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 라우흐, 팀 아이텔, 틸로 바움게르텔
해당 글은 인디포스트에 기고한 미교열 원고의 일부입니다. 기고 전문은 인디포스트(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지난 세기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전통적 회화에 있어서 아주 커다란 위험이었다. 그 존재 가치가 흔들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오늘날 회화는 여전히 건재하고, 나아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우울한 낭만주의’를 실천하는 신 라이프치히 화파(Neue Leipziger Schule)가 있다.
우울과 낭만은 서로를 감싸기에는 꽤 먼 개념이다. 하지만 신 라이프치히 화파로 불리우는 이들의 회화 작업을 두고 ‘우울한 낭만’ 혹은 ‘낭만적인 우울’을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우울과 낭만이 만드는 역설적인 공간 사이에서 부유하는 공허함, 무력함 그리고 차분함을 살펴보자.
라이프치히 화파는 라이프치히 미술 대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하고 작업 활동을 한 작가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1989년 독일 통일을 기준으로 라이프치히 화파와 신 라이프치히 화파로 구분되는데, 이는 화파 내부 세대를 구분하는 용어임과 동시에 새로운 라이프치히 회화의 탄생을 이야기한다. 1세대와 2 세대 라이프치히 화파의 명맥을 이은 신 라이프치히 화파는 오늘날 회화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크다. 이들은 앞선 세대가 그랬듯이 전통적 매체인 회화를 고집한다. 회화의 가장 기본인 물감과 캔버스를 사용하며 여전히 전통적 회화가 건재하다는 것을 선보인다.
네오 라우흐(Neo Rauch), 팀 아이텔(Tim Eitel), 틸로 바움게르텔(Tilo Baumgärtel)은 신 라이프치히 화파의 대표 작가이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라이프치히 회화 특유의 색채와 구도 속에서 오늘날 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1960년 출생으로 신 라이프치히 화파로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그는 혼란스러웠던 80-90년대에 라이프치히 화파 2세대이자 신 라이프치히의 선구자로 불리는 아르노 링크(Arno Rink)로부터 회화를 배웠다. 그의 작업에는 자신이 경험했던 사회와 그 시대의 혼란함이 냉소적으로 담겨있다. 무엇보다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공간 및 인물의 구성과 함께 강렬하게 대비되는 색채는 특유의 긴장감을 유발한다. 이는 통독 이후 변화하는 주변의 사회 및 경제 환경으로부터 작가 본인이 느꼈던 불안함을 반영한다.
한편, 추상이 아닌 구상 회화를 고집하는 작가는 캔버스 위에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킨다. 작가는 그림 속에서 인물을 가만히 세워 놓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화려하게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절제된 움직임을 통해서 긴장감을 유발한다. 더불어, 이들은 서로가 얽히며 예상치 못한 새로운 이야기를 생산한다.
팀 아이텔은 지난 2011년과 2017년 국내의 학고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지며 한국에 처음 소개 되었다. 특유의 색채, 사색적 풍경 그리고 인물이 빚어내는 미스테리함으로 외국 컬렉터 뿐만이 아니라 국내의 미술 애호가들에게도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었다. 회화를 전공하기 이전에 그는 슈투트가르트 대학교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이로부터 얻게 된 인문학적 사고 방식과 시선은 이후 작가의 작업 주제와 접근 방식에 많은 영향을 줬다.
그는 현실의 풍경을 화폭에 덤덤히 담아낸다. 특히 사회에서 소외 당하는 이들이 남기고 간 공간 속 흔적을 그림림 속에 옮긴다. 이는 관객에게 이 그림을 보러오기까지 지나친 주변의 풍경을 다시 한 번 돌아보기를 은유적으로 권한다. 이는 단순히 회회가 재현적 능력을 가졌을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기능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더불어 작가는 사색적인 풍경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을 함께 배치하여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공허함이 부유하는 배경 속에 존재하는 인물은 그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이는 그림 속 인물이 특정인이 아니라 이를 외부에서 접하는 관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이러한 장치를 통하여 현대인에게 사색의 순간을 제공한다.
드레스덴 출신이 틸로 바움게르텔 또한 94년부터 98년까지 아르노 링크 교수에게 전통적 회화를 사사했다. 그는 졸업 이후 라이프치히의 슈피너라이(Spinnerlei)에 작업실을 두고서 작업 활동 중이다.
그의 회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몽환적 색채이다. 화폭을 가득 채우는 몽환적인 색채와 그 조합은 서로를 감싸며 경계를 허문다. 때문에 마치 추상 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는 전통 회화의 구상적 특징을 분명히 한다.
그림에 담긴 인물과 물체는 경계가 허물어질만큼 부드러운 색채의 영향 속에서도 그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덕분에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가 구성한 기존의 내러티브 위에 관객이 만든 이야기가 덧붙여지면서 그림 속에는 새로운 세상의 이야기가 존재하게 된다.
또한, 그림 속 초현실적 분위기는 시공간의 정적인 개념을 지워버린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도, 고정적인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날 사회가 요구한 시공간의 변화와 적응을 향한 작가의 비판과 냉소가 담겨있다. 그는 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그림을 선초현실의 단계로 끌어올려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우울과 낭만을 회화라는 언어로 표현한 이들의 작업은 단순히 경험의 재현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할 수 없다. 오늘날 신 라이프치히 화파의 그림에는 현대 사회의 척박한 분위기와 급변하는 사회상에 지친 우리의 모습이 비춰진다. 이들이 선보이는 우울과 낭만은 새로운 시대와 그 맥락 위에서 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