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호, <우아한 세계>
송강호를 좋아한다. 그의 연기를 좋아하고, 그의 맛깔난 표현을 좋아한다. 송강호 영화는 거의 모두 챙겨 봤다. 그 많은 송강호의 필모그래피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연기는 <우아한 세계>에서 분한 강인구다.
강인구는 마흔 정도의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가장이다. 과장, 차장이란 직급 대신에 형님이라는 말을 들으며 산다. 밖에서는 '어깨'로 잘 나간다. 집에 오면 아내와 딸에게 무시당하고, 박대받는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는 아버지고 가장이니까. 그저 자신의 업을 수행할 뿐이다.
어느 날, 평범한 어깨의 일상이 계속될 줄 알았던 강인구에게 문제가 발생한다. 소위 회장님의 망나니 동생이 자신을 자꾸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한다. 나아가 자신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생존을 위협한다. 자신의 의지와 달리 일이 꼬인다. 강인구는 그래도 적당히 타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사고가 발생한다. 망나니 놈이 선을 넘은 것이다. 그도 어쩔 수 없이 선을 넘는다.
다행히 법적으로 정당방위가 인정돼 큰 처벌은 면했다. 그의 삶에 지친 가족들은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 강인구는 졸지에 홀로 남는다. 속칭 기러기 아빠가 된 것이다.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그의 삶은 계속된다. 사는 낙은 오로지 가족들이 단란하고 행복한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는 것뿐이다.
어느 날 라면을 먹으면서 가족들이 보낸 영상을 본다. 그 속에 아내와 딸, 아들은 너무나 행복해 보인다. 강인구가 웃는다. 갑자기 눈물짓는다. 먹던 라면 그릇을 바닥에 내동댕이 친다. 몇 초간 강인구의 서러운 눈물이 화면을 뒤덮는다. 그러다 그는 울음을 멈추고, 걸레를 가져와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그릇과 라면을 치우기 시작한다.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먹먹함이 잦아든다. 홍콩 누아르와 같은 비정함이나 진지함은 없다. 시종일관 송강호 식의 풍자와 해학만이 영화에 가득할 뿐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내가 본 그 어떤 영화보다도 '누아르'에 가까웠다.
'누아르'란 장르는 그래서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어떤 영화든 '누아르'가 될 수 있다. 프랑스어로 '검다'라는 의미의 '누아르' 장르는 대개 진지하고 엄숙한, 어딘가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짙게 나타난 영화들을 대개 지칭한다. 그래서 '누아르'는 범죄나 뒷골목 시정잡배들의 삶, 혹은 조폭 영화를 상징하는 장르가 되어버렸다. <우아한 세계>도 강인구라는 '형님'의 삶에 대해서 다뤘다는 점에서 '누아르' 장르에 깊게 배속돼 있다.
<우아한 세계>란 제목 자체가 '누아르' 장르를 상징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세계를 동경한다. 그래서 조폭이나 어두운 세계의 의리와 배신, 복수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알지 못하는 것을 간접 경험을 통해 어렴풋하게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세계에 대한 동경은 우아함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현실 세계도 마찬가지다. 알지 못하는 세계이기에 조폭이나 어두운 세계의 의리와 배신, 복수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동경을 우아함이라 표현한다.
경험해보지 못한 모든 것들은 그래서 우아하다. 일례로 재벌 2세인 정몽준은 서울시장 후보 시절 새벽 지하철 철도 레일을 청소를 체험하고는 "이런 낭만이 있네요"라고 말한 바 있다. 낭만과 우아, 비슷한 듯 다르게 다가오는 이 두 단어와 같이 이 세계는 잘 모를 때는 우아해 보이지만, 깊게 관여하면 우악스러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저 밥벌이를 위해 주먹을 쓰고, 우악스럽게 타인을 핍박해 가족을 부양하는 강인구의 지난한 삶은 그래서 우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