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높고 느린 용서>
* 소설 내용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조해진, <높고 느린 용서>, <<환한 숨>>, 문학과 지성사, 2021.
'미투운동'의 여파는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문학계, 언론계, 방송계, 정치계, 학계 등 여러 곳에서, 거의 모든 곳에서 성범죄가 권력관계를 볼모로 자행되고 있었음이 밝혀지고, 성범죄를 덮기 위해 위계질서에 의한 권력관계를 가해자들이 얼마나 비열하게 이용했는지 드러났다. "왜 바로 저항하지 않았는가?"라는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아직도 하는 자가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성범죄는 범죄 중 유일하게 사회와 대중이 피해자에게 그 책임을 묻고, 피해자가 범죄를 당한 사실에 의해 수치심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용인"되어 왔다고. 이는 사회 인식과 사법 체계를 비롯한 모든 것이 기울어진 젠더 권력 속에 있다는 방증이라고. 때문에 미투운동의 피해자들은 그들의 용기어린 투쟁 속에서 2차 가해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싸웠고, 여전히 싸우고 있으며, 더디더라도 변화가 일고 있다.
그런 와중에 조심스럽게 나 역시도 들었던 생각이 있다. 가해자의 가족의 삶. 미투운동의 경우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때로 그 가족들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매스컴을 타서 유명한 경우도 있었다. 도망치듯 목숨을 버린 가해자들도 있었기에, 그런 소식이 들리는 날에는 더욱 피해자의 해소되지 못한 상처와 함께 가해자 가족에 대한 생각도 고개를 들던 날들이 있었다. 물론 여전히 피해자의 고통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게다가 가해자의 죽음으로 인해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도 못한 채, 상대 없는 싸움을 지속해야 함을 생각할 때 가해자 가족에 대한 생각은 어쩌면 '굳이' 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해진 작가의 <높고 느린 용서>는 참으로 용기 있고 섬세한 소설이다. 성범죄의 가해자인 대학교수가 용서를 구하는 대신 '증발'을 선택한 이후, 남은 그의 딸들과 피해자간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두루 갖춘 소설이다. 피해자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가해자 가족을 함부로 비난하거나 동정하지 않는다. 다만, 용서와 사죄가 누구의 몫인가를 묻는다. 이 얽혀버린 관계의 매듭을 풀기 위한 적확한 태도일 것이다.
효진과 경진의 아버지는 대학교수였고, 자신의 제자를 추행한 성범죄자가 되자 '증발'을 '선택'했다. 피해자는 한순간에 사죄 받을 대상을 잃었고, 효진과 경진은 아버지를 -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 잃었다. 효진과 경진은 생각한다.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결혼을 계획 중인 경진은 언젠가 자신의 아이가 외할아버지에 대해서 알게 되면 어떡하냐고 언니인 효진에게 묻는다. 자신의 아이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람으로 자랄까봐 경진은 걱정한다. 그들의 아버지가 한 비겁한 선택이 자매에게는 죄책감으로 대물림된 탓이리라. 효진은 피해자인 Y씨에게 용서를 구하는 메일을 보낸다.
실은 귀하와 귀하의 여동생을 종종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귀하의 짐작보다는 자주 그랬을 거예요. 귀하의 연락이 놀랍고 반가우면서도 바로 답장을 하는 건 쉽지 않더군요. 귀하가 동생을 생각해서 제게 그런 부탁을 하기까지 어떤 질감의 고민을 했을지 잠작됐으니까요. 아니, 어쩌면 우리 각자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애쓰며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제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용서란 무엇인가요? 저에게 용서는 그 사람이 저만큼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을 표현하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 고통에는 저에 대한 미안함뿐 아니라 그 자신을 향한 부끄러움이 포함되어야 하고요. (...) 사과를 받은 적 없고 앞으로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한 제가 용서마저 내어준다면, 그럼 제게는 무엇이 남는 겁니까. 저는 무슨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까.
Y씨에게 답장을 받은 효진은 "이제와서 불쌍한 척 연민을 강요"한 자신을 스스로 비난한다. 가해자의 가족이 피해자에게 죽은 가해자를 용서해달라는 메일을 보냈다. 뻔뻔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Y씨는 효진과 경진 역시 스스로의 잘못이 아닌 죄책감의 무게를 견디며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또한 동시에 '속죄'와 '용서'가 누구의 몫인지를 분명히 이야기한다. '속죄'는 가해자의 몫이다. '용서'는 피해자의 선택이다. 그러나 비겁하게 증발해버린 효진의 아버지는 자신의 몫을 다하지 못했고, 그러므로 피해자가 용서를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딸이라고 하여, 효진과 경진이 대신 피해자에게 속죄할 수 없다. 효진과 경진을 이해하지만 그 때문에 피해자가 그들의 아버지를 용서할 수는 없다.
구름은 아주 느리게, 높은 곳에서 천천히 이동 중이었습니다. 그제야 오랜 장마가 끝났다는 것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귀하, 어딘가에서 저의 용서도 그런 모양으로 오고 있지 않을까요? (...)
동생 분에게 전해 주세요. 당신의 삶은 그저 당신의 것이니 제 용서 없이 떳떳해도 된다고, 아니 그래야 한다고, 자격이라는 혹독한 심문에 더 이상 걸려 넘어지지도 말라고요. 동생 분이 행복하게 결혼을 하고 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귀하가 저 대신 곁에서 용기를 주세요. 그리고 귀하도 이제 그만 자유로워지기를, 저는 진심으로 바랍니다.
Y씨는 두번째 편지에서, 어쩌면 그에 대한 자신의 용서가 구름처럼 높고, 느리게 올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그녀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또 아버지 대신 짐을 지고 사는 두 자매에 대한 배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두 자매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당신의 삶은 그저 당신의 것이니 제 용서 없이 떳떳해도 된다"라는 말을 전한다. 아마 이 말을 듣고도 두 자매는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하겠지만, 자유로워지기 위한 노력을 하기 위해 용기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이 편지를 읽으며, 그 말을 Y씨에게도 되돌려주고 싶었다. 떳떳하게, 자유로워도 된다고.
비겁하고 나쁜 자들의 무책임한 선택이 죄 없는 사람들을 어떠한 지옥으로 몰았는지를 너무 담담하게 서술한 이 소설은 읽는 내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하지만 함부로 단정짓지 않는 조해진 작가의 문체와 태도 덕분에 소설 속의 애쓰는 사람들을 어떠한 판단 없이 그저 바라볼 수 있었다. 선뜻 다루기 어려운 이야기를 높고 느린 구름처럼 분명하고도 담담히 써준 작가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피해자의 고통은 타인이 짐작하기 어렵고, 함부로 짐작해서도 안될 것이다. 때문에 이 소설 역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쓰여졌을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과 이 소설이 투영하는 여러 실제 사건들에 대해 내가 어떠한 첨언을 하는 것이 자칫 함부로 내뱉는 부연이 될 것 같아 글을 쓰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스스로 되새기기 위해 쓴다. 용서의 주인과 속죄의 당사자가 누구인지 직시하기 위해서. 지난한 투쟁을 지지하고 연대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