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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Dec 28. 2020

느리게 먹는 초밥

마음을 채우는 식사, <경주 황남홍가>

황리단 길은 경주 관광의 중심지이다. 소품 가게, 책방, 황남 쫀드기 같은 지역 특유의 간식거리들, 인스타그램에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 올릴 만한 소재가 풍부하다. 그래서인지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연인들이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가희와 조용한 남해 해안가 마을에서 머물 때는 행복에 젖어서 L을 잘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주에서 내 또래의 관광객들이 예쁘게 꾸미고 사진을 찍고, 핫 플레이스에서 줄을 길게 선 모습을 보니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조용히 글을 쓰려고 들어간 카페에서도 사방에서 셔터 음이 들렸다. 카페 의자들은 하나같이 불편해서 오래 머물기도 어려웠다. 혼자서도 씩씩하게 여행하던 나였는데, 스스로가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밤이면 그 애가 생각나서 쉬이 잠들지 못했다.


배가 고팠다. 지금 나에게는 단백질이 필요하다. 산뜻하고 깔끔한 초밥이 먹고 싶어서 황리단 길에 위치한 황남홍가라는 초밥집으로 향했다. 18,000원짜리 모둠 초밥을 주문했다. 식전 샐러드를 기다리는 10분 동안, 그저 숨만 쉬었다. 마스크를 쓴 채로 천천히 호흡을 했다. 그러면 울적한 기분이 지나갈 것 같았다.




바(bar) 좌석에 앉았다. 초밥을 쥐는 것 말고도 재료를 다듬는 과정부터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초밥 집에서 초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이 곳에서는 회를 뜨고, 부속물을 버리고, 재료를 정리하는 모습까지 투명하게 보였다. 손에 레몬 물을 적시고 밥을 마는 주방장의 손놀림에 눈이 갔다. 돌돌 말려져 있던 김밥을 풀고 썰고 둥글게 쥐는 모습, 김밥 꽁지를 버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왜인지 긴장이 풀렸다.


주방장님을 중심으로 3명의 직원들이 보조하고 있었는데, 어떤 큰 소리가 오가지도 않고, 묵묵히 물 흐르듯 일하고 있었다. 숙련된 흐름이었다. 한 번에 여러 일을 하는 데도, 음식을 준비하는 일련의 동작에는 무리가 없었고, 주방장님이 집중해 있다는 게 느껴졌다. 가게 역시 조용했다. 테이블에서 나누는 대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고, 손님들은 조용히 식사를 마치고 가셨다. 나중에 주방장님과 대화하고 나서야, 현지인이 주로 오는 가게라는 걸 알았다. 어른들만 오는 게 아니라 10대 후반 - 20대로 보이는 손님도 많았다.


1시간 동안 머무는 내내, 주방장님이 회를 뜨고, 밥을 마는 모습을 눈을 떼지 않고 보았다. 카카오톡 메시지를 확인하려다가 꺼버렸다. 하나도 외롭고 지루하지 않았다. 또 다른 세계를 엿보는 기분이었다. 리듬이 있고 집중이 있어서 야무지게 꾹꾹 누르는 손놀림이. 직업인으로서 존경심이 들었다. 이런 경험을 소비자에게 줌으로써 직업적 소명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을 보는 것 같았다. 너무 감명을 받아서 지금 휴대폰의 메모장 앱을 켜보고 이렇게 글을 쓰게 만든다는 것이 신기했다.



광어, 연어, 참치, 새우, 계란, 롤 등 다채로운 초밥이 나왔다. 맨 왼쪽에 놓여있던 광어 초밥을 먼저 맛보았다. 몇 초 뒤, 왜 사람들이 초밥이 입에서 살살 녹는다고 하는 건지 이해가 되었다. 자극적인 음식보다는 재료 본연의 맛을 좋아하는 나이기에, 일식이란 어디를 가든 평타를 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럼에도 초밥이 입에서 녹는다는 생각은 처음이었다.


사라지는 초밥이 아쉬워서 의식적으로 천천히 씹었다. 어떤 초밥에서는 레몬의 상큼한 맛이 났다. 광어 초밥 위에는 유자랑 생강을 저민 것이 올라가서 초밥이 비리지 않았다. 입에서 회가 부드럽게 녹았고, 밥알을 삼킬 것 같을 때마다, 꼭꼭 씹으려고 노력했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다. 디저트로 차가운 매실차가 나왔다. 칵테일 비슷하게 생긴 잔에 통조림 파인애플이 스틱에 꽂혀있었다. 끝에 나비가 귀여웠다.


혼자 하는 식사지만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의욕이 샘솟는 것 같았다. 마음이 지치고 춥고, 움츠러드는 하루였다. 경주 어디에서도 내가 쉴 곳은 없을 것 같았다. 집에 가고 싶어 졌지만, 집이라고 내가 원하는 휴식을 취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정말 맛있고 정갈한 음식을 먹으니까 배가 든든히 채워졌고, 어느새 마음도 차 버렸다. 이 곳에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데려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맛있는 밥을 먹이고 싶을 때, 한 명씩 데려오고 싶다고. 대화를 많이 하지 않고, 초밥을 함께 음미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황남 홍가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음식 외적인 요소다. 정성과 애정이 공간 구석구석에 닿아있었다. 고급스러운 그릇은 예쁘고 반질반질했다. 청소상태가 깨끗하고 토일럿 향수까지 준비되어 있는 화장실에서 가게에 대한 주방장의 자부심을 느꼈다. 보통 음식점들은 화장실까지 사용자의 경험으로 보지는 않으니까. 경험의 모든 요소를 고려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심지어 등받이 의자까지도 편했다. 큰 창 밖으로 대능원이 보여서 유명한 카페에서는 30분만 앉아있어도 등이 배겼는데 말이다. 




집중해서 초밥을 만드시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가, 핑크빛이 도는 초밥의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진짜 맛있어요. 깊이 집중해서 계속 식사를 준비하시느라 말을 붙이기도 어려웠는데, 주방장님은 친절하셨고 이런저런 말을 걸어주셨다. 초밥만 10년, 그리고 이 가게만 8년을 운영하셨다고 했다. 이 가게에서 흐르는 물 흐르듯하 자연스러움은 그런 경험과 세월의 힘도 있겠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그릇이 예쁘다고 칭찬하자, 사실 서울에서 8시간 동안 직접 고른 오마카세용 도자기에요, 하고 귀띔해주셨다. 역시 진심 어린 정성은 작은 디테일에서도 묻어나나 보다.


사실 내가 황남 홍가에 온 것은, 가성비 좋다는 평 때문이었다. 초밥을 먹고 싶은데, 혼자 2만 원이 넘는 식사를 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마침 만 팔천 원짜리 모둠 초밥이 있기에, 이 가게에 왔는데 마치 파인 다이닝을 경험한 기분이었다. 싱가포르에서 회식을 하며 가본 어떤 비싸고 화려한 식당보다도 훌륭한 저녁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가게가 내뿜는 분위기가 참 소중했다. 이 곳이 인스타그램에서 너무 유명해지지 않기를, 현지인들이 알음알음 가는 맛집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럼에도 맛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주기를, 몇 년 뒤에도 변치 않는 모습이길 바랐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몸에 힘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숙소까지 씩씩하게 걸어갈 힘이 생겼다. 조금 더 잘 지내고, 웃고 싶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틀 뒤, 여행을 함께 하기로 한, 친구를 데려왔다. 친구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역시, 내가 틀리지 않았구나. 우리는 든든히 식사를 마치고 행복한 기분으로 식당을 나섰다.


나: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짐작할 수는 없지만, 아까 주방장님을 보니 딱히 보조가 할 일과 자신이 할 일을 구분하지 않으시는 것 같더라. 왠지 저긴 일하기도 좋은 곳일 것 같아.

친구: 맞아. 뭔가 뚜벅뚜벅 자기 길을 가시는 분인 것 같아.


나에게 초밥은 먹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는 음식이다. 하지만 황남 홍가의 초밥은 식전부터 식후까지 정성을 담은 밥상 하나만으로 존중받는 기분이 들었다. 물 흐르듯 초밥에 집중했던 스텝 분들과 정갈한 식당이 그리워진다. 멍하니 회를 뜨는 모습을 바라보던 시간동안 잡념이 사라졌고, 혀에 느껴지는 초밥과 그리고 주방장님의 손놀림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공간 곳곳에 담긴 애정과 철학이 강렬하게 남았다. 그래서 느리게 초밥을 먹던 이 날은 내겐 경주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기억이다. 그 가게에 또 가고 싶다. 경주는 그립지 않지만 황남 홍가는 참 그립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여기 모두 데려오고 싶고, 경주 갈 일 있냐며 일일이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올해 이런 곳을 발견해서 기쁘고, 졸음을 참아가며 이 글을 쓰게 한 주방장님에 대한 경외감이 들었다. 언젠가 나의 작업물도 그의 초밥을 조금은 닮았으면 좋겠다.


*황남 홍가는 황리단길에 위치해있습니다.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았으며, 제 사비로 경험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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