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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근 Mar 29. 2017

국수와 메추라기와 박카스 (Part 2)

- 어느 눈 내리던 밤 -

리어카 위에 넓은 판자를 덧대 만든 포장마차의 식탁 중앙엔 식재료 전시(展示)와 보관 역할을 하는 일종의 냉장통이 있었다.

유리로 된 미닫이문이 달린 냉장통엔 전어, 피조개, 오징어, 꼼장어, 메추라기 등이 얼음 위에서 신선함을 뽐내며 손님의 지목을 받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냉장통 안에 처참히 누워 있던 메추라기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털이란 털은 모조리 뽑혀 그대로 드러낸 빨간 속살.

불룩한 배에 비해 겨우 조류임을 나타내 주던 터무니없이 작은 날개.

축생(畜生)의 업을 비참하게 마치는 것이 한스러웠는지 괴기스럽게 반쯤 떴던 눈.


그런 흉한 모습으로 죽은 열대여섯 마리가 함께 누워있는 모습은 어린 내가 보기엔 처참했다.

잔혹한 죽음의 한 예시(例示)를 본 듯한 기분이랄까?

나는 비참한 죽음들을 직시할 용기가 없어 억지로 그 반쯤 뜬 눈들과 시선 마주치길 피했다.


“자... 국수 나왔소. 옆에 양념장 있응께 간 안 맞으믄 넣어서 드쇼”


국수가 세 그릇 나왔다.

멀건 멸치 국물에 김 가루와 깨소금이 뿌려진 특별할 것 없는 국수였지만 참 맛있었다.


‘후룩... 후루루룩......’

몇 젓가락 드시던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물으셨다.

“어떤가? 맛난가?”

“아따 겁나게 맛나브요. 이녘도 어여 드쇼”


지금도 그렇지만 어머니께선 국수를 참 좋아하신다.

삼시세끼 국수만 드시면 좋겠다고 하실 정도로 국수를 좋아하시던 어머니를 위해 가끔 아버지는 나와 동생이 잠이 들면 어머니를 데리고 국수를 먹으러 다니셨던 것 같다.


차 한 잔 마실 곳이 변변치 않았던 80년대 시골에서 포장마차는 아마 아버지와 어머니의 데이트 장소였지 않았나 싶다.

국수를 먹는다는 핑계로 그렇게 두 분만의 심야(深夜) 데이트를 즐기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데이트 장소에 내가 끼었으니, 어디든 아들 데리고 다니길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눈치가 없으셨던 건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좋다고 따라나선 내가 눈치 없는 것이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국수를 내준 곰네 아주머니는 연탄불에 석쇠를 올리고 메추라기를 굽기 시작했다.

‘치이익... 치이익...’

처참한 몰골의 그 녀석들의 핏빛 살들이 윤기 흐르는 맛깔난 갈색으로 점점 변하면서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탈 새라 아주머니의 손은 연탄불 위에서 바삐 움직이셨고, 아주머니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먹음직스런 연기가 피어오르길 반복했다.


더 이상 메추라기는 내가 눈길을 피하고자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저 빨리 한입 먹어보고 싶은 존재일 뿐이었다.


메추라기 두 마리가 하얀 접시 위에 올려 나왔다.

그것도 닭 종류(?)라고 나오자마자 아버지는 닭다리의 1/10 크기도 안 되는 그 작은 다리 한쪽을 뚝 떼어서 나에게 주셨다.

“안 체하게 꼭꼭 씹어 먹어라.”


아버지께서 건네신 그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통각을 느낄 정도로 짠맛.

어린 내 입맛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술안주로 나가던 음식이라 아마 간을 쎄게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다리살은 내 위아래 어금니 사이에서 적당히 반발력을 일으킬 만큼 쫀득했고, 뼈 째 씹어서인지 씹을수록 감칠맛과 고소한 맛이 입안 전체에 퍼졌다.


고통스런 짠맛을 이겨내게 할 정도로 그 녀석의 맛과 치감(齒感)은 일품이었다.


곧잘 받아먹는 나에게 아버지는 다리와 가슴살 같은 주로 살이 많은 부위를 주셨고 당신께서는 희멀겋게 눈을 반쯤 뜬 메추리의 대가리나 날개 부위 같은 먹기 수월치 않은 부위만을 안주삼아 소주를 홀짝이셨다.


국민학교 4학년 11살, 웬만한 건 혼자 다 할 줄 아는 심지어 곧 중학교 갈 나이가 머지않은 나이였음에도 아버지는 나를 자신의 옆에 꼭 끼고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체하지 않게 조심해라’, ‘국물도 좀 떠먹어가면서 먹어라’라고 하시는가 하면 주인아주머니의 넉넉한 인정(人情)으로 나온 삶은 꼬막을 까서 직접 내 입에 넣어주시기 까지 하셨다.


홀짝홀짝 잔을 기울이시며 내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아버지는 술에 벌겋게 단 얼굴로 연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아버지의 흐뭇한 바알간 미소는 따뜻했고 지금 자고 있을 동생은 느껴보지 못할 ‘맛’과 ‘사랑’에 가슴 벅차오르던 밤이었다.


지금은 주량이 느셔서 소주 1병 이상을 무리 없이 드시지만, 젊은 날 아버지께선 약주를 못하셨다.

소주 3잔 이상 드시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지금의 표현으로 ‘치사량(?)’이 석 잔 이셨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는 식당에서 소주를 시키셔도 2/3는 남기고 오셨고, 그런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돈 아깝게 반 이상 남길 것을 뭐 할라고 시킨다요!”하시며 나무라셨다.

하지만 그런 잔소리쯤은 쿨 하게 패스할 줄 아는 큰 도량(?)을 지니셨던 아버지는 석 잔 소주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피식 웃어넘기시곤 하셨다.


그날도 아버지는 딱 소주 석 잔을 드셨고, 손가락으로 ‘툭’하고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아버지의 붉은 얼굴이 소주 한계점(?)에 다다랐음을 알려주었을 때, 국수 그릇도 얼추 비워졌다.


“아짐, 여기 얼마요?”

“오메, 이리 빨리 가시게라우? 식구들이랑 오랜만에 봤는디 영 서운허요”

“자는 애를 깨워 와서, 얼릉 가봐야것소, 담에 또 올라요”


가는 우리에게 마음이 쓰이셨는지 곰네 아주머니께서는 우리 가족 일일이 인사를 건네셨고, 오늘은 그냥 가라며 한사코 음식값을 받지 않으려 하셨다.

하지만 그런 곰네 아주머니를 아버지는 끝까지 만류하시며 거의 몸을 던지다시피 탁자 위에 돈을 올려놓으셨다.


끝자리에 신발끈 묶기 바쁜 요즘에는 낯설은 모습이지만, 그때는 노상 있었던 ‘계산 씨름’이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친구들이나 지인들과의 그것이 아닌 식당집주인과의 ‘인정(人情) 실랑이’이랄까?


돈을 올려놓기 무섭게 식구들을 챙겨 포장마차 밖으로 나온 아버지를 뒤따라 곰네 아주머니께서도 나오셨다. 그리곤 내 손을 낚아채시고는 천 원짜리 몇 장을 쥐어주셨다.

“공부 열심히 허고, 맛난 거 사먹어라잉”

“어... 받으면 안 되는데......”

한없이 자상한 아버지셨지만, 어른들에게 인사하는 것과 돈 받는 것에는 엄격하셨던 아버지였기에 나는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주는 돈은 부모님 허락이 없으면 받으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따 뭔 돈을 주고 난리요!”

“언제 또 볼지 모른디, 용돈 줬다 생각하쇼”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고개를 가로저은 것도, 고개를 끄덕인 것도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눈빛엔 받아도 좋다는 허락이 있었다.

이런 감정 읽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마 그것은 감정 읽기보다는 ‘이 정도 선에선 받아도 된다’는 불문율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경험상 몇 번의 거부와 사양이 있은 후에는 받아도 되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짐작컨대 거의 대부분 어른들이 주신 돈을 받았던 것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와 동생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어른들이 베푸는 선의(善意)에 대한 사양지심(辭讓之心)이 아니었던가 싶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린 후 다음에 또 들른다는 몇 마디 인사를 더 주고받은 뒤, 우리 가족은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듬성듬성 서있는 가로등이 밤길을 비추고 있었고 하늘에서 내리고 있던 함박눈은 우리가 지나왔던 발자국을 이미 반 이상 덮어놓고 있었다.


지나왔던 발자국에 또다시 발자국을 덧입히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춥지?”

아버지는 혹여 내 손이 시릴까 자신의 두툼한 오리털 파카 주머니에 내 손을 넣어주셨다.

아버지의 체온으로 따뜻했던 주머니...

그 속에 둔탁한 작은 유리병 하나가 있었다.

“어? 이게 뭐지?”


궁금해하며 작은 유리병을 더듬는 내 손을 느끼신 아버지는 나를 보며 웃으시고는 주머니 안에 있는 그것을 꺼내셨다.

“자, 어린이는 이거 다 마시면 안 되니까 아빠가 좀 마시고 줄게.”

아버지가 유리병의 뚜껑을 돌리자 이내 기계음 같은 개봉음(開封音)이 들렸고, 이내 두어 모금 마신 후 내용물이 병의 1/3 정도 남겨진 것을 확인하시고는 나에게 그 유리병을 건네주셨다.


아버지의 체온으로 적당히 따뜻해져 있던 그 갈색 유리병을 나는 두 손에 꼭 쥐고 조끔씩 아껴 마셨다.

 

새콤하고 달콤한......

그것은 슈퍼나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과자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고급스런 새콤달콤한 맛이었다.

 

그랬다. 내 어린 기억 속의 박카스는 고급스런 단맛이었다.


“애한테 뭔 박카스를 주요!”

어린아이들이 먹으면 키 안 큰다며 커피나 박카스 주기를 끔찍이 여겼던 어머니는 주는 아버지와 먹는 아들에게 핀잔을 주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모르고 계셨다.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을 간다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둘이 함께할 시간이 생기면 언제나 아버지는 그 고급스런 단맛을 느끼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래도 무턱대고 주는 것이 아닌, 딱 병의 1/3만큼만 주셨던 걸로 보면 당신 나름대로의 ‘선(線)’은 있으셨던 것 같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박카스를 무슨 보물인 것 마냥 손에 꼭 쥐고 돌아가는 길.

그런데 병에 붙여진 종이 상표가 반쯤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어릴 땐 그게 왜 그랬는지 몰랐지만 나중에 좀 크고 나서 돌이켜보니 아마 아버진 포장마차에 있던 내내 주머니 속 박카스를 만지작거리며 나에게 줄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그것이 ‘이걸 언제 줘야 아들 녀석이 더 좋아할까?’란 장난스런 생각이셨을지, 아니면 ‘날도 추운데 병이 따뜻해지면 줘야지’란 부정(父情) 어린 마음에서 나온 생각이셨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함박눈이 쌓이고 또 쌓이던 그날의 추웠던 겨울이 그리 춥게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따뜻한 아버지의 마음이 전해져서인지 아닌가 생각해본다.


국수와 메추라기와 박카스와......

그리고

따뜻한 체온과 사랑이 함께했던 눈 오던 겨울의 그 밤.


새하얀 밤거리를 걷는 우리 세 가족의 마음은 가로등 불빛만큼이나 따뜻했다.

.

.

.     

그날의 따뜻했던 가로등과는 모양도 조명색도 다른 가로등 앞에 나는 서 있었다.


차들은 여전히 무심하게 내 그림자 위를 지나가고 있었고, 내리던 눈은 점차 굵어져 어두운 사위(四圍)에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


그리고 ‘행복’, ‘삶’, ‘배려’, ‘맛’, ‘따뜻한 체온’과 ‘사랑’이 넘치던 그 밤......

그 마음 따뜻했던 날을 생각하며......


나는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 끝 )


* 사진 : 구글 이미지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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