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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아토르 Jun 09. 2021

환대에 대하여

백수린, <여름의 빌라>

* 소설 내용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백수린, <여름의 빌라>, <<여름의 빌라>>, 2020.

* 글의 제목은 데리다의 책 <환대에 대하여>에서 빌려왔습니다.


 백수린의 소설집 <여름의 빌라>는 서점에서 마주치더라도 눈길이 머무를 아름다운 표지를 갖고 있다. 평온하고 안온하고 아름다운 수채화 같은 풍경은 이 소설집의 글들이 얼마간 달콤할 수도 있겠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 그것은 착각이다. 백수린은 오히려 그 '안온한 풍경' 속 미세하고 강렬한 균열들을, 견딜 수 없는 모순들을, 그럼에도 견뎌야 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숙명을 그리는 데 몰두한다. 경계에 선 자들을 통해 이쪽과 저쪽의 풍경을 묘사하고, 선뜻 어느 쪽으로도 발 내디딜수 없어 모순으로 가득한 삶을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내내 펼쳐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복합적인 갈등과 인생이란 참으로 단순하지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단연 표제작 <여름의 빌라>이다.


 <여름의 빌라>는 서술자인 '주아'가 '베레나'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주아는 대학 시절 배낭여행을 하던 중 독일인 부부 베레나와 한스를 만나 따스한 환대를 받는다. 그 이후 그녀는 남편인 기호와 함께 기호의 박사과정을 위해 베를린에 오년간 체류했다. 한국에 돌아온 주아와 기호가 시간강사 자리를 전전하며, 마땅한 미래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베레나는 주아에게 캄보디아 시엠레아프로 휴가를 보내러 오라고 제안한다. 기울어져가는 기호와의 관계를 회복할 희망을 품고 그곳으로 떠났지만, 휴가는 기호와 한스의 언쟁으로 어색하게 마무리 되고 만다. 


 기호와 한스는 캄보디아인의 삶에 대해 상이한 인식을 보여준다. 그들은 그들의 위치에서 행복한 것이라는 한스와 동물원의 구경거리와 같은 삶이 행복할 것이라는 것은 기만이라고 말하는 기호. 이들은 정치적, 경제적, 인종적 차이에 서서 말하는 듯 보이지만, 이면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들의 휴가 이후 베레나가 보낸 편지를 통해 한스와 베레나가 그 여행 직전 테러로 인해 딸을 잃었음이 밝혀지고, 한스와 베레나가 캄보디아에서 보였던 태도와 눈물은 평화로운 일상의 삶과 폭력이 없는 조화로운 세계에 대한 바람이었음이 드러나면서 문제는 보다 복잡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한스 또는 기호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주아가 고백하듯, 무엇을 옳은지 확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주아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오히려 주저하고, 경계하고, 모순을 직시하고, 모순을 품고 살아간다. 겉으로는 안온해보이지만 가장 마음이 들끟는 것은 주아일지도 모른다. 주아는 침수된 마을을 보는 것에 불편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는 자신의 양가성을 인지한다. 기호의 생각에 일부 동의하면서도 기호가 마치 우리는 지구 상의 어떤 나라의 비극에도 개입하지 않은 나라의 일원인 양 말하는 것에 멈칫한다. 결국 한스와 베레나, 기호가 모두 원하는 것은 누구도 폭력에 희생당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기꺼이 환대하는 세계이지만 그들을 둘러싼 세계의 수많은 조건은 그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어쩌면 가장 단순한 마음이었을 바람이 인종, 계급, 경제적 계층, 종교, 정치적 견해 차이 등을 둘러싸고 옳고 그름의 문제로 향하면서 타자의 환대를 어렵게 만든다.


 소설의 마지막, 주아는 베레나의 손녀 레오니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레오니는 돌멩이로 네모를 그려 원숭이집을 만든다. 한 캄보디아 소년이 레오니와 주아와 함께 놀고싶었는지 다가오지만, 주아는 어떻게 두 아이를 대해야 할 지 모른다. 그 때 주아에게 작동된 생각들은 어른들의 기준일테다. 하지만 레오니는 그저 선을 지우고, 새친구를 받아들여 새롭게 넓어진 선을 그릴 뿐이다. 이렇게 아직 세상의 어떤 기준도 학습하지 않은 소녀와 소년만이 무조건적인 환대에 이른다. 그들은 친구가 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 사이의 인종, 경제적 불평등, 성별 등은 그들의 테두리에 아직 새겨지지 않았다. 그저 온전한 존재로서, 타자를 타자로서, 그 고유성을 인정하며 친구가 되는 법을 아이들은 안다.


 이 결말은 한편 마음에 들면서도, 한편 씁쓸하다. 요원하고 불가능해보이기 때문이다. 소녀와 소년이 자라면서 그 마음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어른들이 쉽게 소녀와 소년의 무해한 마음을 갖기 어렵듯이, 그들은 그 마음을 유지하기보다 자신만의 테두리를 지닌 어른으로 자라는 편이 쉬울 것이다. 그것은 특별히 어른들이 나빠서는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늘 나의 선택과 주어진 선택들로 이루어지기 마련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길은 대체로 나에게 편견과 선입견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모든 삶을 선택해 살아보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무언가가 확고해질 수록, 무언가를 확실히 배제하기 마련이다. 살아가면서 경험을 하고 배운다는 것은 언어를 얻는 일이다. 그리고 언어를 얻으면 얻을 수록 테두리는 더욱 강력해져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누군가를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내가 지나온 세월, 그만큼의 편견과 선입견의 더께를 뚫어야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요원하다고 포기해서도 안될 일이다. 한스와 기호의 언쟁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벌어진 일이 아니던가.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쌓았다가도 자꾸 허물어보는 일이다. 나의 경험만이 전부가 아님을, 나의 생각만이 옳지는 않음을. 세상 저편에, 혹은 바로 내 옆에, 전혀 다른 삶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는 것. 함부로 연민하지 않되, 함부로 배제하지도 않는 것. 그리고 자꾸 테두리를 지워보는 것. 그리고 그 테두리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보는 것. 그렇게 너와 나의 테두리가 서로서로 경계를 넓히다보면, 세계의 빈 공간들 마저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그 빈 공간 속에 외롭게 서있던 이들에게도 환대의 장소가 생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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