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믿는 것에 대하여
'매직아이'라는 게 한창 유행했던 적이 있다.
희한하게 생긴 패턴으로 된 그림인데 그걸 뚫어져라 쳐다보면 무슨 원리인지 그 그림 밑으로 감춰져 있던 또 다른 그림이 보이는 신기한 것이었다.
학교 앞에서 주던 책받침의 뒷면마다 등장하곤 했는데, 친구들은 서로 그 그림을 나누어 보며, "오! 여긴 사자 나와!" "오!! 이건 돌고래들이 막 헤엄쳐!" 라며 코팅된 종이 쪼가리 하나가 선사하는 초현실적인 형상들을 재밌어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난 정말이지 돌고래의 꼬리는커녕 아무것도 본 적이 없었고, 눈만 괜히 사팔뜨기가 돼서 어지러워하기만 했다.
만약 조르바한테 이것들을 보여줬다면,
두목, 지금 날 호구로 보는 겁니까! 눈깔만 아프구먼. 어디서 지랄 맞은 돌고래 새끼들이 있긴 있다는 거요!!
라고 했을게다.
아마 나에겐 이것이 형이상학적인 개념과의 첫 번째 조우였던 듯하다.
사자, 돌고래 그림이 나에겐 실재實在의 형체를 초월한 영역이었으니까 말이다.
결코 한 번도 보이지 않는 매직아이였지만, 그러다가도 하도 답답해서 결국엔 "오! 나도 보여!"라고 뻥을 친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게 참 사람 심리의 흥미로운 점이다.
모두가 돌고래 그림이라고 말하는 군중심리에 휩싸여서는 '벌거숭이 임금님' 에서처럼 나 역시도 그 그림이 당연히 돌고래 그림일 거라 믿어버린 것이다. 만약에 그 그림이 사실은 사자 그림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개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 하나, 둘 씩 뭉치다 보면 결국엔 그것이 객관적인 것이 되어 하나의 진실로 변모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설사 진실을 정확하게 보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대중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면, 그의 시점은 거짓으로 실추될 뿐인 거다.
소설/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보여주듯, 장님들 속에서 유일하게 시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보게 되는 건 어차피 서로를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더러워지는 인간의 추태.
눈먼 자들에게 보이는 하얀 세상이 곧 세상의 진리가 돼버린 거다. 진정한 현실에 대한 자각은 철저히 무시된 채..
언젠가 동생이 말했듯,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 제일 괴로운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 자신은 어떠한가.
눈 뜬 장님으로 살고 있지는 아니한가.
먼 옛날의 -그리고 지금도 인터넷이란 것을 통해 계속되어지는- '마녀사냥'의 바탕이 바로 이 군중심리에서 비롯된 것이고, 결국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폴폴 잘만 나는 세상이 돼버린 것이다.
내가 올바르다고 생각해왔던 것도 어느 순간에 보니 그렇지 못한 것이 되어버린 세상.
나 자신을 불가지론 자라고 여긴 적은 없지만, 이럴 때면 정말 세상 모든 것에 의심을 가지고 보는 게 현명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자신이 진실이라 믿는걸 끝까지 지켜가는 사람들을 보면, 어디까지가 신념이고 어디서부터가 고집인지, 그 모호한 경계에 갸우뚱해진다.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은 어쩌면 모두 다 그럴싸하게 포장된 '매직아이'그림이다. 그 내부의 절대적 진실을 (절대적 진실이란 게 있긴 하겠냐만은) 올바른 입으로 제대로 말하는 것이 미덕으로 추앙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돌고래 그림이 어느새 사자 그림이라고 일컬어지고 또 그게 진리로 변모하는 그런 세상 말고.
epilogue
1.
2.
3.
정답:
1. 물 뿜는 고래 (라고들 하더라)
2. 토성 (이라고들 하더라)
3. 스핑크스, 피라미드, 달 (이라고들 하더라. 아주 난리 났다 난리 났어)
2009.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