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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아토르 Jun 01. 2021

"끔찍한 모래지옥"을 지나

김영하, <아이를 찾습니다>

*소설 속 내용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김영하, <아이를 찾습니다>, <<오직 두사람>>, 문학동네, 2017


 실종 아동을 찾는 전단지가 여전히 거리 곳곳에 보이는 2021년. 비가 오는 봄도 여름도 아닌 밤에, 한 시사프로그램에서 친부모를 찾는 한 입양인의 사연을 보다가(끝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 앞에서 그녀는 울었다.), 김영하의 <아이를 찾습니다>를 떠올린다. 다시 읽어보는 김영하의 <아이를 찾습니다>.


 작가 이야기부터 해본다. 내 인생에는 김영하 주간이라고 불릴만한 때가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김영하의 소설 <검은꽃>을 읽고, 나는 그의 모든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의 전작을 챙겨보게 되었고, 그가 늘 말하듯 나의 내면에는 그 소설들이 그려낸 무늬들이 나도 모른 채 새겨져 있을 터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장편 소설은 <검은꽃>이고, 가장 좋아하는 단편은 <아이를 찾습니다>이다. 두 작품은 모두 김영하 소설의 주된 성격과는 좀 다르게 덜 시니컬하고, 덜 위트있다. 무겁고, 지난하며, 간절하다. 어떤 쪽이든 그는 설명할 수 없고 가닿을 수 없는 삶에 대해 이리저리 소설의 방식으로 에둘러 말할 뿐이다. <아이를 찾습니다>는 모두가 머물러 있는 시간과 공간과 감정을 넘어선 어떤 결락에 관한 이야기다.


 아이를 잃어버리고 간절하게 찾는 부모의 이야기는 그 깊은 슬픔이 공감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못하더라도(겪어보지 않고는 절대 모를 그럴 종류의 감정이므로), 우리가 이해하고 상상해봄 직한 경계에 서 있는 감정과 서사들이다. 하루아침에 아이가 사라지고, 그 불행이 많은 가정과 삶을 파괴했음을 우리는 신문에서, TV에서, 소설에서 목도한다. 그리고 그 무수한 실종 전단 속 아이들이 다시 부모의 곁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도 우리에게는 너무 자명한 것이다. 김영하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그렇게 크나큰 고통과 모든 파괴와 무수한 바람, 그다음에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리고, 그들의 하나뿐인 바람이 이루어진 다음, 아이를 찾은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소설은 대형 마트의 풍경에서 시작한다. 윤석과 미라가 아들 성민을 잃어버린 그 날. 윤석은 신형 핸드폰에 대한 설명을 듣느라 잠시 카트를 손에 놓았고, 미라는 금방 화장품을 사러 다녀왔을 뿐이다. 그러나 그 찰나에 아들 성민을 태운 카트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찰나에 그들의 모든 것이, 앞으로의 인생 전부가 함께 사라질 줄은 그때 그들은 전혀 몰랐다. 아이를 찾는 것만이 목적인 십일 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그들은 아이를 찾아야 했기에 그 전에 그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직업, 가족, 안락한 집, 일상. 전단지가 잠식한 집에서 윤석은 조현병을 앓고 있는 미라와 견디고 있다.


 십일 년 만에 아이를 찾았을 때, 윤석은 말한다. 걱정할 것 없다고. 진짜 가족에게 돌아왔으므로, 금방 회복될 것이라고. 그 낙관은 얼마쯤은 어리석고, 얼마쯤은 슬프다.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사실, 아이를 찾아 헤맨 세월이 십일 년이라는 사실. 그동안 아이는 자신의 친부모가 따로 있다는 것은 모른 채 살아왔다는 사실. 찰나의 시간이 만들어낸 틈은 이제 그 찰나보다 훨씬 더 길고 깊어서, 도무지 다물어질 수가 없다.


 ‘실종된 아이의 아빠’로만 살아온 윤석은 ‘성민의 아빠’가 되는 방법은 모른다. ‘종혁’이로 살아온 성민은 ‘성민’이 될 줄 모른다. 윤석이 일을 나가고, 성민이 PC방에 있던 어느 날 밤, 산을 헤매던 미라는 실족사한다. 세 가족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지만,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윤석은 마지막 선택지로 성민과 함께 고향으로 떠나고, 고등학생이 된 성민은 어느 날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년 후, 성민과 함께 사라졌던 여자아이가 윤석을 찾아온다. 성민이 자신이 모은 돈을 가지고 떠났다고, 윤석이 돈을 챙겨주러 들어간 사이, 평상에는 갓난아이가 놓여져있다.


 소설은 언제나 한 인물이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겪고, 그 사건 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 가장 간절하게 해피엔딩을 바랄 수밖에 없는 이 소설의 사건은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소설의 기능을 수행한다. 돌아갈 수 없다. 돌이킬 수 없으므로 모든 것은 엉망이 되어버린 것일까. 모든 것이 무너진 삶, 오로지 하나의 바람, 이 일이 잘못된 이유를 바로잡는 것. 아이를 찾는다면 해결될 줄 알았던 모든 것은 그러나 그 사건이 만들어낸 틈을 메우고 시간과 삶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잔인하게 보여준다. 김영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다면 또다시 비관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상실과 파괴는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떤 불행을 맞은 사람에게 “이제는 잊으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은 그리 쉽게 해도 되는 말이 아니다.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그러니까 잃어버린 아이를 되찾는 방식으로도 그 상실과 파괴가 만들어낸 틈을 메우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무언가를 잃어버린 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윤석이 미라에게 바랐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에 이어주는 것일 테다. “끔찍한 모래지옥”을 어떻게든 지나갈 때까지.


 다만, 끔찍한 모래지옥을 지나고 그 기억이 온몸과 마음에 상처를 낸 채로도 계속되는 삶에서 나는 낙관을 애써 찾아본다. 윤석에게 다시 찾아온 어린 생명에게서. 해맑게 웃고 있는 작은 생명에게서. 윤석은 지난 시간의 상처를 결코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은 생명이 커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순간마다 지난 시간의 상처가 쓰릴 것이다. 그러나 그 작은 생명이 커나가는 시간 동안 그는 또 얼마간은 시간을, 생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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