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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아토르 Jun 04. 2021

거대한 관대 속의 나를 찾아서

* 소설 속 내용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김애란, <나는 편의점에 간다>, <<달려라 아비>>, 2005.


 자주 찾던 가게의 사장님이나 아르바이트생이 나를 알아보기 시작하면 그 가게에 발을 끊는다는 SNS 속 떠도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많은 사람이 공감의 댓글을 달았던 것 같다. 며칠 전 종종 가는 카페에 들렀다. 내가 카운터로 향하자마자 점원이 말했다. “아메리카노 2잔이시죠?” 그분은 반갑게 웃었고, 나도 환히 웃으며 그렇다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 카페에 앞으로 다시는 안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지만, SNS 보았던 사람들의 반응과 오래전 읽은 단편소설 하나가 떠올랐다. 김애란의 <나는 편의점에 간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소설집 <달려라, 아비>에 수록되어 있다. 제목마저도 유쾌한 책. 등단부터 화려한 주목을 받아온 김애란의 첫 소설집이었다. 2005년에 이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그녀가 2003년 등단부터 써 온 단편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내가 이 소설집을 처음 읽은 건 그녀가 등단한 지 10년쯤 지난 2013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재밌다”로 요약될만한 이 소설집은 그때 10년 전 이야기로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세태를 잘 담고 있었고, 문체는 유쾌했으며, 시선은 산뜻하고, 이야기는 참신했다.


 그녀가 20대의 썼던 소설들을 10년이 지나 20대의 여성 독자인 내가 읽고, 그 여성 독자가 이제 30대가 되어 그 소설들을 다시 읽어본다. 소설을 읽는 것은 단지 내용을 읽는 것만은 아니다. 작가와 독자, 그리고 책이 지나온 시간이 독서의 과정 속에 함축되어 있다. 그때와 같고 또 다를 느낌을 위해 나는 책을 펼친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의 ‘나’는 서울 어느 동네에서 자취하는 20대 초중반의 여자이다. 그녀는 필요한 모든 것이 있고, 가치의 교환이 깔끔하게 성립하며, 누구든 물건을 사러 올 수 있는 편의점을 종종 찾는다. 그녀의 말대로 편의점은 고객을 가려 받지 않고, 고객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는 ‘거대한 관대’가 가능한 곳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관대는 침묵과 무관심으로 지속 가능하다. 학교, 전공, 나이, 가족관계 등 현대인의 사회적 자아를 규정하는 프로필들을 모르는 몰개성 속에서 ‘거대한 관대’가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동네에 있는 편의점들과 포장마차에서의 의도하지 않은 대화들이 오고 간 이후, 그러니까 나를 규정하게 되는 말들이 오고 간 이후에는 그곳들을 찾지 못한다.


 그렇게 그녀는 꼭 필요한 말만 오고 가는 ‘큐마트’의 단골이 된다. 그런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파란 조끼의 청년이 나를 알고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녀가 편의점에서 물건이 아니라 일상을 사듯이, 내가 사는 물건으로 말미암아 그가 나의 일상을 알지도 모른다는 ‘착각’. 고향에서 올라온 동생에게 키를 전달해 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하러 간 ‘나’는 자신이 그동안 구입한 품목을 이야기하며 이래도 정말 나를 모르겠냐고 말하지만, 청년은 말한다. “손님, 죄송하지만 삼다수나 디스는 어느 분이나 사가시는데요.”


 ‘나’는 상상한다. 한 여자가 몇 개의 편의점이 바라보고 있는 거리에서 사고를 당하고, 편의점 주인들이 기억하는 여자는 저마다 다르다. 그리고 그 상상처럼 실제로 한 학생이 사고를 당한 그 순간. 피해자는 풍경처럼 전시된다. 패밀리마트의 사장은 그 학생이 담배를 훔치다 스스로 달아났다고 말하며 흥분한다. 사건과 연루되지 않고 싶다는 마음에서였으리라. 큐마트의 청년은 교복 치마가 올라가 팬티가 다보였다고 말한다. 청년이 나간 사이 매대에서 복권을 훔친 파란 모자를 쓴 청년이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 여학생에게 다가가 교복 치마를 내려준다. 절망을 훔친 청년 외에는 누구도 학생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2002년의 연말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의 풍경은 2021년의 어느 동네의 풍경이라 해도 다를 것이 없다. 편의점으로 대표되는 현대 자본사회의 편리성과 익명성은 이제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안하다. 내가 원치 않는 타인의 소음을 지우면서 나는 물건을 사는 행위에 오롯이 집중하고 외려 일상을 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상품들로 나의 정체성 일부를 채워간다. 그리고 그 익명성과 편리성으로 말미암은 단절도 이제는 익숙하다. 비정한 이웃의 이야기는 도처에 널렸다. 각자 일방향으로 맺은 관계 속에서 나는 지워지고, 누군가의 사고에도 선뜻 다가서는 이가 없다.


 오랜만의 읽은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10년 전보다는 좀 더 복잡한 심정을 불러일으킨다. 이제는 몰개성으로 유지되는 공간과 개성의 전시를 요구하는 공간이 더욱 강력하게 공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익명성에 가려져 오히려 더 편안히 나의 사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편의점과 카페 같은 공간들. 나만의 취향과 개성을 공개하여 정체성을 확인받지만 때로는 그것이 더 몰개성처럼 느껴지는 SNS들까지. 어쩌면 이제 자본이 요구하는 몰개성과 개성은 그 경계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자본은 자본이 원하는 방향으로 언제든 몰개성과 개성을 유도할 수 있으므로. 무엇도 묻지 않는 공간에서 커피를 마시라고, 인스타에 올리기 위한 감성적인 물건을 사라고.


 그러니 그 몰개성과 개성의 줄다리기 속에서 정신 차려야 하는 것은 잔인하고 무겁게도 개인일 수밖에 없다. 타인에게 사생활을 묻지 않는 예의의 선을 잘 지키는 것, 그럼에도 위험에 처한 타인에게는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 나의 일상을 잘 영위하고, 나의 취향이 나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가끔은 들여다보는 것. 나와 타인을 그렇듯 적절한 선과 예의 속에서 돌보는 것만이 이 무섭고 거대한 관대 속에서 삶을 지키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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