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라모트 <쓰기의 감각>을 읽고
나는 요즘 작가들의 이야기에 푹 빠져있다. 그들의 작품 속에 펼쳐진 세계가 실존하는 것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워서, 창조주의 머릿속은 어떨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쓴 칼럼과 인터뷰와 팟캐스트에서 나눈 대화들에서 그들이 책상에 앉아 자판과 씨름하고 있었을 시간들이 그려졌다. 무엇이 그들을 계속 쓰게 하는지, 어떻게 쓰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치밀었다. 그래서 글쓰기를 시작하는 사람을 위한 교본으로 꼽히는 책인 <쓰기의 감각>을 꺼내 들었다.
저자 앤 라모트는 작가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글쓰기를 배우는데, 그가 말하는 글쓰기는 매일 쓰는 것으로 시작한다. 잘 쓰는 것이 아니라 매일 달리기를 하듯 글쓰기 근육을 다져나가는 것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근육이 자랄 수 있도록 단백질을 보충하듯, 많이 읽으면서 내 안의 이야기를 중요하다. 정세랑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애벌레처럼 많이 읽고 축적해 놓으세요. 당장 뭐가 안 되어도 그게 다 재산이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장르의 닮고 싶은 작가들이 쓴 글을 몸속에 가득 축적하면, 어느 순간부터 쓸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고전들,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100 읽으면 1은 분명 쓸 수 있어요. 꽃잎에서 향수를 추출하듯 말이에요."
"얼마간은 매일매일 써라." 아버지는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다.
"글쓰기를 피아노의 음계 연습하듯이 해라. 너 스스로 사전 조율을 하고 나서 말이다. 글쓰기를 체면상 갚아야 할 빚(노름빚)처럼 다루어라. 그리고 일들을 어떻게든 끝맺을 수 있도록 헌신해라."
그는 수감자들과 나에게 매일 조금씩이라도 종이에 쓰도록 가르쳤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최대한의 명작과 희곡을 읽도록 시켰다. 시를 읽으라고도 했다. 그는 우리가 보다 대담해지고 독창적이 되기를, 그리고 자발적으로 실수를 범하는 인간이 되기를 원했다. "실패하지 않으려고 너무 안간힘 쓰느니, 차라리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까지 실패해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라고 한 카툰 작가 제임스 터버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맞는 말인지를 역설했다.
사실 작가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싶어 진 것은, 창작자로서의 욕구가 커졌기 때문이었다. 글쓰기를 진지하게 시작하면서, 나는 책뿐 아니라 드라마, 영화 등의 창작물을 보면서 작가의 마음을 생각했다. '내가 상상으로 창조한 세계가,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이 누군가의 마음속에 자국으로 남는다는 거. 정말 대단한 일이겠다. 내 이야기가 영상으로 실현된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작가가 되는 환상에 마음이 부풀었다. 그런 내게 앤 라모트의 한마디는 뼈를 때렸다. 다음은 평생을 작가로 살아온 앤 라모트가 시작하는 지망생들에게 하는 이야기다.
아무리 글쓰기에 능숙해지고 책과 이야기에 기사를 많이 발표한 작가가 된다 하더라도, 글 쓰는 일이 그들이 바라는 것을 모두 충족시켜 주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다. 그것은 결코 세상이 마침내 자신의 특권을 확인해 준다든가 정말 인정받는다든가 하는 느낌을 주지 않을 것이다. 나의 작가 친구들은 (한 트럭이 넘는다) 조용한 만족감으로 기뻐하는 경지에 도달해 본 적이 없다. 그들의 얼굴을 보면 대부분 정서 불안에 고생한 흔적에 놀란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방취제 스프레이 테스트를 받은 실험실 개의 표정과 비슷하다.
우리는 출판 이후의 외부로부터의 인정, 성취감을 기대하며, 길고 지루한 창작과 퇴고의 과정을 넘어서려고 한다. 하지만 평생을 전업 작가로 살아온 앤 라모트에 따르면, 책이 출판될 가능성이나, 재정적인 안정을 얻을 확률, 심지어 기쁨을 얻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인생의 행복과 완성을 생애의 작품을 완성하는 걸로 간단히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글을 완성함으로써 오는 혜택들보다, 글쓰기 자체가 기쁨이자 놀이가 되는 경지에 오르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어느 순간 글쓰기 자체의 기쁨보다도, 창작을 통해 세계의 주인이 된 것 같은 마음을 누려보고 싶은 욕심이 더 커진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글로 영향력을 끼치고 싶은 욕망 말이다. 문득 이것은 비단 글쓰기의 영역에서 겪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를 좇느라 과정의 즐거움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날들이 있었다. 취업 준비생 때는 나에게 꼭 맞는 조직을 찾으면 행복할 거라는 기대에 매일을 버텼다. 신입 사원 시절, 퇴근 후에도 인간관계와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가 얽힐 때면, 언젠가 해외 취업을 하면 이 고민들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간절히 원했던 것들을 얻게 된 후에는 또 다른 여정이 시작되었다. 꿈에 그리던 일자리를 손에 쥐었을 때의 기쁨은 2주도 가지 않았다. 내가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한 계단의 끝이었을 뿐이지, 다시 그 앞의 계단을 올라야 했다. 아무리 간절히 원하던 목표를 얻더라도, 내가 살아있는 한 계속 또 다른 도전이 주어지는 것이었다. 성취를 욕망하는 사이클에서 벗어나는 대신, 목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매일 글쓰기를 완성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결과만큼이나 중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어떤 글을 완성하는 일보다 단지 글쓰기 자체를 원하는 경지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쓰고 있는 일 자체를 바라는 경지 말이다. 피아노나 테니스가 좋아서 그것을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왜냐하면 글쓰기는 그 자체로 너무나 많은 기쁨과, 너무나 많은 새로운 도전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인 동시에 놀이이다. 자기만의 책이나 이야기를 쓸 때, 그들의 머리는 아이디어와 통찰력으로 활발하게 돌아가기 시작하고, 전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들 이바라 보고 듣고 배우는 모든 것은 물방앗간의 곡식이 될 것이다. 칵테일파티에 가거나 우체국에서 줄을 설 때도, 그들은 사소한 순간을 놓치지 않을 것이고 사람들이 하는 표현을 엿들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들을 얼른 메모하고 싶어서 사람들 몰래 줄에서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써야 할까.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마땅한 아이디어도 없고, 딱히 추진력이랄 것도 없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한숨이 나왔다. 앤 라모트는 한 가지 희망을 전한다.
내가 새로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좋은 글쓰기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종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의 진실을 알고 있다. 바로 나 자신. 내가 경험한 삶과, 내가 배운 것. 나만 아는 진실이 있다.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P.S 앤 라모트의 이야기가 재밌으셨다면, 꼭 Ted Talks 에서 발표한 영상 도 들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사과집님의 브런치에서 앤 라모트를 알게됐고, 테드 영상도 접하게 되었는데요. 인자한 할머니 같으신 느낌이었는데 날카로움과 동시에 유머러스하고 감동적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