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마음 (15)
창을 열어뒀더니 이제 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어떤 바람은 가끔 그 계절의 향을 싣고 오기도 한다. 짧은 순간, 바람에서 가을 냄새가 났다. 그러면서 지난가을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치듯 지나갔다.
지난가을엔 종종 주방 옆 세탁실에 나가있곤 했다. 세탁실 창은 세찬 비가 오는 날이 아니라면 거의 열어두는 편이다. 그곳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는 에어프라이어가 다 돌아가길 기다리거나, 땡-하고 종료음이 울린 에어프라이어에서 잘 구워진 고기나 생선을 접시에 담곤 했다. 얼마 되지 않는 그 짧은 순간이 묘하게 좋았다. 세탁실은 문을 닫으면 집 안에서 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이가 울어도, 보채도, 남편이나 엄마가 어르고 달래는 소리도 사실 잘 안 들린다. 잠깐의 단절. 잠깐의 도망 같은 거였는지도 모른다.
그 가을엔 왜 그렇게 마음이 조급했을까, 왜 그렇게 전전긍긍 긴장한 채로 지냈을까. 아이를 키우는 일이 처음이었고, 지친 몸과 맘을 회복하고 다독일 새 없이 매일의 육아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게 나를 늘 긴장하게 했다. 나를 늘 전전긍긍하게 했다. 좀 더 느긋하게 편하게 지내도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해 보지만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 한들 나는 똑같이 종종거리며 보냈을 것 같다.
그렇게 마음 졸이며 지냈던 지난가을의 날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 가을의 공기와 바람 내음이 그대로 다시 돌아온 듯했다. 나는 조금 더 여유로워졌을까. 나는 조금 더 느긋해졌을까. 곰곰이 되짚어본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고 꽤 긴 시간을 나는 혼자서 보낸다. 감기를 달고 살고 병원문턱이 닳도록 드나들고 몇 차례 입원을 하기도 했고 보채고 드러눕고 아니야, 싫어, 하지마를 곧잘 듣고 지내지만 그래도 그 가을보다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계절의 바람이 드나들 만큼 좁았던 마음이 아주 조금은 넓어졌다. 그래, 그 가을보다는 한결 낫다. 그래, 그 가을보다는 한결 말랑해졌다, 내 마음이.
이 가을엔 계절이 짙어지는 걸 천천히 지켜보며 바라보며 지내야겠다. 아이들과 함께 한 세 번째 가을이 서서히 짙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