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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Mar 03. 2024

이혜미 에세이 <식탁 위의 고백들> 리뷰

샛별BOOK연구소

<식탁 위의 고백들>, 이혜미 에세이, 창비, 2022.(220쪽)

 책 속의 글들이 식탁에 차려진 음식처럼 맛깔스럽다. 소개한 식재료들은 몽글몽글 따스하다. 읽을수록 문장들이 사랑스러운 에세이 한 권을 만났다. 양파와 당근과 복숭아 등등의 식재료를 살갑게 소개한다. 식재료를 대하는 마음이 별빛처럼 만져진다. 사진도 좋고, 재료를 다듬는 태도의 동작도 고우며,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손길이 아름답다. 


  처음에는 가볍게 읽다가 점점 읽기가 아까워지고, 다음에는 어떤 재료를 어떤 말로 담아낼까 궁금해지는 책이다. 읽을수록 마음이 촉촉해진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생각난다. 세상을 깊숙하게 들여다보는 시인의 섬세한 마음이 푸릇푸릇하다. 




혀끝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처럼

은밀하고, 사랑스럽고, 새콤달콤한 에세이

뒤표지





'당근이라니, 외계에서 온 식물이 분명하다. 

당근은 자신이 어마어마한 색깔의 몸을 가졌다는 걸 알까? 보이지도 않는 땅속에서 왜 그렇게 엄청난 색깔을 지니게 된 것일까. 도무지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한 당근의 색상은 이 채소가 외계문명이 보낸 교신탑이라는 음모론을 믿고 싶게 한다. 땅속에 옹기종기 모여 우주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당근들... 그들은 사실 인간을 감시하러 파견된 스파이다.' (p.22)



'채반이나 깨끗이 씻은 도마에 토마토를 펼쳐놓고 가장 볕이 잘 드는 자리를 골라 놓아둔다. 잘린 단면을 들여다보면 기이하고도 규칙적인 무늬가 술렁인다. 펼쳐 내놓은 첫날은 단면마다 물기가 돌고, 둘째날이 되면 가장자리에 귀여운 톱니들이 생기며 말라간다. 셋째날쯤 되면 드디어 작은 종지 모양으로 완전히 말라 도마 위를 굴러다닌다. 이렇게나 조그마한 그릇들이라서. 자신의 안쪽을 향해 짙어지는 향과 빛들이라서.'(p.41)



'퍼져나가는 달콤함. 복숭아를 생각하면 조금만 스쳐 도 멍들 준비가 된 육체 같고 언제든 손목을 타고 흐를 소문 같아서 극도의 예민함과 자포자기의 마음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가느다란 솜털을 잔뜩 세우고 웅크린 작고 유약한 짐승. 아름답거나 무너지거나, 완벽하거나 망가지거나. 두가지 선택지만 있다는 듯이, 복숭아의 이분법에는 완벽주의자들의 강박 같은 단호함이 느껴진다.'(p.57)



"양파는 겹겹의 침묵을 원으로 쌓은 것"(정현우 '파랑의 질 서,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창비 2021 부분)이라는 적절한 정의는, 하루 종일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 의해 분명해진다. 침묵을 오래 머금은 입속은 달고 어두웠다. 말들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낳아 자신 안에 품었다. 양파는 러시아의 전통 인형인 마트료시카와 닮았다. 몸 안에 든 몸. 계속해서 겹쳐지는 독백들. 마트료시카의 가장 안쪽 인형은 열어봐선 안 된다는 러시아 속담이 있다. (p.97)



'헤아리고[料] 다스린다(理)는 요리의 핵심은, 다루는 재료의 물성을 조심스럽게 파악하여 그 본질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다독이는 것에 있다. 무엇도 자신 아닌 것으로 달라지기는 어려우며 재료 간의 뒤섞임, 부추김, 파고들, 친교와 분열 등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사건들에 따라 다른 상황 속에 놓일 뿐이다. 그것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합일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대신 이염되기ㅡ즉 물들기, 자신을 지키면서도 타인에게 젖어드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107쪽)



가지를 자르듯

저녁이 내린다. 


가지는 어둠으로 빛을 감싸 매끈하게 묶어둔 일인용 우울 같다. 미끄러운 껍질을 밀듯이 썰면 할 수 없다는 듯 푸석하게 잘리는 가지는 속내. 껍질에서 묻어난 짙은 보라색이 안쪽으로 조금 물든다. 밤이라는 질긴 외피에 갇힌 잠처럼, 막 잊히려는 중인 새벽꿈처럼. (154쪽)




인생에서 가장 큰 폭설을 만난 순간을 기억하시지요? 우리가 거쳐온 장면들은 무의식 속에 머무르다 문득 떠올리는 순간 다시 솟구쳐 휘몰아칩니다. 오래 기억하는 것들은 멀어지더라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시작된 눈송이가 하루를 온통 뒤흔들어놓는 것처럼. 오늘의 눈사람이 시간을 건너 매 계절 다른 모습으로 돌아옴을 믿는 저녁입니다.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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