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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근 Nov 06. 2023

< 코스모스와 쌍화탕 >

'코스모스 키가 이렇게 작았던가?'

분명 어릴 적 내 눈높이만큼이나 컸던 꽃이 이젠 겨우 내 무릎 언저리에서 흔들거리는 걸 보며 혼자 되뇌었다.

나중에 어머니께 들어 안 사실이지만 코스모스엔 키 큰 코스모스와 키 작은 코스모스가 있다고 한다.

서로 종(種)이 달랐던 것.

그리고 요즘엔 키 큰 코스모스는 보기 어렵다고 하셨다.


여하튼 내가 기억하는 코스모스는 키다리 코스모스였다.

그 하늘하늘한 가냘픈 줄기 위에 핀 형형색색의 꽃들.

특히 바람이 불어 한들한들 거리는 그 꽃들의 모습은 위태로우면서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가는 줄기가 바람에 꺾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그 가는 줄기에 달린 큰 꽃들이 떨어져 버리진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게 만들던 그 불안한 꽃들은 내 걱정들과는 별개로 바람의 선율을 타고 아름답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코스모스들이 도로변을 따라 쭉 이어져 있었던 그 길.

꽃길 옆으론 너른 황금빛 들녘이 저녁 노을빛을 머금어 붉게 물들어가던 그때.

그 길을 따라 어린 나는 더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아버지에게 가고 있었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길을 걸어갑니다.'


언젠가 티비에서 들어봤던 노랠 마음속으로 흥얼거리며 나와 동생은 아버지의 직장으로 걸어갔다.


아버지의 직장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어린이를 위한 변변한 놀이터 하나 없던 시골 깡촌에서 아버지의 직장은 무료한 일상을 달래기 위한 곳이었고 또 무엇보다 갈 때마다 아버지께선 얼마간이라도 돈을 쥐어주셨으니 어린 마음에 그보다 더 좋은 곳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날도 나와 동생은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아버지께 용돈을 타서 무슨 과자를 사 먹을지란 생각을 덧칠하며 들뜬 마음으로 아버지의 직장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아버지의 직장 동료분이 우리를 맞아주셨다.

그분은 나와 동생의 안부를 묻고는 "너희 아버지, 지금 좀 아파서 저기 숙직실에서 쉬고 계셔."라고 말해주셨다.


나는 숙직실 미닫이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컴컴한 실내를 희미한 티비 조명과 소리가 채우고 있던 그곳에서 아버지는 모로 웅크리고 누워 끙끙대고 계셨다.


"아... 아빠......"


내 목소리에 아버지는 고개를 슬쩍 돌리시더니 이내 날 보시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셨다.


"아이고. 우리 아들하고 딸 왔구나."


아버지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연신 기침을 해대셨다.

아마 심한 몸살을 앓고 계신 듯했다.

항상 강건하셨던 아버지가 저렇게 아픈 걸 처음 봤던 나는 머릿속이 순간 멍해지는 것 같았다.

뭐라 대답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던 나를 아버지는 그 몸을 하시고서도 나와 동생의 손을 번갈아 잡아주시고 또 한 번씩 안아주셨다.


"해 곧 지겠다. 얼른 동생 데리고 집에 가. 알았지?"라고 하시며 아버지는 가는 길에 동생과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며 나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쥐어 주셨다.


아버지는 다시 기침을 해대며 그 컴컴한 숙직실로 들어가셨다.

나는 돈을 쥐고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섰다.

오는 길은 행복했는데, 아버지께 용돈도 받은 지금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아버지 직장을 등지고 돌아서는 그 길에서도 그랬다.

동생과 과자를 사 먹을 수 있는데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자꾸만 토끼눈처럼 빨갛게 충혈된 아버지의 눈과 밭은기침을 해대시던 모습과 그 티비 켜진 회색빛 숙직실에 모로 누워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 동생은 빨리 슈퍼를 가자며 날 재촉했다.


"우리 이 돈으로 아빠 약 사서 다시 가자."


예상치 못한 계획 변경에 동생은 짜증을 냈지만 나는 동생을 엄하게 타일렀다.

아까 아빠 모습 보지 않았냐고.

아빠 지금 엄청 아프다고.

우리가 약 사서 아빠 빨리 낫게 해야 한다고.

그런 나의 설득에 동생은 입을 삐쭉삐쭉거렸지만 아빠를 낫게 한다는 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진 않았다.


우리는 약국으로 향했다.

약사님에게 아버지의 증상을 말하니 쌍화탕 2병과 알약 2개를 주셨는데 내 수중에 있던 200원을 보태 값을 치렀다.

그리고 행여 따뜻한 쌍화탕이 식을까 내 옷 안쪽에 감싸 안고 다시 아버지의 직장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느덧 해는 지고 무심한 듯 밤길 비춰주는 달빛과 어지럽게 핀 코스모스만큼이나 흐드러지게 박힌 별빛들이 우리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다시 아버지의 직장으로 들어섰을 때 아버지의 직장 동료 분은 우리를 보고 놀라셨지만 나는 그 아저씨께 예의 인사를 드리고 바로 아버지가 계신 숙직실 문을 다시 조심스레 열었다.


"아빠......"


전과 같은 모습으로 어두운 방안에 혼자 누워있던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보시곤 놀라셨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집에 안 갔어!"

우릴 향한 아버지의 걱정이 높은 언성이 되어 돌아왔다.


"아빠. 이거..."

그런 아버지에게 나는 품 안에서 약봉지를 꺼내 드렸다.

"아빠... 빨리 나아서 안 아팠으면 좋겠어."


아버지는 한참을 조용히 받은 약봉지를 내려보셨다.

그리고선 나와 동생을 번갈아 보시더니 우리 둘을 말없이 꼬옥 안아주셨다.


"얘들이 참 기특하네요. 참 잘 기르셨어요."

아버지 동료분의 말에 아버진 웃음으로 화답하셨고 우리를 놓아주셨다.

그리고선 이내 쌍화탕 한 병을 꺼내 알약과 함께 삼키셨다.


"어? 갑자기 힘이 나는데? 너희들이 사준 약이 효과가 있었나? 봐봐 아빠 다 나았지?"

갑자기 아버진 자신의 이두박근을 자랑하며 이젠 아프지 않다고 말하셨다.


어리긴 했지만 그게 우릴 위한 거짓말이란 걸 눈치챌 수 있는 나이였음에도 나는 아버지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나보다 더 어렸던 동생은 아빠가 이젠 다 나았다며 아버지의 팔에 매달려 싱글벙글 웃어댔다.


"자,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집에 어서 가. 엄마 걱정하신다."

아버진 사무실 캐비닛을 열어 큰 후래쉬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시며 연신 우리가 돌아갈 밤길을 걱정하셨다.

그리고 그 몸으로 큰길까지 우릴 바래다주셨다.


아버지와 헤어지며 나는 말했다.

"아빠, 너무 아프면 일하지 말고 집에 와. 알았지?"

"그래, 그럴게. 그런데 너희들이 사준 약 덕분에 아빠는 벌써 다 나은 것 같은걸?"

아버지는 내 머리와 내 동생의 머릴 열기 가시지 않은 뜨거운 손으로 쓰다듬어 주셨다.


아버지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

달빛보다 환하고 따뜻한 후래쉬 불빛을 비추며 집으로 향하던 길.

코스모스는 귀뚜라미 소리 실은 바람결에 가을의 선율을 타고 있었고, 달빛과 별빛 머금은 들녘도 그 선율 따라 파도처럼 일렁이던 그 밤.

나와 동생이 집으로 향하던 그런 그림 같았던 밤.


발걸음은 집으로 향했지만 마음은 아버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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