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방금 역 앞에 있는 상점에서 마치 새 문명이라도 발견한 사람들처럼 기뻐하며 물건을 집어 들었다. 먼저 냉장고에 열 맞춰 있던 생수 두통을 꺼내고 목구멍에 달달함을 적셔줄 요량으로 청량 음료수도 하나 꺼내 들었다. 그 외 라면과 달곰한 간식을 손에 더 쥐고서야 우리는 문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 대중교통으로 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망아지마냥 상점 안을 휘젓고 돌아다녔지만, 그때마다 남편은 손은 네 개뿐이라며 내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래도 물을 아껴먹던 지난밤에 비하면 지금은 꽤나 풍족한 편이다.
우리는 오늘 아침 생수를 구하기 위해 스위스 땅을 밟았다.
이틀 전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이브에 남편과 나는 외닝겐(Öhningen)이라는 독일 남부의 한 도시를 찾았다. 이곳 주변엔 보덴제(Bodensee)라고 불리는 큰 호수가 있는데 이 호수는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세 나라에 걸쳐 있는 독일 최대 크기의 호수 중 하나다. 여름엔 명성답게 많은 휴양객들로 붐비겠지만, 지금처럼 삭막한 겨울엔 적막감만 감돈다. 심지어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 독일 최대 명절인 크리스마스 연휴엔 더더욱 그렇다. 마치 우리 둘만 외딴섬에 뚝 떨어진 것처럼 도시 전체가 고요하기만 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이런 적막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숙소에 도착 후 우리는 몇 개의 짐이 빠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여행이 한두 번도 아닌데 서로가 서로에게 "아마추어같이 왜 이랬어"라며 의미 없는 핀잔을 주기도 했다. '만약에 말이야...'를 달고 사는 우리가, 그 때문에 보부상마냥 모든 짐을 다 싸가지고 다니는 우리가, 이번 여행은 뭔가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허술했다.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괜찮았다. 빠트린 짐 중에 가장 중요했던 건 바로 실내용 슬리퍼! 유럽 여행에서는 실내용 슬리퍼가 있고 없고의 차이로 여행의 질이 달라지는데 특히 신발이 무거워지는 겨울 여행에서는 필수품이 된다. 그런데 슬리퍼가 있어야 할 자리에 떡하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드립 커피 장비를 보고 나는 어이없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디 보자. 원두, 그라인더, 종이 필터, 드리퍼, 저울, 심지어 주전자까지 챙겨 왔네?"
물론 캠핑이었다면 이 장비는 우리에게 생명수를 제공하는 필수품이 되겠지만, 보통 에어비앤비 숙소에는 커피메이커가 구비되어 있어 굳이 이렇게까지 챙길 필요가 없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이틀 뒤 나는 커피 장비를 챙겨 온 남편을 향해 물개 박수를 치며 칭찬을 쏟아냈다.
"어휴 진짜 잘 챙겨 왔네. 이거마저 없었으면 목도 못 축일 뻔했어."
챙겨 온 생수가 바닥을 드러내자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내뱉은 말이다. 수돗물을 끓여 먹음 되지 뭔 유난인가 싶겠지만, 이곳의 수돗물은 우리 동네보다 물의 경도가 훨씬 셌다. 주방 일을 마치자마자 눈에 띄는 칼크(석회질)를 마른 수건으로 닦아냈지만, 물만 닿아도 바로 하얗게 내려앉은 석회 때문에 은근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숙소에 비치된 커피 머신으로 눈을 돌려 물통에 잔뜩 낀 석회를 보자 괜한 찝찝함이 들었고 드립 커피 장비를 챙겨 온 남편이 새삼 기특했다. 비록 슬리퍼와 맞바꾼 장비였지만 생각해 보니 내겐 슬리퍼보다 중요한 게 커피인 것 같다.
그렇게 유난을 떨며 우리는 수돗물을 커피 필터에 걸러 물을 끓였다. 필터에 석회 잔여물이 하얗게 남아있는 걸 보고 한 번 더 걸러야 했고 그 물로 커피를 끓여 마시고 밥도 해 먹었지만, 차마 그냥 마시기엔 뭔가 찝찝해 생수를 구하러 집을 나선 거였다.
여담이지만 필터에 물을 두 번 거른 후 내린 커피 맛은 내 입에 별로였다. '커피는 적당량의 미네랄로 맛이 좌우된다'는 남편의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생수 찾아 삼만리로 우리는 가장 가까운 기차역을 찾아 스위스의 슈타인 암 라인(Stein am Rhein)까지 오게 된 것이다. 아무리 크리스마스 연휴라 해도 기차역 앞의 상점은 문을 열기 때문이다. 이곳은 외닝겐에서 차 타고 5분이면 갈 수 있는 독일-스위스 국경에 인접해 있는 도시고우리의 '믿는 구석'은 바로 이곳의 크리스마스 마켓이었다. 이곳은 여느 도시와 다르게 크리스마스 마켓이 1월 초까지 연다고 해서 우리는 외식을 비롯해 부족한 게 있으면 이곳에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이틀 전에 '크리스마스 마켓은 역시 야경이지' 하는 마음에 숙소에서 엉덩이를 뭉개다가 느지막이 슬리퍼를 구하러 왔었는데 우리가 간과했던 건, 이곳 역시 크리스마스 연휴에는 일찌감치 마감을 한다는 거였다. 크리스마스 마켓뿐만 아니라 주변 식당도 오후 5시가 되자 정리하는 분위기여서 우린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숙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손에는 간신이 구한 슬리퍼가 들려있어 다행이었다.
기차역에 가기 전 막 개장한 크리스마스 마켓에 들러 각자 입에 소시지 하나씩을 쑤셔 넣었다. 비로소 크리스마스 마켓에 당도한 느낌이 들었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쇼핑을 마치고 나온 우리는 손목에 일용할 양식을 묵직하게 걸고 나서야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평화를 찾은 후호수를 따라 걷다 보니 새가 사람보다도 훨씬 많은 조류 보호 구역을 지나게 됐고 그러다가 수많은 백조를 목격하기도 했다.
호수와 집들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 백조들은 집의 안마당을 제 집인 양 드나들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남편의 한마디에 웃음이 터졌다.
"저런 집에서 내가 잔디를 깎고 있으면 집주인으로 안 보고 일하는 사람으로 보겠지?"
자기 객관화가 참 잘 되어있는 사람이다.
한참을 걷다 쉬다를 반복하다 이제는 알코올을 들이켜도 되겠단 생각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 구시가지로 향했다. 가는 길 삼삼오오 벤치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고 덩달아 우리도 그들 옆에 서서 호수 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봤다. 이틀 전 실내용 슬리퍼를 구하기 위해 찾았던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생경한 모습이었다. 주변이 어둑해질 때 방문한 이곳은 비까지 와서 더 삭막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여느 휴양 도시처럼 여유가 흘러넘친다. 호수 앞에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했고 연휴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관광객도 제법 많이 보였다.
여행이 뭔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 궁색 맞은 크리스마스 여행이 되었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차분하게 연말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침마다 남편이 내려준 커피를 들고 숙소 다락층에 올라가 변화무쌍한 날씨로 매일같이 달라지는 풍경을 보며 멍 때렸고, 눈 덮인 알프스가 파노라마로 펼쳐진 옆 동네 성당에서 크리스마스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 명절이라 고향을 찾은 가족 단위의 신자들이 많았는지 이렇게 대면대면하고 서로가 쑥스러워하는 평화의 인사는 처음이었다. 집 주변 호수를 끼고 산책하다가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을 넋 놓고 바라보기도 했고 그 옆에서 공놀이를 하기 위해 이 추운 날 물속으로 달려드는 셰퍼드 한 마리도 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주변의 모든 게 물 흐르듯 평온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숙소 주인이 끊어준 교통 티켓 덕분에 남편은 글뤼바인도 마실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운전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알코올이 들어있지 않은 음료를 마셨을 텐데 이번 여행에서는 원 없이 들이킬 수 있었다. 우연히 발견한 카페에서 맛본 케이크는 기대이상이었고 그 카페가 130년 전통을 가진 카페란 걸 알았을 땐 고개가 절로 주억거려졌다. 시 홈페이지에 나온 정보만 믿고 동네에서 장이 열릴 걸 기대하며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가 허탕치고 돌아오기도 했지만, 헤매고 다닌 덕분에 마을 구석구석을 탐방하기도 했다.
공짜 티켓으로 시내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었던 것, 크리스마스 연휴여서 우리가 전세 낸 것처럼 텅 빈 버스를 탈 수 있었던 것, 때문에 순간 자신감이 넘쳐 버스에서 내릴 때 기사님에게 큰 소리로 인사했던 것, 하지만 돌아오는 길도 같은 기사님이라 다시 만나 머쓱했던 것, 이런 예상치 못한 경험들이 궁색했던 여행을 더 풍족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집 앞에 계란 자판기가 있어서 그렇게까진 굶주리진 않았다는 것! 여행이 계획한 대로 순조롭게 흘러가진 않지만, 지나고 나니 모두 재밌는 경험들이었다.
"크리스마스 연휴에 또 여행하고 싶어?"
나의 물음에 한참을 고민하던 남편이 입을 뗐다.
"음,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든 게 다 갖춰진다면? 생수 한 박스는 물론이고 매끼니까지 완벽하게 준비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