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바람 Nov 04. 2022

나의 어느 시절

오늘의 마음 (8)

옷을 하나 버렸다. 버리면서 이 옷을 언제 샀던가 곰곰이 되짚어 보니 10 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원래도 비싸지 않은 옷인데 세일을 해서 꽤나 괜찮은 가격에 샀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매해 가을이면 꺼내 입었다. 무릎까지 오는 길이감도 좋았고 촉감도 괜찮았고 입었을 때 불편함도 구김도 없어서 좋아하는 옷이었다. 이런 옷을 야상이라고 부르는 건가, 아무튼 짙은 색을 가진 그 가을 외투는 자주 꺼내 입고 자주 세탁을 했고 가을에 찍힌 사진에도 자주 등장했다. 올해도 그 외투를 꺼내 입으면서 그때까진 전혀 버릴 마음이 없었다. 올해도 잘 입고 지나가면 내년에도 또 꺼내 입겠지...라는 생각을 했으니까.

     

어느 저녁, 뜻밖의 시간이 생겨 백화점에 갔다. 주섬주섬 서둘러 챙겨 입고 나와서는 엄마에게 선물할 옷들을 둘러봤다. 겨울이 가까워오자 유독 캐시미어 종류의 옷들이 많이 보였다. 손때 하나 묻지 않은, 구김 하나 없이 말끔한 새 옷들을 둘러보다 맘에 드는 옷을 나한테 대봤다. 거울을 보는데 새 옷 사이로 삐죽- 나의 최애 가을 외투 자락이 삐져나왔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그 옷이 너무 낡아 보였다. 잦은 세탁에 물도 좀 빠진 것 같고 오래될수록 예쁜 빈티지한 그런 느낌도 없는 데다 그냥 낡아 보였다. 새 옷과 비교하니 당연히 그래 보이는 걸 텐데, 백화점 조명이 워낙 밝으니 작은 결점도 크게 보이는 걸 텐데 유난히 옷이 미워 보였다. 낡았다고 다 미운 건 아닌데, 그리고 사실 낡은 것도 아닌데, 좀 오래된 멀쩡한 옷인데, 새 옷을 실컷 담았던 내 눈에 그 가을 외투가 낡게 비친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는 그 가을 외투를 옷걸이에 걸지 않았다. 대충 접어서 바닥에 뒀다. 내일 꼭 버려야지 하고는 드레스룸을 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그 옷을 버렸다. 옷 하나 버리는 건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나의 어느 한 시절이 지나간 느낌, 그 시절이 이제는 멀어지고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그 옷을 입고 촬영을 가고, 답사를 가고, 좋아하는 친구와 커피를 마시고, 주일이면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고 그 순간들을 남기려 사진을 찍었던... 지금보다 훨씬 어렸고 생기 넘쳤고 일과 사람, 감성적인 것들에 쓸 에너지가 충분했던 어느 한 시절. 그 시절이 자연스레 지금의 나와 멀어진 기분이, 생각이 들었다.      


그 옷을 끌어안고 있었던들 그 시절이 고스란히 내 품에 생생하게 안겨 있을 리도 만무하지만, 기억과 추억이 많은 옷 하나를 버리니 그 시절이 아득해지는 이상한 기분은 며칠을 갔다. 옷 하나 버린 건데, 나도 참 별별 생각을 다 한다 싶다가도 이렇게 글로 풀어내니 이상한 기분도 훌훌 털어지는 기분이 든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자 이제, 어떤 옷을 또 버릴까. 그때는 또 어떤 기분이 들까 궁금해진다.  

작가의 이전글 대파와 버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