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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원 Jan 14. 2024

명상이 일상이 되면 듣게 되는 말들

독립 수행 일기


보름 전, 남쪽 동네에 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기차였다. 오랜만의 모임이 있었으므로 거의 밤을 지새웠다. 세 시쯤 호텔에서 잠들었는데 새벽 일찍 깨야 했다. 기차 출발 시간이 일곱 시니, 여섯 시 정도에 호텔을 나서려면 최소 다섯 시 혹은 다섯 시 반엔느 일어나야 했다. 결국 두 시간 혹은 그 미만밖에 자지 못 했다. 다행히 기차에는 자리가 많았다. 일부러 옆자리가 비어있는 자리를 골랐다. 가는 내내 완전히 퍼져서 잠만 잘 생각이었다.


기차에 오르자마자 옷을 거꾸로 뒤집어 이불처럼 덮었다. 모자고 마스크고 다 벗고 손수건을 길게 접어 안대 대신 눈을 가렸다. 이어플러그로 귀를 막으니 졸음이 절로 쏟아졌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자버렸다. 나는 자느라 내 모습을 보지 못 했지만, 아마도 꼴이 형편 없었을 것이다. 제대로 씻지도 못 하고 면도도 못 한 채, 머리도 모자에 완전히 눌려 그렇게 이상한 모습으로 자고 있었으니. 아무튼 아직 집에 도착하려면 두 시간이 더 남았지만, 그 정도 자니 더 이상 잠은 오지 않았다. 남은 시간은 노트북을 꺼내 글 쓰는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었다. 


그렇게 기차는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차에서 내렸다. 목적지는 기차역이 시내가 아니라 교외에 있는 곳이었다. 시내에 가려면 버스를 한 번 타야했고, 기차에서 내린 승객들은 모두 하나같이 그 버스를 기다렸다. 나는 한 다섯 번째 정도 서 있었다. 내 앞에는 할머니 두 분이 있었고, 뒤에도 한 분 계셨다. 그들은 기차에서도 본 이들이었다. 내 바로 앞에 할머니는 이 열차의 시발역에서부터 타셨는데, 내가 앉은 자리 건너편에 앉으셔서 처음부터 알아챘다. 나머지 두 할머니는 각각 뒷자리, 대각선 뒷자리였다. 다만 시발역에서 탄 건 아니고 중간에 타셨다. 물론 그들과는 어떤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 같은 기차 같은 객차에 탔을 뿐, 모르는 사람이었다. 단지 어딜가나 나도 모르게 사람 구경하는 본능이 있어서 그게 기억에 아직 남아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시발역에서 탄 할머니가 몸을 돌려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더니 물었다.


"스님 할 거에요?"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분명 이 할머니를 처음 봤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이 할머니는 나에 대해 아는 건가? 




사실 그 할머니의 말에 짐짓 놀랐던 건 그럴 만도 해서였다. 지금으로부터 한 수 년 전, 진짜로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스님이 되는 것. 인생을 살다 보니 나는 요즘 말하는 '사회 생활'과 그리 잘 맞지 않았다. '사회 생활'이란 것은 필연적으로 각종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때만 해도 나는 그 모순들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또 나 혼자 행복하게 잘 사는 것엔 별 관심이 없고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게 더 좋았다. 무엇보다 성공이고 뭐고 하는 게 다 부질 없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차피 그렇게 살 거면 차라리 스님이 되어버리는 게 낫다. '절'과 '스님'이란 보통 그런 마음 또는 그러한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커뮤니티인 것이다. 


당시엔 그래서 '스님의 삶'에 대해 이리 저리 알아도 봤다. 하지만 더 알면 알수록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 느껴졌다. 하나 하나 열거하면 할 말이 많지만, 잘 갖춰져 있는 기성 시스템에 들어가는 건 결국 먹고 사는 것을 좀 더 편안하고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인데, 그게 어딘가 삶에 대한 편법처럼 느껴진 것이다. 나는 내 삶에 대한 모든 무게를 오직 나 스스로 감내하고 싶었다. 제도권 속에 들어가 편하게 사는 것보다는,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스스로 살아내는 것이 참된 '수행'이라고 생각된 것이다. 


그렇게 스님이 되면 되겠다던 생각은 금방 접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결국 승려가 되는 목적은 수행을 하기 위해서인데, 수행이란 전적으로 '마음'에 달린 일이므로 장소가 중요한 건 전혀 아닌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홀로 수행을 시작했다. 사실 '수행'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뭐 대단한 걸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런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어도, 무엇 하나 준비되지 않아도, 가진 것마저 하나 없어도 '마음' 하나만 있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게 곧 수행이다. 수행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마음' 하나를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시류에 휩쓸리고 자기 삶에 관성에 휩쓸려 끌려가는 대로 살아간다. 걱정이 올라오면 걱정에 끌려다니고, 기쁨이 올라오면 기쁨에 끌려다니며, 슬픔이 올라오면 슬픔의 노예가 된다. 그런데 더 이상 끌려가지 말고, 그런 것들이 올라오면 그 마음을 단지 '알아차리는' 게 수행인 것이다. 




다시 기차역 앞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와, 나는 할머니에게 되물었다.


"할머니 혹시 저를 아시나요?"

"아니 그건 아닌데. 왠지 그럴 것 같아서..."

그러자 앞뒤에 있던 다른 할머니들도 대화에 합류했다.

"그쵸? 왠지 나도 기차에서 슬쩍 보니까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


엊그제는 시내에서 붕어빵을 사 먹는데, 같이 줄 서있던 처음 보는 아주머니들과 우연히 담소를 나누게 됐다. 아직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이 아주머니들도 내게 묻는 것이다.

"근데 뭐 도 닦고 그러는 분이세요?" 




수행은 전적으로 마음에 달린 일이다. 하지만, 마음을 알아차리면 점점 삶이 달라지고, 삶이 점점 달라지면, 그게 겉으로 드러나기도 하나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건, 이런 말 따위에도 동요하지 않고, 끌려다니지도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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