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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바람 Aug 31. 2023

익숙한 곳으로 도망치기

오늘의 마음 (14)

오래 봐서 친숙하고 마음에 익은 것들을 좋아한다. 사람도 그렇고, 공간도 그렇다. 낯설고 새로워서 신기한 마음보다는 익숙하게 눈에 익은 것들이 훨씬 마음을 편하게 한다. 그래서 이사를 가도 한동안은 예전 집과 동네를 그리워하고, 카페나 식당도 가던 곳만 가게 된다. 유독 마음이 지치거나 피곤한 날에는 더욱더 익숙한 곳을 찾게 된다. 그런 날에는 혼자만 있을 수 있는 익숙한 곳을 찾게 되는데, 그곳이 나한테는 자동차 안이었다.      

혼자 살아본 적이 없으니 집에서도 혼자가 아니고, 다들 퇴근을 했더라도 사무실에서도 혼자는 아니다. 밤을 새워 회사를 지키고 일하는 이들이 다른 층에 늘 있기도 하고, 불쑥 사무실에 들어오는 야근러들도 있으니까. 혼자서 좋아하는 카페에 간다 한들 사람들과 부대끼기 마련이고, 오롯이 혼자일 수 있는 공간은 차 안이었다. 종종 퇴근길에 차에 올라 시동도 안 걸고 가만 앉아서 쉬곤 했다. 주차장은 어두웠지만 회사라는 공간 안이다 보니 무서울 일도 없고, 적당히 혼자 있기 좋은 곳이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냥 흘러가게 두기도 하고 붙잡아서 골똘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밤하늘에 뜬 달을 봤다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가, 불 켜진 사무실 창문을 보기도 했다가, 늦은 퇴근을 하는 누군가를 보기도 했다가... 그렇게 저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이상하게 충전되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냥 혼자,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에, 누가 뭐랄 사람 없이 가만히 머무는 것이 좋았다. 하루 종일 누군가와 부대끼다 보면 오롯이 혼자일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그럴 때 차 안은 좋은 휴식처가 돼줬다. 특별히 다투거나 신경을 곤두세워 대립하거나 하는 일 없이도, 그냥 웃고 대화하고 일하고 커피 마시는 것만 해도 에너지가 전부 소진될 때가 있다. 그럴 땐 혼자서 가만히 있는 시간이 꼭 필요했다. 내가 가진 작은 자동차 안에서 나는 집에까지 갈 에너지를 충전했다.     

 

지금은 출퇴근을 하지 않으니 운전할 일이 거의 없다. 혼자서 차에 머물 시간도 사실 없다. 그래도 나는 혼자만의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이 필요했고, 집안에서도 그런 공간을 만들었다. 잠깐이라도 혼자 가만있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 필요했다. 안방 베란다에 의자를 가져다 두고 가만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가끔은 책을 보기도 한다. 그리고 드레스룸 한편에 작은 테이블을 두고 생각나는 것들을 적거나 짧은 기도를 하기도 한다. 그냥 베란다고, 그냥 드레스룸이지만 나는 그곳을 내 공간으로 정했다. 지칠 때 그곳으로 도망가 있으면, 한결 나아진다. 별거 아니지만, 도망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면 좀 낫다. 그래봐야 엎어지면 코 닿을 곳, 안방 베란다, 안방 드레스룸이라는 게 좀 웃기기도 하지만, 난 익숙한 게 좋은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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