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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Sep 05. 2019

좋아하는 것을 잘할 수 있도록

이건 내가 예상한 불안이었으니까

요즘 가끔 고장난 메트로놈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이를테면 <비긴 어게인3>에서 악동뮤지션 이수현이 아틀란티스 소녀를 부르는 것을 보며 청량한 보이스와 가슴을 울리는 가사에 갑자기 눈물을 흘리다가도 지금 내가 수현을 보며 우는 것인지 구름 위로 올라가도 천사와 나팔부는 아이들은커녕 앞길 깜깜한 내 미래를 보며 우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빠질 때 그렇다. 자주 우는 게 감정 탓인가 했더니만 안과에 갔더니 안쪽으로 자라는 속눈썹 때문이라며 의사는 족집게로 개미오줌만 한 눈썹을 수차례 뽑았다. “뽑을 테니 위 보실게요” 근데 선생님 위가 안 보여요 제 구름 위가.. 인생이..  줄줄 눈물을 흘리며 원장실을 나온 나는 점안액을 처방받았다. 


한낮의 권태를 즐기며 작은 성과에 행복해하다가도 불현듯 아기공룡 둘리에 나온 몸통이 텅 빈 가시 물고기처럼 가슴이 허해지는 순간이 자주 온다. 가시 물고기처럼 허한 공백은 마치 내 커리어 같아서 불안의 BPM이 200을 초과한다. 밖으로 뛰쳐나가 어디 계곡 물에 머리를 박고 게으른 나를 함께 담금질하고 싶다가도 금세 침착해지는 내가 우스워 보일 때가 많다. 아수라 백작같은 나를 나조차 이해하지 못해서 멱살잡고 대체 너 왜 이러냐고 자문자답을 하는,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은 요즘이다. 


마음이 허한데 티 내고 싶지는 않아..


객관적으로 살펴보자. 돈이 없고, 집도 없고, 당연히 차도 없고, 무엇보다 직업이 없다(두둥). 나름 프리랜서라고 나를 부를 수는 있겠지만 최근은 수입이 없어 백수라고 자칭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내 상황을 나열하면 영 최악으로 보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는 나의 작은 성과들을 배제했기 때문에 더 최악으로 보인다. 하지만 언제나 내가 이룬 성과라는 것은 잠깐 뿌듯한 시기를 지나면 남들도 다 하는 당연한 것으로 보이고,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은 딸 수 없는 신선의 복숭아 열매처럼 보이니까. 나를 어떤 시각에서 묘사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최악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은 안다. 그래도 요즘의 나는 물 컵에 든 절반의 물이 청산가리로 보이는 시즌이다.


아는데 잘 안돼요 ㅠ


3년의 경력을 살리지 않을 것을 다짐한 상황에서 직장을 그만둔 지 이제 1년이 됐다. 각오했던 기간이었고 각오했던 두려움이었으며 불안해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군들 안 그럴 수 있겠어? 이 상황은 필연적으로 지나아할 터널이었고, 출구가 명확했다. 내 불안에는 마땅하고 명확한 근거가 있었다.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글로 쓸 필요도 없었다. 내가 더 잘하면 되고, 내가 마음을 다잡으면 되는, 해결 방법이 확실한 불안이었기에. 그래도 초조함이 등을 타고 올라올 때 나는 자주 온몸을 긁었다.


다행인 것은 한번 다뤄본 초조함이라는 사실이었다. 과거의 나는 그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충분히 나에게 기회를 주지 못했으니까, 이 시기는 사실 첫 번째 조급함을 잘 다루지 못한 결과이기도 했다. 고병권의 책 <철학자와 하녀>를 읽으며 조바심에 대한 문장에 밑줄을 쳤다. “성급한 해결을 원하는 조바심이 해결책이 아닌 어떤 것을 해결책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태의 종결은 불가능해진다. 파국을 막기 위한 조급한 행동이 파국을 영속화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두 번째 파국을 막기 위한, 사태를 종결짓기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번에도 돌려막기식 선택을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나는 불안을 손안에 넣고 싶었다. 내가 불안을 조정하고, 횟수와 시간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심신의 안정이 안단테인 나날을 보내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입 안에 외우는 문장이 있다. 


 좋아하는 것을 잘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니 나를 최악으로 묘사하면 얼마든지 최악일 수 있지만, 반대로 인생의 전례 없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역설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당장 생존과 연봉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안다는 것. 나아갈 삶의 가치관이 선명해지고 있으며, 그런 시기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다는 확신. “좋아하는 걸 잘하고 있다” 이걸 생각하면 내가 꽤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것은 세상을 예민하게 감각하는 것이다. 자주 소름이 돋아 팔에 닭살이 올라오는 사람처럼, 세상만사에 놀라고 분노하는 피부를 갖는 것이다. 분노에서 멈추지 않고 애정을 기반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집단적 경험을 상상하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경계를 뛰어넘는 시야를 갖기 위해 뛰는 것이다. 동시대에 필요한 이야기를 발굴하고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야기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다.


얼마 전에 알게 된 작가 앤 라모트는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 다른 두 작가의 문장을 인용해 답변한다고 한다. 시인인 존 애시버리는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쓰고 싶으니까.” 소설가 프래너리 오코너는 “그게 내가 잘하는 일이니까”라고 대답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 두 문장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어서, 쓰고는 싶지만 잘하지는 못해서, 지금 나는 간격을 좁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먼 미래가 보이지 않아도 괜찮아진다. 이 과정이 나는 즐거우니까. 나는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재미있기까지 한 염치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가끔 구름 위의 나팔부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을 때는 앤 라모트가 알려주는 E.L 닥터의 말을 생각한다. “소설 쓰기는 한 밤중에 운전하는 것과 비슷하다. 당신은 오로지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만큼만 볼 수 있지만, 그런 방법으로 여행지까지 다다를 수 있다”. 소설 쓰기 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한 통찰력 있는 문장이다. 지금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내 삶의 간격은 짧지만 그렇다고 해서 길이 막힌 것은 아니다. 흐린 뒤에 어떤 길이 있다는 걸 막연히 감각하는 정도라도 괜찮다. 오히려 그 편이 더 낫다.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갖게 해 주니까. 나는 아틀란티스 소녀가 아니고 당장 오늘의 길을 가까스로 도로 주행하는 초보 드라이버다.


가끔 지인들에 요즘 어떻게 지내?라고 할 때 이 모든 말을 하기가 번거로웠는데 이젠 간단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좋아하는 것을 잘할  있도록,

지금 저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근황 같은 일기를 남기고 싶었달까요.. 근데 제가 노오력을 별로 안하네요 ㅜ 부끄러워서 못말하는 것 두개 1. 기상시간 2. 스크린타임 ...어쩌면 이 일기는 제 나태에 대한 보여주기식 다짐일지도.. 

+ 좋아하는 것을 하며 재미있는 것은 좋지만 몸이 너무 편하다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몸이 너무 편하거든요.. 몸과 마음이 약간 불편하면서 즐겁고 재밌는 상태가 삶에 있어 적절한 것 같은데 정신차려야함. .진짜.. 정신차리자.. 9월부터 정신차라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나는 아직 8월 36일을 살고 있다..(트잉여)





앤 라모트 얘기를 많이 했는데요. 얼마전에 테드 영상에서 처음 봤는데 깜짝 놀랐어요.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매트릭스의 오라클의 강연같았고 감동의 눈물을 주룩주룩 흘림.. 알고보니 미국에서 아주 유명하고 사랑받는 작가고, <쓰기의 감각>으로 번역된 글쓰기 책도 쓰셨더라구요. 그래서 테드와 책을 모두 추천합니다. 책의 한 구절도 인용을..

다른 어디선가 이야기한 적 있지만 언제나 거듭해서 내게 도움을 주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겠다. 30여년 전 당시 열 살이었던 나의 오빠는 새에 관한 리포트를 쓰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오빠는 3개월의 기한을 부여받았지만, 마감 하루 전날까지 한 줄도 써놓지 않았다. 우리는 휴가차 볼리나스에 있는 가족의 오두막집에 가 있었고, 오빠는 부엌 식탁에 앉아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종이 한 묶음과 연필과 열어본 적 없는 새 도감들에 둘러싸인 채, 눈앞에 놓인 과제의 거대함에 짓눌려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옆에 앉더니, 오빠의 어깨에 팔을 얹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씩 하나씩, 새 한 마리 한 마리 bird by bird 차근차근 처리하면 돼”

+ 쓰기의 감각 원제가 <bird by bird>이기도 하다네여. 뭐든지 이렇게 차근차근 하나씩 하는게 중요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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