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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Dec 28. 2020

꼭 필요한 테이블

<카페 루루흐> 바다가 보이지 않아도 완벽한 카페, 그리고 비건  

* 거리두기 단계 격상 이전에 속초를 여행하면서 쓴 글입니다. 


터미널에서 택시가 들어가기 힘든 골목길을 돌아 어느 주택 단지 근처에 있는 카페 루루흐. 우유, 계란 등 동물성 식재료를 쓰지 않는 비건 카페이다. 바다나 호수가 보이는 풍경은 없어서 관광객보다는 현지인들에게 알음알음 알려져 입소문을 타고 있는 곳이었다. 주말 및 공휴일에는 1-2인 손님만 입장이 가능하고, 대화도 조용히 나누어야 하는 고요한 카페이다. 굳이 속초까지 와서 바닷가도 보이지 않는 카페에 가야 할까? 그런데 리뷰가 칭찬일색이었다. 올해 갔던 카페 중에서 가장 예뻐서 오래오래 기억남을 것 같아요,  속초에서 보낸 시간 중 가장 좋았던 순간이었어요. 이런 글을 올리게 하는 공간은 어떤 곳일까. 궁금해졌다. 


인스타그램에서 후기를 찾다가 카페를 열면서 사장님이 올리신 글을 우연히 마주했다. 

'누군가에겐 까다롭고 불편한 공간이 될 수도 있지만, 이 점 역시 루루흐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여러 결을 가진 사람이 많듯이 카페 문화도 다양했으면 하고, 무엇보다 저희가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기존의 카페 문화는 예뻐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카페의 주인은 손님이 주인이고 먼저인 느낌이었다. 반면 루루흐는 손님 이전에 카페의 철학이 존재하고, 이런 철학을 고객이 먼저 존중해야 공간을 즐길 수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굳은 심지가 느껴지는 소개글에서 나는 카페 루루흐가 정말 궁금해졌다. 


루루흐는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다'라는 뜻의 아아쿠초 케추아어이다 (페루). 가득 들어온 햇살이 따뜻하다 

메뉴는 단출했는데 필터 커피, 캐모마일, 마테, 히비스커스, 백차 등 다양한 차 종류와 비건 디저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두유로 만든 요거트, 귀리 음료를 넣은 비건 밀크티와 쌀로 만든 단호박 머핀 등 보통의 유제품으로 만든 카페와는 색다른 메뉴들이었다. 

 

뭘 먹을까. 가장 어려운 고민이었다. 


별사탕이 들어간 히비스커스 차라니, 이름이 분홍 반지라니. 더도 말도 할 것 없이 이건 꼭 맛봐야지. 체리빛 히비스커스 차에 얼음이 동동 띄워져 있다. <이 모두가 분홍이 꾸민 짓>이라는 제목의 카드 아래에 차에 대한 소개가 적혀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자란 오렌지 필, 트로피컬, 히비스커스, 남아프리카의 허니부쉬, 안데스에서 온 알록달록한 열매들이 단 오 분 안에 한잔의 분홍빛 색을 완성했다는 선명한 단어들과 함께. 입 속에 붉은 차가 퍼졌다. 차갑고 상큼한 맛은 이렇게 다양한 땅에서 왔구나. 미소가 지어졌다.  


맨 안쪽 창가에 앞쪽 창가의 간이 테이블에는 몸을 늘어뜨린 화분들이 하얀 면포 커튼 앞에 너울져 있다. 테이블 위에는 작은 조명이 vegan(비건)이라는 명함 크기의 종이를 비추었다. 어떤 공간은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오늘의 나에게는 이 테이블이 꼭 필요했다.  때로는 집보다, 언덕 위의 눈에 띄지 않는 카페에서 숨 쉴 공간을 찾기도 하니까. 이 곳이 내가 꼭 찾던 곳이라고 생각했다. 햇살이 쏟아져서 눈을 뜰 수 없었던 해수욕장보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바닷가의 카페보다, 여기서는 정말 마음을 누이고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두고 온 문제들도, 집에 돌아가서 열어야 할 메일함도,  잠시 흐려졌다. 그저 이 곳에 머무는 지금 이 순간에, 오롯이 집중하고 싶었다. 



넓은 공간이었지만 테이블은 다섯 개 남짓이었다. 각각의 테이블이 하나의 섬처럼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있었다. 넉넉한 거리 덕분인지 나만의 공간을 가진 기분이 들었다. 테이블 사이의 거리에서, 수익성이나 회전율보다 머무는 사람의 편안함을 생각하는 주인의 철학이 보이는 듯 했다. 카페의 중앙에 위치한 서재 역시 눈길을 사로잡았다. 대부분 빳빳함이 가시지 않은 신간이었다. 독립 출판물, 개인의 이야기가 담긴 에세이집이 많았다. 2-30대의 취향에 꼭 맞는 책들이어서인지 책을 읽고 싶어서라도 한번 더 오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서재였다. 사실 카페 루루흐를 오기 위해서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표를 늦은 시간으로 바꾸어야 했다. 고속도로 정체로 예상 소요시간보다 2배 가까이 걸렸지만, 이 곳에 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속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순간이었으니까. 


오늘의 나에게는 꼭 필요한 테이블을 찾았다. 

속초에 다시 오고 싶은 이유를 이 카페에 숨겨두고, 배낭을 메었다. 


*어떤 대가도 받지 않았으며, 제 사비로 경험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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