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 하워드, <신데렐라맨>
신데렐라는 ‘잿빛 아가씨’란 뜻을 가지고 있다. 신데렐라 이야기는 평범한 누구나 비범해질 수 있음을, 인간은 누구나 영웅이나 공주가 될 수 있음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킨다. 그래서 신데렐라 이야기는 시대를 막론하고 계속해서 재탄생된다.
영화의 소재로 가장 많이 활용되는 스포츠는 복싱이다. 권투를 소재로 활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쓰러지지 한 도망칠 수 없는 사각의 링 안에서 벌어지는 사투가, 죽지 않는 한 영원히 투쟁해야 하는 인간의 삶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때는 바야흐로 대공황 시대였던 1935년 6월께, 한 때 무패 행진을 달리며 촉망받던 복서였던 제임스 브래독이 기자회견장에 앉아 있다. 오른손 부상과 여래 악재가 겹치며 그저 그런 무명 복서로 전락했던 제임스 브래독은 재기에 성공해 세계 챔피언인 막스 베어와의 싸움을 앞두고 있다.
기자가 브래독에게 묻는다.
“대체 당신을 여기까지 오게 한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무엇이 변했기에 당신은 은퇴할 나이에 재기를 할 수 있던 것인가요?”
브래독이 답한다.
“과거에는 명예를 위해 싸웠지만, 지금은 ‘우유’를 위해 싸운다.”
자신이 승리하지 못하면, 대전료를 받아가지 못한다면 그의 삶과 가정은 무너진다. 브래독은 우유를 위하여 링 위에 오른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동시에 투쟁한다. 늘 무언가 맞서 싸워야 한다. 누구는 세상과 싸우고, 누구는 신념을 위해 싸운다. 또 다른 누구는 명예를 위해 싸운다. 가장 슬픈 싸움은 생존을 위한 사투다. 제임스 J 브래독은 생존을 위해 링에 오른다. 그가 링에 오르는 이유는 단 하나, 한 가정의 가장이기 때문이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한 가장으로서 그는 링 위에 올라야 한다. 복싱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유가 됐다.
한 때는 세계챔피언이었다. 미국 대공황 시기에 맞물리며 브래독의 삶은 무너졌다. 졸지에 부두 노동자가 됐다. 그것 또한 감지덕지해야 할 만큼 모두가 어려운 시기였다. 과거의 영광과 부유함은 없어졌다. 이제는 전기세나 하루 먹거리를 걱정해야 할 처지다. 거기에 먹여 살려야 할 자식도 셋이나 있다. 가장으로서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 브래독은 좌절한다.
스포츠 영화에는 일종의 불문율이 있다. 대부분 실화를 바탕으로 하며 인간 고유의 투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런 스포츠 영화 중에서도 ‘신데렐라맨’만이 가진 특별함이 있다. 그 특별함은 아마도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는 이가 가지는 처절함과 간절함이다.
기존 스포츠 영화는 스포츠를 통해 성장하고 인간 본연의 가치와 인정 투쟁을 통해 ‘자아실현’이 주를 이뤘다. 진부하지만 대부분의 스포츠 영화는 주인공의 노력과 열정에 감동해 내 가슴속에 꽁꽁 숨어있었던 ‘꿈’의 조각 발견에 초점을 맞췄다.
신데렐라맨은 기존 스포츠 영화와 그 궤가 다르다. 인간 본연의 가치나 철학은 우유만도 못하다. 신데렐라맨 브래독은 생계를 위해 링 위에 올라 주먹을 휘두른다.
경제가 파탄 나고 국가의 시스템은 개인과 가정을 지켜주지 못했다. 결국 개인과 가정을 지키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가장이다. 그들은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아내, 남편, 아들, 딸이라는 대명사로 불린다.
이 영화에서 내가 꼽는 최고의 명장면이자 가장 슬픈 장면은 제임스 브래독이 권투위원회를 찾아가 돈을 구걸하는 장면이다. 그는 쓰고 있던 헌팅캡을 벗어 위원회 사람들에게 적선을 부탁한다. 인간으로서의 자존감, 복서로서의 투쟁심을 가장이라는 의무감으로 무참히 벗어던진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기 싫은 일,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온갖 조롱과 조소의 눈빛을 감내하고 헌팅캡에 사람들이 준 돈을 들고 가정으로 복귀한다. 전기가 끊겨 친척에게 보냈던 아이들이 돌아오고, 아내와의 불화도 잠시 사그라진다. 아내가 돈을 어디서 구했냐는 물음에 그는 희미한 미소만을 지을 뿐이다. 이걸로 됐다. 브래독이 쌓아 올린 모든 자존심과 투쟁심은 이걸로 된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브래독의 그 웃음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제임스 브래독에게 묻고 싶어 졌다. 정말 이걸로 된 것인가. 이 것이면 한 인간으로, 남자로서의 당신의 삶이 족한가 하고 말이다. 묻을 수 없었다.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미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대답이니까.
신데렐라맨은 ‘잿빛 아가씨’가 아닌 잿빛 노동자가, 두 주먹 하나로 처절한 사투를 통해 결국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는 동화이자 실화다.
제임스 브래독은, 아니 세상 모든 아버지들은 잿빛 아저씨이다. 밖에서 무수히 많은 재를 쓴다. 그 잿빛 아저씨는 가정으로 돌아와 비로소 의미를 가진 존재, 아버지가 된다.
브래독은 그가 처절하게 싸워 받은 대전료로 전기세를 내고, 어려울 때 받았던 구제 기금을 가장 처음 갚았다. 굳이 갚지 않아도 됐지만, 브래독은 갚았다. 그가 챔피언이기 이전에 대공황 시대에 어디에나 있는 노동자이자 가장, 신데렐라맨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