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마음 (10)
막내가 찾아왔다. 한참 만에 온 연락이었고, 얼굴을 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내가 일을 그만둔 지 2년이 지났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것도 1년 이상은 됐으니 말 그대로 오랜만이었다. 만나기로 한 카페 앞에 빼꼼히 얼굴을 내민 막내는 수더분한 차림새와 순진한 웃음이 여전했다. 아이들이 돌을 맞았단 소식을 들었고, 꼭 선물을 하고 싶었다며 선물상자를 건넸다. 나를 기억하고 찾아온 것도 기특한데, 아이들 돌 선물까지 챙긴 마음이 놀랍도록 고마웠다. 무려 열여섯 살이나 많은 수더분하지도 순진하지도 않은 메인작가, 그것도 현업을 떠난 선배가 뭐 좋다고 스스로 찾아왔을까, 그리고 이렇게 선물까지 건넬까... 나한테 이렇게 호의를 건네는 막내의 마음이 너무 기특하고 고마웠다. 붙박이처럼 내내 지키고 있던 자리를 떠나서일까, 막내작가와의 뜻밖의 만남은 꽤 소중하게 다가왔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던 순간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막내작가와 처음 만났던 순간도 그렇다. 비가 내리던 여름이었고 늦은 오후였다. 나를 비롯한 작가와 피디들이 줄지어 앉아있던 공간에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스물다섯 살의 청춘, 긴장한 탓인지 더위 탓인지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고, 연한 빛깔의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동글동글 빛나던 눈빛도 기억나는데, 면접에서 어떤 질문과 대답이 이어졌는지는 또렷이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렇게 송골송골 땀이 나던 스물다섯 살의 청춘은 우리 팀의 막내가 됐다.
나를 포함한 기존 작가 셋과 막내는 그리 오래지 않아 손발을 척척 맞췄고, 눈치도 있는 편이라 일하기도 수월했고, 인맥도 다양해서 섭외할 때도 덕을 많이 봤다. 함께 일하고, 커피 마시고, 여유가 있을 땐 드라이브도 함께 가고, 짧은 나들이도 다녀오는 등 친밀하게 일했다. 막내에게는 첫 번째 사회생활이었고, 처음 만나는 사회 사람들이니 나는 좋은 기억을 주고 싶단 생각이 아주 조금은 들었다. 내가 일을 그만두기로 하고 마지막 식사를 하던 날, 막내는 나에게 편지와 작은 선물을 건넸다. 다른 말은 다 생각 안 나지만, 막내가 써준 ‘제가 만난 가장 좋은 어른 중 한 분’이라는 말이 아직도 생각난다. 어른이라는 말은 낯설었지만, 고마웠다. 어쩌면 그 말은 진심이 아니라고 의심을 해도 될 법한 ‘사회에서 만난 공적인 사이’지만, 나는 의심은 섞지 않고 그대로 믿기로 했다. 그만둘 즈음, 복잡하고 옹졸하고 이기적인 관계와 마음들에 상당히 지쳐있던 터라 그 말은 나에게 엄청나게 큰 위로가 됐었다. 그 위로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각자 사느라 바빴다. 가끔 메시지를 주고받고, 소식을 듣긴 했지만 얼굴을 보고 지내지는 못 했다. 2년여 만에 나의 마지막 막내작가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러니 그 마음이 너무 예쁘고 고마워서 나는 꼭 기억하고 싶었다. 언젠가 막내에게도 누군가의 만남을 통해 고마움을 느껴야 할 순간이 온다면 내가 꼭 반가운 도움을 줘야지... 하는 다짐을 나는 꼭 기억해두고 싶다. 조금이라도 나를 좋은 사람이고 싶게끔 만드는 고운 사람들에게 나도 꼭 고운 마음과 도움을 건네야지... 올해는 더욱 그렇게 지내야지 하는 마음을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