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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근 Oct 04. 2023

추석에 할머니 집에 가면......

- 보고픈 분, 보고플 분 -

추석에 할머니 집에 가면 사람들이 있었다.


대가족이었던 할머니 댁에 가면 삼촌들, 고모들, 숙모들, 거기에 사촌동생들까지 있었고 나는 그들의 북적댐이 좋았다.


숙모들은 아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에 고기를 삶거나 떡을 안치고, 삼촌들은 돼지를 잡고, 고모들은 항아리에서 삭힌 큰 홍어를 꺼내 다듬어 손질하고 할머니는 칼 대신 플라스틱 접시로 인절미를 썰어내셨다.

그것은 오랜만에 본 사람들이 이루어내는 협업(協業)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우리는 지금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서로 몸소 말하고 있는 듯 누구 하나 힘들다 투정 부리는 사람 하나 없이 그 시간들을 즐기고 있었다.


추석은 우리 가족들만의 명절이 아닌 온 마을 안의 잔치였다.

귀한 선물이 들어오면 한 해 신세 졌던 옆 집에 그것을 선물하고 그 선물 받은 옆 집은 또 다른 옆 집에 그것을 선물하고......

결국 아무개네 선물이 개똥이네까지 가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쩌다 개똥이네 집에서 자신의 선물을 발견한 아무개 씨는 그저 자신의 고마운 마음 담은 귀한 선물이 개똥이네까지 전달되었음에 신기해했고 또 그 귀한 선물을 개똥이네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아무개네와 함께 나누었다.

내 것과 네 것이 없는 모두의 것이 되는 것이 추석이었다.


어차피 옆 집도 했을 전, 식혜, 나물 반찬 등의 명절 음식을 맛이나 보라며 바리바리 싸들고 옆 집에 건네고 그 옆 집은 어차피 우리 집도 했을 음식을 또 바리바리 담아 주던 마음과 마음들.

'농자천하지대본'이란 깃발 날리며 고깔 쓴 농악대가 집 앞을 지날 때면 작은 주안상 봐 놨다가 막거리 한 잔씩들 돌리며 오른 흥에 서로 어깨춤을 추던 웃음과 기쁨이 넘쳐나던 순간들.


그것이 추석이었다.


그래서 원래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성격의 나였지만 그날만큼은 사람들로 붐비는 그 모습들과 소리들이 정겨웠다.


추석에 할머니 집에 가면 자연을 느낄 수 있었다.


이른 아침, 마당에 나가 한숨들이쉬면 강에서 피어 오른 물안개의 입자들이 비강(鼻腔) 속을 유영(遊泳)하는 그 느낌이 좋았다

또 어지럽게 날아다니던 잠자리 떼를 잡으려 애써 달리다 운 좋게 그중 한 마리를 잡아 허리에 실을 묶어 가지고 놀고 그러다 지치면 툇마루에 누워 여름 내내 새끼들을 키웠을 빈 제비집을 보다 낮잠이 들곤 했다.

해 질 녘 할머니나 삼촌들 손을 잡고 강변둑을 거닐면 울어대던 맹꽁이 소리, 개구리 소리.

저녁을 물리고 온 가족이 툇마루에 모여 앉아 삶은 옥수수를 먹을 때 우리 머리 위로 별똥별이 지나가면 "얘들아. 별님 가신다. 소원들 빌어라" 말하시던 할머니.

할머니의 배두드림으로 스르륵 잠이 들 때면 저 멀리서 아득히 들려오던 구슬픈 소쩍새 소리.

또 하루가 너무 즐거웠음에 가는 하루가 아쉬워 잠들기 싫어하는 내 잠결처럼 깜빡 깜빡이던 반딧불이들의 군무(群舞).


그것이 추석이었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감성과 느낌과 풍경과 소리들이 추석 할머니 집에 있었다.


추석은 할머니와의 추억이다.


할머니는 어딜 가든 날 데리고 다니시길 좋아하셨다.

차례음식에 필요한 제수(祭需) 장만을 위한 장나들이에도, 쌀가루를 빻기 위한 방앗간에도, 심지어 한 밤중에 아직 덜 익은 나락들이 펼쳐진 논에도 데려가셨다.


그중에서도 할머니 손 꼭 잡고 함께 논을 향해 걸었던 그 밤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논 옆으로 길게 이어진 도로 끝에 큰 보름달이 둥실 걸려 있었던 그날.

길 끝에 있던 작은 동산마저 집어삼킬 듯했던 그 큰 보름달을 보며 "우리 손주 아프지 않고 항상 건강하게 해 주십시오... 해주십시오..."라고 나직이 말씀하시던 할머니.

어렸을 적 병약했던 손자를 위한 할머니의 기도는 함께 가는 동안 계속됐다.

할머니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을지 이해하기엔 너무나 어렸던 일곱 살의 나는 그저 할머니가 나를 많이 사랑하고 계신다는 그 막연한 느낌이 좋아 할머니와 맞잡은 두 손을 앞 뒤로 신나게 흔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런 나를 빙그레 웃으시며 내려다보시던 할머니.


그 아련하고 소중한 추억이 있는 날이 나에겐 추석이다.


그리고 함께 하고픈 분과 함께 할 수 없음에 슬픈 날이 추석이다.


+ 보고픈 분이... 보고플 분이...

   살아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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