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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dekick Feb 23. 2017

런던 시내 속 점심 산책

Lunch break in London

업무 스트레스가 부쩍 많이 쌓이는 그런 날이 있다.


아흔넷이나 되신 우리 외할머니께선 안부전화를 드리면 항상, "힘들지? 남의 돈 버는 게 쉬운 게 아니야"라곤 하시는데, 정말이지 그 말 그대로 힘들 때가 있는 거다.


그럴 때면 난 오피스를 뛰쳐나가곤 한다.

일종의 소극적인 일탈인 셈이고, 여느 직장인들이나 공감할 수 있는 심정일 게다.

정처 없이 그냥 시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망중한을 즐기다 보면 충전되는 느낌이 들고, 그리고는 다시 '전쟁터'로 뛰어들 준비가 된다고나 할까.


오늘도 스트레스가 쌓였던 그런 날이었고, 난 오피스를 뛰쳐나와 잠깐의 일탈을 즐겼다.

회사가 다행히도 런던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 있어서 조금 돌아다니다 보면 런던의 유명 관광지들도 만나게 되니, 이 일탈은 나를 잠깐이나마 여행자로 만들어준다. 참 감사한 일이다.


그 일탈의 풍경들..


회사 주변 골목 사이사이를 지나다가 보이는 세인트 폴 성당 St. Paul Cathedral.  

그 웅장함이 늘 놀라워서 난 지날 때마다 한번 더 쳐다보곤 하는데, 런더너들에겐 그저 회사 근처의 건물 하나일 뿐인 것 같다.

세인트 폴 성당은 그 존재만으로도 상징성을 지닌 곳이어서 처칠 수상의 장례식, 빅토리아 여왕의 Jubilee Celebration, 왕실의 결혼식 등 영국의 중요한 행사의 무대이다.


카페가 된 교회. Host Cafe.

유럽 내 기독교의 지속적인 하락세에 대처하는 지혜인 걸까. 교회 안 의자들을 그대로 두고 거기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회사원들도 보이고, 한 구석에선 기도를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아무 무늬 없는 종이컵이지만, 커피 맛도 일품.


세인트 폴 성당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위치한 Postman's Park.  좋아하는 영화 클로져 Closer 에 나왔던 곳으로 쥬드 로가 이름을 묻자 나탈리 포트만이 벽에 새겨져 있는 이름 중 하나 (Alice Ayres)를 가지고 자기소개를 한다. 


이 공원의 대리석 타일들 위에 새겨진 이름들은 사실 The Memorial to Heroic Self Sacrifice - 영웅적 희생 기념비-라는 1900년에 시작된 프로젝트로서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자신을 희생한 작은 영웅들의 이름들이다.

영화에 나왔던 Alice라는 인물 또한 그런 영웅이었다.  그녀는 한 가정집의 식모로 일하던 어느 날 집에 불이 나자 침대 매트리스를 밖으로 던지고는 집주인의 아이들 3명을 매트리스로 던져서 구한 뒤 정작 자신은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전쟁 같은 일상의 업무에서 뛰쳐나와 이러한 작은 영웅들을 기리는 곳에 앉아있다 보면, 나의 불평과 불만들이 하찮게 느껴지곤 한다.


날이 좋아 또 일탈을 즐겼던 어느 날.

타워 브리지 Tower Bridge는 언제 봐도 멋져서 개인적으로 런던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축물이다.

간혹 런던 브리지와 혼동이 되곤 하는데 - 런던에서 제일 유명한 다리라서 그럴 듯 - 런던 브리지는 타워 브리지 바로 서쪽에 위치한 그다지 멋없는 평범한 다리다.

최근에 세워진 뾰족한 피라미드 모양의 Shard 도 뒷배경으로 보인다. 정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런던이다.


얼마 전 알게 된 작은 정원. St. Dunstan-in-the-East Church Garden.

도심의 빌딩 숲 속에 있는 오래된 성공회 교회인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런던 대공습 the Blitz으로 인해 첨탑을 제외한 교회의 대부분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전쟁 후 런던시는 교회를 다시 짓는 대신, 이 곳을 공공 정원으로 만들기로 했고, 교회당이 있던 자리에 잔디도 심고 나무도 심고 분수도 만들었다.

점심시간에 샌드위치를 사들고 정원 내의 벤치에서 먹곤 하는데, 다른 런더너들도 여기저기에 앉아 점심을 먹거나 책을 읽으면서 휴식을 즐긴다.

과거의 상처가 남겨진 곳을 일상의 휴식처로 만드는 영국인들의 지혜. 이 또한 과거를 기억하는 하나의 방법일 게다.



Epil.

얼마 전 기사를 보니 한국에서는 점심시간에 낮잠을 자는 카페들이 회사 주변에서 인기라고 한다.

점심을 포기하고라도 쪽잠을 자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이런 게 말로만 듣던 창조경제인가 싶기도 하다.


다음엔 어디로 일탈을 즐길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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