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작디작은 공간이었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결혼식과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우리의 보금자리는 6평이 채 안 되는 원룸이었다.
그래도 그 안에 주방과 화장실, TV 그리고 거실이자 우리의 침실이 있었고 식탁도 있었다.
대림역 근처 오피스텔에서 살던 그 시절, 하남에 당첨된 행복주택 입주 전까지 잠시 머무는 집이었지만 우리 둘만의 첫 보금자리였다. 가족과 친구 하나 없는 낯선 곳이었지만, 서로의 직장과 가까운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 터를 잡았다.
정말 좁았지만 신혼의 달콤함은 공간의 크기를 잊게 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부딪히는 거리감이 오히려 좋았고 작은 집 안에 웃음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 행복한 시간이었다.
얼마 안돼서 우리는 행복주택으로 이사했다. 6평에서 11평으로 거의 두 배가 된 집이었다.
단 하나였지만 방이라는 게 생겼고, 주방과 거실이 명확하게 나뉘어있었다. 베란다가 있어서 화분을 기를 수도 있었다. 정말 신혼부부에게 딱 맞는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의 집은 물론이고 이케아, 한샘 그리고 리바트 등 모두가 알만한 곳을 발품 팔며 돌아다니며 집을 채웠다. 11평은 신혼부부의 설렘과 기대만으로 이미 꽉 채워졌고 서로의 취향과 애정이 구석구석 묻어났다.
우리는 그곳에서 행복한 신혼을 즐기며 집 주변의 상권과 나무가 자라는 걸 보면서 어느새 우리의 아이도 자라는 걸 보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의 성장은 나무보다 훨씬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키가 훌쩍 자라고 어느새 집안을 뛰어다니며 장난감을 흩뿌렸다. 11평은 금세 좁아졌고 우리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이사를 가야 한다. 집을 넓혀야 한다.
그렇게 우리의 이사 프로젝트는 다시 시작됐다. 우리는 친정과 가까운 김포로 정착하기로 했다. 평일과 주말을 반납하며 하남과 김포를 오가며 임장을 다녔다. 하루에 많게는 4개 이상의 집을 보며 어디가 어디고 이게 본 집이 맞는지 헷갈리게 될 때쯤, 우리는 운명의 집을 만났다.
남편과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 그 순간,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난생처음 남편과 나는 부동산 매매계약서를 작성했고 그때 처음으로 난 진짜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부동산 매매계약서를 안주 삼아 남편과 들이켰던 쓰고 달콤한 소주 한 잔은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대출금은 여전히 버겁지만, 엄연히 ‘우리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정신없이 짐을 정리하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인테리어 AS를 받으며 더 넓어진 집에 적응하다 보니 어느새 1년이 지났다. 4계절을 온전히 ‘우리 집’에서 보냈다는 사실, 상상 그 이상으로 짜릿하고 감격스러웠다.
어느새 낯설던 동네는 이제 우리의 동네가 되었다. 처음 이사 와서 먹던 식당이 아쉽게 문을 닫는 것도 지켜보았다. 작은 변화들이 켜켜이 쌓여 이 집은 단순한 벽과 기둥이 아닌 우리의 시간을 담은 배경이 되었다.
1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대출과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여기가 온전한 우리 집이라는 사실이 모든 걸 버티게 한다. 대출과 함께 살아도, 여기가 우리 집이다.
이 집에서 밥을 짓고 빨래를 널며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본다. 그 평범한 하루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이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우리의 삶을 품는 그릇이 되었다.
물론 언제 다 갚을까 막막한 순간도 있다. 그러나 그 무게마저 우리 삶을 이루는 일부다.
그럼에도 매일 아이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불 켜진 창문 속에 우리 셋이 함께 있는 이 집은 분명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리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