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IQ84>
무라카미는 일종의 꿈이었다. 만약 내가 소설을 쓴다면 하루키처럼 쓰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하루키의 글을 탐미했다.
처음 하루키 책을 읽었던 것은 중3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상실의 시대>는 어딘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라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처음 <상실의 시대>를 몇 페이지를 넘기면서, '무슨 소설이야 대체 이건' 하면서 글을 읽어 내려갔다.
<상실의 시대>를 읽고 나서 큰 깨달음이나 재미는 그다지 없었다. 다만, 중간중간 그만 읽을까란 생각이 들 때쯤, 외설적인 내용이 나왔고 나름의 기억하고 싶을 만큼 빼어난 문장들이 있었다.
<상실의 시대>에서는 지금 와 기억에 남는 건 자유분방했던 미도리가 참 사랑스러웠고, 와타나베는 정말 우유부단해서 별로인 남자였다 정도일까.
그 후로도 <해변의 카프카>를 비롯해 <태엽 감는 새>라든지, <댄스 댄스 댄스> 등 여러 편의 하루키가 쓴 글들을 꾸준히 읽어 댔다. 솔직히 뭘 읽었는지 왜 읽어야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자연스럽게 읽게 됐다고 표현하면 좀 웃기려나.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날의 곰만큼."
"봄날의 곰?"하고 미도리가 또 얼굴을 들었다.
하루키를 좋아하게 된 건 오히려 장편보다는 단편소설 때문이었다.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라든가, <한밤중의 기적 소리에 대하여 혹은 이야기의 효용에 대하여>는 다시금 곱씹어 봐도 대단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 글들을 읽으면서 '아, 내가 이런 글을 썼어야 하는데' 하면서 되지도 않는 박탈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 후 더욱 하루키를 좋아하게 된 것은 <1Q84>때문이었다. 나는 <1Q84>를 읽기 전까지는 이제 하루키의 효용도 다했다고 스스로 결론짓고 있었다. 내 안에서의 또 한 작가의 종말, 그렇게 판단했다.
<1Q84>, 1,2권을 사서 단숨에 읽곤 이래서 하루키, 하루키 하는 건가 생각했다. 더욱 내 편견을 깼던 것은 사실 <1Q84> 3권이었다. 나는 <1Q84> 3권이 나오는 것이 일종의 사족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출판업계에서 벌만큼 번 하루키가 <1Q84> 1,2권의 성공에 힘입어 3권을 내는 거 아냐란 의심의 눈초리를 지울 수 없었다. <1Q84>는 2권의 마무리가 그만큼 좋았던 것이다.
덴고와 아오마메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어야 했는데, 3권이 나오면 실망할 것 같았다. 그래도 후속 편이란 것이 또 욕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에 3권을 서점에서 집어 들었다. 아니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1Q84> 3권을 읽고는 '이거 내가 하루키를 너무 과소평가했는걸'하는 되지도 않는 독백을 했다.
<1Q84> 3권이 나온 지 3년이 지나 하루키는 또 다른 이야기로 내게 찾아왔다. 제목은 그동안의 소설과 달리 좀 길었다. 아주 많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좀 현학적이고 이상한 제목을 가진 책도 어쩔 수 없이 사서 보았다. 제목이 그다지 끌리지는 않았지만, 뭐 이제는 믿고 보는 하루키니까라는 믿음이 있었다. <1Q84> 내용은 지금도 확연히 기억이 나는데, <색채가 없는>은 나름 재밌게 읽었음에도 다자키 쓰쿠루와 같이 색채도 없이 흔적도 없이 증발돼 버렸다.
최근에는 읽다가 중간에 포기했던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고 있다. 하루키 책을 주로 번역하던 번역가가 양윤옥에서 홍은주라는 사람으로 바뀌어서 그런지 어딘가 하루키 문체가 자꾸 낯설게 느껴졌다.(사실 우리는 하루키의 문체를 읽는 게 아니라 양윤옥의 문체를 지금껏 읽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역시 하루키 책답게 어딘가 알 듯 모를 듯 술술 책장이 넘어가고 있다. 내용도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거야. 하루키, 어서어서 말을 해보라고' 하는 식으로 자꾸만 뒷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최근 책과 글을 강박적으로 읽는 편이었는데, 이 책은 마음 편히 먹고, 여유롭게 책장을 넘기고 있다는 점에서 참 기분이 좋다. 어쩌면 하루키가 가진 매력일까라는 생각도 든다.
주변에서 좋아하는 작가를 물으면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대답해 본 적이 없다. 왠지 무라카미를 좋아하는 남자라면 취향이 이상하다고 볼 것 같기도 하고, 허세 가득해 보이기도 할 것 같은 편견이 가질까 봐서이다.(사실 이건 전적으로 나의 편견이자, 내 문제이다.)
그래서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과 진지하게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 점은 참 애석하다. 물론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서 뭔가 크게 바뀌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어딘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란 기대감이 들기도 한다.
한 가지 궁금한 것 중 하나는 하루키의 책에는 이상하게 대사 위에 점을 찍어 놓는다. 무언가 강조하려는 부분 같고, 의미 있는 대사 같은데, 읽다 보면 무슨 의미가 있기에 글자 위에 점을 저렇게 찍어놨을까라는 생각이 종종 든다. 만약 이 생에서 하루키를 만날 일이 있으면 꼭 좀 물어봐야겠다.
주절주절,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글이 좀 늘어지기도 했다. 나른하고 비가 나리는 주말이다.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이라 말했던 하루키가 과연 얼마나 완벽한 문장과 완벽한 절망을 건축해 왔는지 꼼꼼하게, 곰곰이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언젠가 '소설'을,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를 만나면 이번에는 당당하게 그이에게 물어봐야겠다.
'봄날의, 봄날의 하루키를 좋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