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끝, 겨울이 다가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기 시작하니 길거리에서 파는 따끈따끈한 풀빵이 간절해지는 요즘이다.
투박한 틀에 묽게 반죽한 밀가루를 붓고 달짝지근한 팥소를 무심하게 툭 얹어 불 위에서 뒤집어가며 만들어지는 풀빵을 지켜보고 있으면 냉큼 입 속으로 넣고 싶은 조급함도 생기지만, 그보다 추운 겨울 한 떨기 국화꽃처럼 강인한 시장에서 국화빵을 파시던 친구의 어머니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어릴 적, 언어 장애가 있던 친구의 어머니는 5일에 한 번씩 열리는 장날이 되면 구불구불하게 나 있는 먼 거리를 하루 장사치, 풀빵 재료가 담긴 리어카를 끌고 와 풀빵 중에서도 국화꽃 모양의 작은 국화빵을 파셨다. 시골이지만 꽤 장이 크게 열려서 늘 사람들로 북적됐던 시장 입구 한쪽에 자리를 잡아 장사를 하시곤 하셨는데, 아쉽게도 오래 하지는 않으셨기 때문에 나는 커가면서도 친구의 어머니가 파셨던 그 국화빵이 그리웠다.
80년대 후반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시절, 친구네는 많이도 가난해서 아주 작은 방 두 칸짜리 스레트 지붕의 작은 집에 살았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나는 건 가끔 친구네 집에 놀러 가 방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던 친구의 아버지 영정사진이다.
친구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영정사진 속 남자는 삼십 대쯤으로 젊어 보이셨는데 아주 선해 보이시는 얼굴로 옅은 미소를 짓고 있어서였는지 슬프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젊은 날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고인에게서 느껴지는 엄숙함보다는 갑작스럽게 닥친 비보에, 가지고 있던 사진을 확대해 만든 영정사진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친구의 어머니는 장애인이자 그렇게 세 아이를 홀로 키우는 젊은 나이에 소위 말하는 과부가 되셨다. 외형은 작고 아담한 체구였는데 무척 강인하셨고 부지런하셨으며 항상 밝으신 분이셨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태어나실 때부터 말을 정확히 못하셨던 건 아니라고 했다.
친구의 외가 쪽에서는 어머니의 장애를 고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친구의 어머니는 늘 단정하신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웃으며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하시는 분이셨는데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늘 귀를 쫑긋 세우고 "밥 먹었냐고?", "어디 가는 중이냐고?" 등의 어떤 느낌적인 말로 의사를 확인했고 친구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으며 마음을 전하곤 하셨다.
하지만 손끝이 야물어 음식을 굉장히 잘하셨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어머니는 늘 그냥 돌려보내던 적이 없으셨는데 먼 거리를 놀러 왔다가 그곳까지 다니는 버스가 없어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눈에 밟혀 매번 밥상을 차려주셨다. 어머니의 음식은 항상 정갈했고 깔끔했다. 비록 반찬의 가짓수가 많지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고기도 없었지만 무척 맛있게 먹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그중에서도, 친구의 어머니가 만들어내던 풀빵에는 뭔가 특별함이 있었다.
그 시절에도 붕어 모양을 한 배가 뽈록한 붕어빵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국화 모양의 풀빵, 당신을 꼭 닮은 작고 예쁜 국화빵을 주로 파셨다. 항상 팥을 듬뿍듬뿍 넣고 구워낸 통통한 국화빵은 적당히 달고 부드러웠다.
친구의 어머니는 뭐든 허투루 하는 것이 없으셨기 때문에 팥소를 만들고 밀가루로 반죽을 할 때 모든 정성을 쏟았을 것을 안다. 어렴풋이 친구에게 어머니가 장이 열리기 전 재료를 준비하기 위해 들이던 공과 시간이 기억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어쩌면 그 맛을 잊지 못하는 것은 친구 어머니의 정성과 함께 비록 언어 장애로 인해 정확하지는 않은 발음일지라도 환하게 웃으시며 하나라도 더 먹으라던 손짓과 몸짓이 국화꽃처럼 아름다웠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크게 손짓으로, 크게 몸동작으로 당신의 마음과 정을 나눠주시던 친구의 어머니께서 - 시원치 않은 벌이에도 생계를 위한 장사로 국화빵을 선택했던 건 당신을 닮았던 소박하지만 정이 담긴 먹거리였기 때문이리라.
추워지는 날씨, 아련한 옛 추억에 따끈따끈한 국화빵이 그리워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