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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미 Dec 26. 2021

눈덩이가 내려앉는 슬픔, 4.3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문학동네


제주의 겨울 속 눈과 바람이 그리고 어둠이 낯설지 않아서인지, 눈내리는 제주의 겨울에 이 책을 시작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읽는 내내 유난히 아프다.

4.3을 잘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서사구조였지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그 슬픔이 너무 가슴아파서 그 슬픔이 눈덩이처럼 쿵쿵 내려앉았다. 제주방언에 대한 각주가 있었으면, 정심의 이야기가 좀 더 깊게 설며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덕분에 제주의 4.3을 더 깊숙히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12p 처음 그 꿈을 꾸었던 밤과 그 여름 새벽 사이의 사 년 동안 나는 몇 개의 사적인 작별을 했다. 어떤 것들은 나의 의지로 택했지만, 어떤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며 모든 걸 걸고라도 멈추고 싶은 것이었다.


15p 그렇게 죽음이 나를 비껴갔다. 충돌할 줄 알았던 소행성이 미세한 각도의 오차로 지구를 비껴 날아가듯이. 반성도, 주저도 없는 맹렬한 속력으로.


17p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31p 사는 곳이 멀어지고 각자의 굴곡을 통과하는 동안 만남의 간격이 차츰 벌어졌다.


33p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처거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 밟아간다 해도 더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 


35p 목수가 된 것이 놀랍긴 했지만 위태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44p 특별한 미인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녀가 그랬다. 총기 있는 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성격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어떤 말도 허투루 뱉지 않는, 잠시라도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 때문이 거라고. 인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혼돈과 희미한 것, 불문명한 것들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이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치막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 있었다.


129p 내가 느끼기에 이 섬이 바람은 마치 배음처럼 언제나 깔려 있는 무엇이었다. 거세게 몰아치든 온화하게 나무를 쓸고 가든, 드물게 침묵할 때조차 그것의 존재가 느껴졌다.


147p 서까래와 나무 창호들의 틈으로 가느다른 비명 같은 바람소리가 쉴새없이 파고들어, 실내의 정적이 오히려 또렷하게 느껴진다.



#작별하지않는다 #한강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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