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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seul Kim Apr 21. 2016

까만 피부를 가진 한국전의 용사들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이야기

솔로몬의 후예라 불리는 에티오피아. 그 뿌리만큼이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에티오피아 정교회(옥토도스)의 교인이다. 에티오피아에서 으리으리한 정교회와 하얀 천을 둘러쓴 사람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이유다.


옥토도스는 선행과 구제를 중요시 여긴다. 때문에 교회 주변은 자비를 구하는 걸인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그 걸인들 중 한 사람이 바로 한국전 참전용사인 Girma Bazabeh(그르마 베자브)이다.


그르마 할아버지는 가족도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지내왔다. 마음씨 좋은 한 여성할아버지를 돌보아 주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오해가 생겨 쫓겨났다. 갈 곳 없던 할아버지가 결국 찾은 곳은 Nazaret(나자렛) 지방의 옥토도스 교회였고 그곳에서 구걸을 하며 생활을 이어왔다.


다행히도 2011년 9월부터 시작된 참전용사 영예금 지급사업으로 월드투게더와 인연을 맺은 할아버지는 매달 5만원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적은 돈이지만 할아버지에겐 유용하게 사용됐을 것이다.


교회에서 구걸을 하신다는 이야기에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지만, 지방에 거주하시는 분들에겐 계좌이체로 돈을 드리기에 별다른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9월 초 즈음 할아버지가 사라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 단체에서 할아버지를 데려가셨다는 것이었다. 핸드폰도 없으셔서 연락할 방도가 없었기에 답답한 상황이었다. 계속 연락이 안 된다면 후원이 끊길 수도 있었기에 답답함이 더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찾을 방도가 없었기에 사실상 포기 상태였다.     


그렇게 한 달 즈음 흘렀을까? 영예금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메크혼에게서 그르마 할아버지를 찾았다는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르마 할아버지를 찾은 곳은 장애우들과 노인들을 무료로 돌보아주는 기관인 ‘메케도니아‘(Mekedonia)’였다. 알고 보니 틈틈이 지방을 돌며 걸인들을 데려오는 기관장이 우연히 할아버지를 발견하고 기관 쉼터로 데려온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그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된 경로도 기적적이었다. TV 프로그램에서 메케도니아와 함께 ‘나자렛에서 온 참전용사’라는 타이틀로 그르마 할아버지가 소개된 것이다. 메크혼의 어머님께서 우연히 그 프로그램을 보시고는 메크혼에게 말씀해주신 덕에 계신 곳을 알 수 있었다. 메크혼과 메케도니아가 개인적인 인연이 있던 탓에 바로 연락을 취할 수 있었고, 그 다음달엔 할아버지를 직접 만나 영예금도 드릴 수도 있었다.


그르마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 과정은 굉장한 우연 아니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더 이상 구걸하지 않고도 안전한 곳에서 지내실 수 있게 된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60여 년 전 머나먼 아프리카 땅에서 건너와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 희생했던 에티오피아의 용사가 지금은 저리도 초라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고 민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르마 할아버지를 직접 만나 뵈었을 때도 반가운 마음보다 죄송한 마음이 더 컸다. 생기라곤 느낄 수도 없이 침대 위에 멍하니 누워계신 할아버지의 모습이, 살림살이라며 보여주신 한 봉지의 옷더미가, 걸으실 수 없어 휠체어에 의존하시는 모습이 마음을 짓눌렀다.      

노란 봉투 하나가 살림살이의 전부다

 

아마 이 같은 사례는 비단 그르마 할아버지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영예금을 지급해드리러 가정방문을 다닐 때면 정말이지 좁고 더러운 집에서 어렵게 살아가시는 참전용사 분들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영예금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참전용사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이 사실상 거의 없었다고 한다. 너무 늦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60년만에야 그 은혜를 조금씩이나마 갚아가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참전용사에 대한 관심은 극히 낮다. 나조차도 이곳에서 오기 전까지는 그들에 대한 별다른 지식도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느끼는 거지만 뭐든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우리가 지금과 같은 삶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60년 전의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전용사 할아버지들을 만날 때면 영예금을 지급해주는 한국 정부에 감사하다면서 한국을 축복해주시곤 한다. 하지만 사실 먼저 감사해야 할 건 우리다. 참전용사 할아버지들의 일방적인 감사가 된다면 그마만큼 씁쓸한 일은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할아버지들의 건강은 악화되고, 매달 2-3분씩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의 삶에서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기억이 자랑스러움이 될 수 있도록, 먼저 감사하는 그리고 기억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충 ! 성 !

                                                                                                         





위의 글은 2013년 10월 작성했던 에세이다. 안타깝게도 그르마 할아버지는 14년 12월 경 돌아가셨다. 지난 해 한국으로 돌아올 당시 살아계셨던 참전용사는 약 260명. 벌써 일년이 지났으니, 더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지 않았을까 싶다.


이 글을 쓰며,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협회장 할아버지와 나눴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나의 말에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언젠가 에티오피아로 온다면 다시 만나자. 그 때까지 내가 살아있다면.." 그 당시엔 할아버지에게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그런 말씀 마시라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에티오피아에서 2년간 있으면서 돌아가신 분만 70명. 지난 달에 반갑게 만났던 분이 다음 달엔 영원히 잠들어 있기도 하고, 영예금을 드리러 방문했는데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기도 했다. 내 머릿 속에 떠오르는 할아버지들이 여전히 살아계실지 나는 알 수 없다. 그저 살아계시리라 믿으며 추억할 뿐.


1950년, 한국이라는 작은 땅을 지키기 위해 낯선 땅을 밟았던 까만 피부의 용사들. 그들의 희생을 매일 같이 기억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잊지는 않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이 글이 그들을 기억하는 계기가 되기를 조심스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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