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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바람 Nov 04. 2022

산책의 기억

오늘의 마음 (9)

산책을 좋아한다. 쌍둥이 육아 중에도 짬이 날 때면 틈틈이 밖에 나가 걸을 정도로 산책을 좋아한다. 흐리면 흐린 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또 더우면 더운 대로 날씨가 주는 그날만의 기운, 분위기를 좋아한다. 햇살이 좋은 날이면 일부러 햇살이 찾아드는 길만 골라 걷고, 낙엽 지는 가을이면 이런 빛깔, 이런 감촉, 이런 분위기에 경이로운 기분마저 든다. 하늘하늘 봄바람 마냥 가볍게 눈이 날리는 겨울 오후의 산책을 기억하고 있으며, 아카시아 향이 바람에 실려 오던 봄날 저녁의 산책, 그리고 저만치서 옅게 불어오는 바람이 반갑기만 하던 여름밤의 산책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특별히 춥지 않다면, 더위가 심하지 않다면 1년 중 산책을 피할 날은 거의 없다. 아! 비 오는 날은 제외다. 비가 내리는 날은 안에서 밖을 보는 게 훨씬 더 행복하니까.      


요즘은 멀리 가지 못해서 주로 아파트 단지를 걷고 또 걷는다. 그 안에서도 짧은 코스, 중간 코스, 긴 코스를 나름대로 정해서 시간에 맞춰 기분에 맞춰 걷곤 한다. 날이 적당히 선선하면 벤치에도 가끔 앉곤 하는데, 사람들이 덜 다니는 쪽에 큰 나무를 마주하고 있는 작은 벤치가 나의 공간(?)이다. 나만 사용한 곳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정해두면 왠지 모를 친근감이 들어 그 공간이 더욱 사랑스러워진다. 그리고 소박한 산책의 즐거움도 더해진다.       


일을 할 때도 산책을 자주 했다. 구성안이 잘 안 풀리거나 이런저런 소음에 마음이 소란할 때면 걷곤 했다. 일하던 방송국 근처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 도시의 산책로가 있다. 수목원을 지나, 미술관을 건너, 넓은 광장으로 이어지는 코스다. 수목원은 계절별로 빛깔이 달라 걷는 재미가 있고, 미술관 앞길은 조용하고 호젓해서 좋고, 넓은 광장은 자전거를 타고 인라인을 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즐거움이 있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곳은 미술관 앞길이다. 단층의 미술관 건물과 잘 정돈된 잔디, 키가 크지 않은 나무와 부담스럽지 않은 조각 작품들이 한두 점 놓인 평온한 공간이다. 평일 오후의 미술관은 늘 조용했고 평온했다. 소란한 일터를 잠시 떠나온 건 이런 평온함을 느끼고 싶었던 마음이었으니, 미술관 앞길은 늘 나에게 가장 좋은 휴식처가 됐고, 가장 사랑하는 산책길이 됐다.     


신혼집이 있던 동네에서도 산책을 자주 했다. 미로 같은 골목길이 얼기설기, 아니 옹기종기 모여 있던 동네였다. 같은 듯 다른 건물들을 익히고, 요리조리 이어져 있는 비슷한 모양의 골목길을 익히니 산책이 즐거워졌다. 여러 갈래의 골목길에는 그 길마다 다른 풍경을 가지고 있었고, 개성 강한 상점들이 곳곳에서 툭툭 튀어나와 구경하는 재미, 한 두 번씩 물건을 사는 재미가 있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해가 어스름 지면 남편과 어김없이 산책을 했다. 10분을 걷기도 했고, 30분을 넘기는 날도 있었다. 5월이면 어김없이 아카시아 향이 났고, 근처에 대학이 있어 청춘들이 모여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으며, 늦게까지 문을 여는 프랜차이즈 커피집 앞은 늘 불빛이 환했다. 가끔 들르던 토스트집이 장사를 끝내고 가게를 정리하던 모습, 단골 커피집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모여 앉은 모습, 소문난 삼겹살집 앞을 지날 때면 고소한 냄새가 나서 내일 저녁은 저기서 먹어야지 하던 기억, 오래된 건물을 부수고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지어 올리던 모습까지. 산책 중에 만난 골목의 다양한 풍경은 그곳을 떠나왔지만 아직도 눈에 선하다.      


산책은 기억을 만드는 일 같다.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의 풍경들이 내 마음 안에 차곡차곡 모여 애틋한 기억이 되는 일. 걷는 일은 마음의 온도를 높이는 기억을 만드는 일 같다. 그래서 나는 산책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오늘 저녁에도 나가서 걷고 싶지만 눈앞에 꼬물거리는 두 아기가 있다. 덕분에 오늘 산책은 내일로 미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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