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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트루 Jun 05. 2019

슬픔은 때론 느리고 강렬하게 찾아온다 <하나레이 베이>

브런치 무비 패스#7

*스포일러와 영화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의 후원을 받아 관람한 후기입니다.




그녀는 매년 비슷한 시기에 똑같은 바다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책을 본다.
바다엔 들어가지 않으며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고 오직 책만 본다. 그녀의 아들을 뺏어간 바다는 여전히 아름답기만 하다.
그렇게 10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다.



불친절하지만 따뜻한 영화

<하나레이 베이>는 올해 전주 국제 영화제의 '시네마 페스트' 부문에 초청된 작품으로 우리에겐 익숙한 일본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인 <도쿄 기담집>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짧은 단편 소설을 무려 1시간 30분이라는 긴 호흡의 영화로 어떻게 표현했는지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이 영화는 조금 불친절하다.


보통의 영화와 달리 <하나레이 베이>는 특별히 클라이맥스로 추정되는 사건이나 인물들 간의 대화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 같진 않다.
전적으로 이 작품의 주인공인 사치(요시다 요)를 통해 모든 것을 표현하는 영화다. 그녀가 걷는 걸음걸이, 서 있는 모습과 표정, 숨을 내뱉는 호흡 그리고 바다를 비롯한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더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듯하다.   

그럼에도 <하나레이 베이>는 결국 따뜻하다.
불친절한 메시지 전달 방법은 오히려 관객들이 사치에게 좀 더 집중하게 만든다. 극 초반에서 후반으로 갈수록 변화되는 그녀의 감정을 더욱 세심하게 캐치하게 도와준다. 그리고 비운의 사고로 아들을 잃은 그녀가 이상하리만치 무덤덤할 땐, 오히려 우리는 모두 그녀가 흔들리길 바란다.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울지 않는 그녀를 보며 이제는 삭막한 평온함이 어서 깨지길 바란다. 그렇게 <하나레이 베이>는 관객이 사치에게 위로의 손길을 건네게 만든다.



미워도 다시 한번, 미워도 사랑하니까

그도 그럴 것이 사치는 한 마디로 팔자가 기구하다. 원치 않은 임신으로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지만 마약 중독자가 된 남편은 다른 여성과 잠자리를 나누다 죽는다. 남은 아들인 타카시(사노 레오)와는 잘 지내지 못한다. 타카시가 아빠의 유품인 워크맨을 듣고 있을 땐 매몰차게 뺏어 던져버린다.

서로 감정의 줄다리기를 하며 날카로운 말을 주고받는다. 그래도 아들이기에 그가 원하는 서핑을 위해 서핑 보드를 사주고 살짝 미소 지어 본다.
그리고 아들은 하와이에 있는 하나레이 베이에서 서핑을 하다 상어에게 오른쪽 다리가 잘려 죽는다.

사치에게는 남은 것이 없다. 남편도 죽고 아들도 죽었다. 그녀에게 남아있는 건 오직 부재의 자리다. 하지만 사치는 남편이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죽었을 때도 울지 않는다. 영화 속 그녀의 모습은 무서울 만큼 냉정하고 덤덤하다.



그녀에게 아들의 핸드 프린팅을 가져가라는 카우아이 섬의 사람들에게도 자신은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들의 소지품을 전부 한 곳에 넣어 보이지 않게 보관한다. 그렇게 그녀는 마치 아들의 죽음을 상자에 넣어 보관하면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그녀는 아들이 죽은 하나레이 베이만큼은 떠나지 못한다. 매년 아들이 죽은 시기에 찾아와 아들을 뺏어간 바다 앞에 앉는다.
사치는 "나는 아들을 굉장히 싫어했지만 사랑했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엄마이기에 아들을 미워했어도 역시나 사랑했다. 이제는 하나의 의식처럼 그녀는 매년 아들이 죽은 바다를 찾아온다. 마치 죽은 아들을 찾아오는 것처럼.
따뜻한 말 한마디와 미소 한 번 건네진 않지만 이렇게 하나레이 베이에 오는 것만으로 아들을 생각하며 그녀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인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사치는 덤덤하게 아들의 죽음을 잘 넘긴 것 같지만 밀려오는 파도처럼 결국 그녀는 터져 나오는 슬픔을 막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우리가 바라던 대로 매우 흔들리기 시작한다. 10년 치의 슬픔이 그녀를 덮친다.



차근차근 과거의 슬픔과 이별을 마주하다

그날도 사치는 어김없이 비치 의자를 가지고 바다 앞에 앉아 책을 본다. 그러다 두 명의 아들 또래와 비슷한 일본인 서퍼를 만난다. 그리고 마주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아들이 겪었을 그들의 세계와 서핑이라는 세상을 경험하고 조금씩 아들을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듣게 된 하나레이 베이에 나타난 '외다리 서퍼'의 존재. 사치는 그 어느 때보다 동공과 감정이 흔들린다.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장장 10년이 걸린 만큼 그 과정은 쉽지 않다. 해변을 정처 없이 걷는다. 아들이 아닐 걸 알면서도 찾고 있는 외다리 서퍼의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한다. 미친 사람처럼 해변을 헤매는 사치. 아들의 환영이라도 보고 싶은 걸까.
외다리 서퍼에 대해 묻고 다니다가 아들이 묵었던 숙소를 찾아간다. 그리고 숙소 주인에게서 아들의 사진을 받아온다. 그리고 보게 된 활짝 웃는 아들의 사진. 잔인할 만큼 눈부시게 활짝 웃는 아들을 마주한다.

그날, 결국 사치는 아들의 핸드 프린팅을 들고 집에 온다. 그리고 옷장 속과 가방 속 물건들을 모두 집어던진다. 마치 그녀 안에 있던 분노와 슬픔을 꺼내 던지듯이.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들의 핸드 프린팅 위로 포개진 그녀의 손. 한 방울 눈물이 떨어지고 이내 쉴 새 없이 떨어진다. 드디어 아들을 마주했다는 것처럼 그녀는 좀처럼 눈물을 멈출 수 없다. 왜 이제 왔냐고 말하는 아들에게 왜 그렇게 갔냐고 묻는듯한 엄마의 모습은 애절하다 못해 속시원하다. 결국 그녀는 그렇게 과거의 슬픔과 이별을 비로소 마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어보는 아빠와 아들의 워크맨 속 흘러나오는 노래. 영화 초반에 나오던 신나는 팝송이지만 그녀의 귀를 통해 듣는 팝송은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듣다가 이내 눈물이 한가득 고이는 그녀의 표정을 통해 우리는 안도한다.
아빠와 아들의 죽음 후에 결국 그들이 남긴 노래를 듣는 그녀의 마음은 어떨까. 아무리 미워했지만 죽음보다 차라리 내 옆에서 남아있길 바라는 마음은 어떨까. 그들은 죽었고 부재하지만 남아있는 그들의 흔적을 따라가며 그녀는 결국 그들의 존재를 기억해본다.



슬픔은 때론 늦게 그리고 강렬하게 찾아온다

상실로부터 시작되는 <하나레이 베이>는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가 올 수 있다고 말한다. 사치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제대로 마주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어머니이자 한 여인을 통해 슬픔과 거짓된 위로에 잠식되는 것이 아닌, 그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결국 진정한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과정을 매우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이별을 경험한다. 물론 모든 이별의 슬픔은 같지 않다. 시기도 상황도 이유도 모두 가지각색이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를 찾아오는 건 확실하다. 다만 다른 건 그 이별의 슬픔을 제대로 마주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 슬픔을 마주했다면 상실감은 강렬하게 찾아오지만, 위로와 치유의 순간도 분명히 찾아온다. 과정은 아주 느리고 차근차근 진행되기도 한다. 사치가 아들을 미워했지만 사랑하고 아꼈던 만큼.



사치가 움직이지 않는 나무를 있는 힘껏 미는 장면은 원작에는 없다고 한다. 감독은 왜 그 장면을 넣었을까 추측해본다. 이별과 슬픔은 외면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나무처럼, 밀어도 밀어도 꿈쩍 않는 나무처럼 말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라.' 그래야 비로소 마음 한 구석 자리에 있었던, 숨겨놓았던 케케묵은 슬픔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니 누군가가 이별과 슬픔에서 잠식되어있다고 절대 다그치거나 보채지 마라. 우리에게는 긴 시간이어도 그 사람에게는 충분히 마땅한 시간일 것이다. 어차피 우리에겐 이런 문제들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에게 왜 나아가지 못하냐고 묻는 건 결국 자신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으니.
그렇게 애도는 단 한 번이 아닌 몇십 년의 과정일 수 있다. 그러니 죽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라지지 않는 존재에 대해 미워하고 원망하지 말기를.

슬픔은 때론 늦게 그리고 강렬하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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