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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도현 Sep 02. 2018

도대체 뭘 해야지?

레비나스에게 물어보세요

레비나스에 대한 강영안 교수의 해석은 이 세 문장에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레비나스가 변호하는 주체의 주체성은 '타인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행위'에서 성립한다. 타인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초월'이다. 사물을 인식하고, 노동하고, 미래에 대해 불안을 갖는 것은 부차적이고, 타인을 영접하고 손님으로 대접하는 것이 주체의 주체성을 성립하는 일차적 조건이다."(<타인의 얼굴>, 124p) 


평범한 말로 바꿔 표현하자면 이런 거다.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와 목적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바로 타인을 발견하고 그들을 우리 삶에 초대함으로 가능하다. 강영안 교수는 '사물의 인식, 노동, 미래에 대한 불안(계획)이' 부차적인 것이라 설명했지만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그런 일상의 활동들이 타인을 영접하기 위한 도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어떤 노동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고민한다. '뭘 하고 싶어'라는 물음에 쉽게 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 답이 행복을 찾는데 결정적인 열쇠라는 걸 알면서도. 레비나스의 조언을 받아들인다면 어떤 노동을 하고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우리는 타인에게서 찾아야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모든 생산 활동은 타자를 향하고 있다. 거의 모든 생산 활동은 - 분업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전에도 - 항상 나 자신보다는 가족을 포함해 타인을 위한 활동이었다. 비록 아담 스미스는 그 활동들이 개인적 이익 추구에 불과하다고 말했지만... (나는 절반만 동의한다.)


노동을 하면서 행복할 때가 있었나? 물론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하면 행복할 수도 있겠으나 40년을 관찰한 결과 좋아하는 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 거의 진리에 가까울 거다. 그렇다면 우리 대부분은 불행한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이 우울한 운명에 반전을 가져다 줄 이가 레비나스다.


어쩌면 나의 노동을 통해 타인의 삶이 더 풍요로워지는 것을 목격할 때 행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많은 청년들이 20대가 훌쩍 넘도록 진로를 고민한다. 아직 백수일 때는 물론이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여전히 그곳에 열정을 쏟아부어야 할지 고민한다. '무엇을, 무엇 때문에 생산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타인에게 있다. 내가 무엇을 생산하든 그 유익은 타인이 취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의 주체는 '나'이지만 수혜자는 타인이어야 한다. 노동의 목적이 내가 아닌 타인이 될 때 우리는 노동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비로소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자본주의 이론이 말하듯 노동의 목표가 '내 생활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 즉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면 노동 자체가 갖는 의미는 사라지고 괴로움만 남는다. 돈을 쓸 때는 행복하지만, 돈을 벌 때는 괴로운 상태. 어쩌면 우리는 너무 '나' 중심적으로 사고하고 있다. 나만 생각해서는 역설적으로 주체성을 세우기 어렵다. 타인 없이 나의 모든 생산 활동은 무의미하다. 그러니 타인을 발견하고 영접하는 것이야말로 '주체의 주체성을 성립하는 일차적 조건'이라는 레비나스의 말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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