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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니뇨 Apr 11. 2019

스탭버스

 내가 드라마를 시작했을 때, 종편이 개국하고 드라마를 만들기 시작한지 1~2년 정도 지난 때였을까. 당시 상암은 개발이 한창이어서 방송국들은 아직 여의도에 있었다. 그래서 스탭버스도 항상 여의도에서 사람들을 태웠다. 여의도역 주변엔 항상 방송국 스탭버스가 월 주차료를 낸 것 마냥 서있는 곳이 있었는데, 출구 번호는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IFC 쪽 출구 앞이었을 거다. 


 버스 탑승 시간은 항상 이른 시간이었다. 모든 드라마가 그렇듯. 보통 아침 6시에서 7시 사이, 이르면 5시에도 스탭버스를 탔다. 대개 지하철 첫차를 타면 가까스로 도착하는 시간일 때였다. 연출부들은 콜타임에 대한 강박이 있는듯 쓸데없이 '버스 탑승 시간만' 칼같이 지켰고, 1~2분이라도 늦으면 버스는 그 자리에 없기 마련이었다. 늦잠을 자서 택시를 타고 가며 전화로 조금 늦을 것 같으니 5분이라도 출발을 멈춰달라고 부탁하면 연출부 형의 욕설이 날라왔고, 버스 좌석에 앉기 전에 같은 팀 형들에게 욕을 한 바가지씩 들어야 했다.


 가끔 방송국 세트에서 찍으면 콜타임이 좀 늦춰졌는데, 10분이라도 더 잘 수 있어 행복했다. 그럴 땐 지옥철 시간의 시작점에서 '굉장히' 까진 아니지만 '약간'의 부대낌을 느끼며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했다. 직장인들과 같은 시간대에 지하철을 타서 잠시나마 나도 나름의 직업인이며,직장인이라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일은 세트에서 찍을 때만 가능했다. 그것도 방송국 안에 있는 세트. 안타깝게도 외부 세트를 이용하는 일이 빈번했다. 


 드라마 스탭들이 타는 스탭버스는 보통 생각하는 '이동 수단'의 개념이 아니었다. 한국 드라마 특성상 촬영 시간이 길고, 그 와중에 로케이션 이동을 자주 해야했기에 버스는 '자는 공간'이었다. 두시간, 세시간을 집에서 잔다면 나머지 시간은 버스에서 어떻게든 자야만 했다. 안 그러면 정말로 못 자니까. 


 기사 아저씨(별칭 기장님)의 운전은 어찌나 거친지. 쭉 뻗어있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게 아니면 언제나 이리저리 흔들렸고, 급브레이크를 밟을 땐 앞좌석에 머리를 박기 일쑤였다. 무슨 드리프트라도 하는지 코너를 돌 땐 좌석 팔걸이가 몸을 버티지 못해 통로로 메쳐질 것만 같았다. 처음엔 불안했고, 익숙해지고 편해질 때가 되자 짜증났다. 거기다 동료 스탭들은 다들 신발을 벗은 채 벌러덩 눕다시피 한 자세로 잠을 청했고, 타인과의 밀착이 거듭되는 통에 신경쓰일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신발을 벗은 탓에 차 안엔 노린내와 구린내가 섞인 껄쩍지근한 내음이 진동했다. 여름엔 땀냄새가 더해졌다. 그런 것들이 옷과 몸으로 전이되는 것 같아 쉽사리 잠을 청하기가 어려웠다. 눈만 감은 채 냄새와 시간을 버티는 것이 참으로 힘들었다. 


 유난을 떠는 정도까진 아니어도 나름 깔끔한 척을 했던 터라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잠을 챙겨야 했고, 챙길 수밖에 없었다. 밤샘과 디졸브를 겪으며 몸은 버스에 앉으면 자동으로 눈이 감기게끔 변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라는 흔한 말을 그제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나중엔 버스 기장님의 난폭운전 때문에 맨 뒷자리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퍼스트형과 기장님의 싸움을 보며 옅은 미소를 숨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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