울한 처사였다. 만약 누군가를 두고 싫다거나 밉다고 하게 된다면 이건 상대방에 대한 일종의 ‘판단’이다. 그리고 어떤 판단이든 내릴 때에는 그 판단을 내리기까지의 마땅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즉, 상대방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만, 그 ‘앎’이 근거가 되어 온전한 판단을 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반대로 상대방에 대해 잘 알지도 못 하면서 밉네 어쩌네 하게 되면, 제대로 알지도 못 하면서 판단을 내린 꼴이 된다. 상대방의 입장에선 억울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 사람에 대해 뭘 얼마나 안다고 함부로 밉네 어쩌네 하겠는가. 미움 받는 상대방은 억울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섣불리 판단한 것이니 경솔한 것이다. 


때로는 ‘다 알아봤는데, 그래도 나는 미워’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 타당한 말은 아니다. 누군가에 대해 안다는 것은 이해를 한다는 것이고, 이해를 하게 되면 상대방의 맥락까지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맥락을 받아들이게 되면, 더 이상 미워하는 마음이 남아 있을 수가 없다. 이해를 한다는 건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해의 노력을 했는데도 여전히 미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건 단지 내가 미움이 사라질 때까지 이해하지 않고 중간에 포기했기 때문이다. 하고자 한다면 세상에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없고, 단지 이해하지 ‘않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론 모든 미움은 다 부당한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이 나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세상에는 정말 너무나도 미워서, 미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정말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가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감정으로라도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은 사람. 미워하지 않고 이해해본다는 건 어찌 보면 ‘상대방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건데, 그 자비마저 아깝게 느껴지는 사람. 


나에게도 그런 사람은 있었다. 미워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아무리 미워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괴로워지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내가 미워하건 말건 상대방은 신경도 쓰지 않았고, 내 마음 속의 ‘미움’이란 감정은 오히려 나 자신만 갉아먹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미운 사람일수록 더 이해해봐야 한다는 건 그 상대방을 위한 게 아니었다. 전적으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범죄 심리학을 전공한다던 친구의 지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 정도였다. 사실 범죄자가 이해되는 그의 마음에 잘못된 건 하나도 없다. 오히려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죄책감을 느낄 것도 없다.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본래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범죄자라고 해도 다를 것은 없다. 


다만 그가 겪은 딜레마는 우리가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순수한 ‘이해’와 사회적인 ‘처벌’을 너무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일지 모른다. 이해를 한다고 해서 처벌을 못 할 건 아니다. 이해를 한다는 것은 단지 상대방의 잘못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공연히 나 스스로의 마음만 갉아먹는 ‘미움’이란 감정만 소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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