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13 #worship ##wooridle
1. 패배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입니다
12~14절, 아마샤는 화를 자취하여 북이스라엘 치러 나갔습니다. 자기 고집대로 진행하였고 그 결과 패배했습니다. 그리고 12절에 그 패배는 이스라엘 앞에서 패배했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의해 유다가 패배를 당한 것입니다. 에돔에 우상을 섬긴 죄의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을 승리를 얻었습니다. 성경은 아마샤를 굳이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이라고 소해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아하시야는 예후에게 형 되었고, 아버지 요아스는 심복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고조할아버지 여호사밧이 아들 여호람을 아합의 집 딸인 아달랴와 불신 결혼한 결과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샤의 체포 역시 이 집안을 오염시킨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설병으로 쳐들어가서 제일 큰 문인 에브라임 문을 헐어 버리는 것이고, 이것은 유다를 향한 확실한 메시지였습니다. '너희는 우리에게 안돼, 부서져야 해'라고 하는 엄청난 수치였습니다. 성벽을 사백 규빗을 부셨고, 모든 기명을 탈취하고 금은을 탈취하고, 사람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결과적으로 다 뺏기고 남유다는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군대, 성벽, 물건도 다 잃었습니다. 아마샤도 죽었을 텐데,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패배는 하나님에 의한 심판이고, 신적 수동태이고, 가장 합당한 징계인 것입니다.
사실 북이스라엘은 제사도 다 바꾸고, 금송아지 우상도 섬기고, 엘리야 같은 최고의 선지자가 있어도 꼼짝도 안 하던 백성이었습니다. 반대로 유다는 예루살렘에도 예배도 드렸지만 하나님은 훨씬 크게 징계로 다루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씨가 남유다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후손의 죄를 더 심각하게 보고 다루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싹 뺏기게 하는 징계로 다루십니다. 죄에서 구원받기 위해 채찍으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징계입니다.
하지만 승리는 100번을 해도 질리지 않는데, 패배는 한 번만 해도 힘듭니다. 우리 인생에서 패배는 우리가 밑동 잘린 인생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징계입니다. 패배를 당할 때 너무 힘들고 절망이 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2일 전 큐티에서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 터지고 다시 만들지만 그 그릇을 버린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사람의 결정이 무너져야 하나님의 결정이 세워지게 됩니다. 징계를 잘 받아들이고 하나님께도 돌이켜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적용 질문) 인정하기 힘든 패배의 사건은? 패배해서 미운 사람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시려고 징계하시는 나의 죄악은?
2. 패한 후 15년은 회개의 기회입니다.
15~16절은 요아스의 인생을 정리하는 문구인데, 13장 12~13절에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요아스에게 똑 같이 사용된 단어가 업적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남유다 히스기야에게 한번 쓰였고, 그 외 북이스라엘 왕게도 4번 쓰였습니다. 왜 요아스에게 2번 반복해서 기록되었을까요? 아마샤의 생존을 돋보이게 하는 것인데요, 형제간의 싸움에서 요아스가 이기고 아마샤가 졌습니다. 요아스는 업적이라고 강조되고, 남유다의 왕 아마샤는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요아스는 엘리사에게 양육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요아스는 엘리사에게 집중 양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양육을 통해 회개는 하지 않았지만, 전쟁을 하지 않으려고 한 것과 전쟁을 이겨도 아마샤를 죽이지 않은 것이 바로 양육을 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엘리사의 거룩한 분노와 양육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분노로 아이들을 위해서 연합 예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양육을 받고 주님 뜻대로 해도, 요아스는 빨리 죽고, 아마샤는 살았습니다. 자녀들에게 어떤 유산을 남길 것인가요? 그래서 업적을 요아스에게 2번이나 쓰였고, 양육이 업적보다 더 큰 것이고 중요합니다. 그래서 양육을 받는 요아스에게 2번 쓰인 것입니다.
패배자가 된 아마샤는 15년을 생존했다고 표현합니다. 살아서 숨만 쉬었다는 것입니다. 회개도 없이 정직한 그 교만한 모습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15년을 허락했을까요? 나중에 히스기야에게도 15년을 허락했지만 죄만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다려주시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아마샤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복수심을 보고 회개했어야 하는데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고난으로 살기 힘든 분들이 있지만, 이렇게 살게 한 것도 은혜입니다. 주님 이 시간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유는 우리를 살게 하기 위함이고, 구원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15년은 은혜로 주신 선물이니 절망하지 말고, 화내지도 말고, 죽지도 말고, 감사해야 합니다. "붙회떨감" 입니다. 지금 겪는 모든 패배의 사건을 잘 해석하고 가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질문) 내가 쌓고 싶고, 쌓고 있는 업적은? 그만한 열심으로 양육받고 있나요? 밑동 잘린 나무 같은 내 인생의 남은 시간을 무엇을 위해 쓰겠습니까?
3.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19~22절, 아마샤의 최후는 아버지 요아스처럼 반역에 의해 죽었습니다. 아마샤는 무리가 와서 죽였습니다. 신복이든 무리이든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못 됩니다. 아마샤는 라게스 요새로 도망하지만, 그가 돌아가야 할 곳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역대기상 25:27 하나님이 패배의 사건으로 징계하시고, 15년을 회개의 시간으로 주셨지만 그는 회개하지 않고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 완악함에 대한 심판으로 반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내 지분이 있고 내 책임이 있습니다, 믿음만큼 내 잘못을 깨닫는 것입니다.
죽은 아마샤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무리가 그를 죽이고 그 시체를 예루살렘에 실어와서 조상들과 함께 장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 아사랴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는 이후 웃시야 왕인데, 그 나이가 16살이었습니다.
무리가 마음만 먹으면 아사랴도 몰아내고 다른 왕족울 왕으로 세울 수 있었는데, 무리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리가 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 왕과 약속한 언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구속하신 구속사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소망을 포기하지 않아야 할 이유입니다.
엘랏은 항구 도시인데 솔로몬도 이곳을 확보했는데, 아마샤가 에돔을 정벌해서 이 길이 열렸고, 다시 항구를 건설했습니다. 이것은 아하시야, 아마샤가 뛰어난 것이 아니라, 다윗과의 언약 때문이고, 예수님이 오시기 위한 것입니다. 인생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기댈 수 있는 게 없을수록 더욱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있겠다는 소망을 제외하고는 우리를 이 땅에서 순결하게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끝까지 반역한 여로보암과 사람이 주인공이지만, 남유다는 무리가 반역을 일으켜도 신복이 왕을 죽여도 사람이 주인공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인 왕의 아들이 왕이 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예수님의 족보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과 인생의 주인공 이시구나"라는 깨달음이 훅 들어오는 날이 있으니, 그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남유다 북이스라엘 세상적으로 보면 지겨운 지역감정이지만, 그래도 연약한 유다를 택했고, 죄만은 유다는 겸손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큐티를 했으면 거기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유다에서 끊어질 듯해도 끊어지지 않고 주님이 지켜가는 것입니다. 내 말씀으로 받는 자는 주님이 지켜 가시는 것입니다. 암담한 상황에 있더라도 우리 소망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약속대로 건져가십니다. 어떤 상황이 있어도 소망이 있습니다.
(적용 질문) 마샤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버린 일은? 해석이 안 되는 반역의 사건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둡니까? 다른 것을 찾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