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곧 타인의 발견 - 레비나스 2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타인을 영접하고 손님으로 받아들이려면 타인과 나 사이에 거리가 있어야 한다. 타인과의 거리가 없이는 가까움과 친숙성이 있을 수 없다. 타인과의 거리는 타자가 타자로서 나에게 환원될 수 없는 '외재성'을 갖듯이 바깥과 구별되는 '내면성'이 나에게 있을 때 성립한다." (<타인의 얼굴>, 124p)
레비나스가 말하는 '바깥과 구별되는 내면성'이 뭘까 생각해보다가 몇 년 전 청소년 사이에 유행했던 '패딩' 문화가 떠올랐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특정 브랜드 패딩을 입고, 심지어 그 패딩을 입지 않으면 왕따 당하는 현상을 보며 타자를 나에게, 나를 타자에게 환원시키려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았다. 술자리에서 잔을 꼭 비워야 하고, 예외 없이 술을 마셔야 하는 문화 또한 그런 단면 중 하나다. 술을 같이 비워야 하나가 되는 것처럼 느끼지만 그것이 과연 진정한 하나 됨인가? 이러한 환원 본능은 폭력에 가깝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문장 하나로 수십 년 정치권력을 유지해온 걸 보면 타인을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폭력성은 권력의 도구로도 참 유용한 것 같다.
레비나스는 타인이 나와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언제나 나의 예상과는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이해하라고 충고한다. 타자의 우발성을 그대로 수용해야 비로소 그를 영접할 수 있다. 강영안 교수에 따르면 레비나스가 얼굴을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도 '나'로 환원될 수 없는 타자의 '외재성'과 '우발성'이 얼굴에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 또한 어떤 타자에게도 환원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타인의 얼굴에 대해, 심지어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에 대해서도 뭘 어떻게 해볼 수도 없다. 그저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한다. 그것이 영접이다. 나 자신을 다른 누군가, 혹은 어떤 것에 동일시하지 않아야 확고한 자아 인식을 가질 수 있고, 그 바탕 위에서만 타자와 의미 있는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정말로 그렇지 않은가. 타자의 발견, 그리고 그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한 인정이 진정한 관계의 시작이다. 레비나스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은 왕이나 독재자 또는 부자의 얼굴이 아니라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의 얼굴, 즉 고통받는 사람의 얼굴이다. 고통 중에 있는 이 얼굴과의 만남이 없는 한, 타인에 대한 관심 없이, 타인과 교류하면서, 아무 문제없이 우리는 살 수 있다. 삶의 이러한 차원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즉 세계 안에서 우리가 거주하는 방식이다. 타인의 얼굴과 접할 때, 그에게 귀 기울일 때, 그때 윤리가 경제적 삶에 침입하게 된다. '윤리는 보는 것이다.' 만일 윤리가 보는 것이라면 뭘 보는 것인가? 하늘에 있는 별과 내 안에 있는 도덕 법칙인가? 이 '봄'을 나(강영안 교수)는 기득권이 없는 사람들의 고통받는 얼굴을 레비나스가 염두에 두었다고 생각한다. 윤리는 봄이고 동시에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강영안, 타인의 얼굴)
윤리적 자아가 형성되어야 비로소 주체성이 확립된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윤리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윤리는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을 '봄'으로 세워진다. 그 얼굴을 보기 전에는 그저 먹고 살아가는 경제적 인간,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일 뿐이다.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우리에게 어떤 '책임감'이 생긴다. 내가 본 사람들, 고통으로 신음하며 나에게 손 내미는 사람들에 대한 어떤 책임감이 행동을 유발한다. "자신의 입에 든 빵, 입에 가득한 빵을 내어주는 것이다... 자신의 지갑을 열어주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의 집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대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 세계 안에서는 연민과 동정과 자비와 가까움이 있을 수 있다. '타인을 위한 볼모', 이것이 타인과의 연대성을 위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체성은 타인을 대리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구성된다." (같은 책)
그러니까 고통받는 자의 신음을 듣고 구체적으로 행동함으로써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약자의 신음은 어디에서 들을 수 있을까? 레비나스가 말하는 고아와 과부는 누구인가? 일차적으로는 언어가 제시하는바 그대로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신음하는 이웃들이다. 유태인인 레비나스의 언어가 성서의 언어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서에서 고아와 과부는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은 예수가 말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겹쳐 보인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을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라는 관점으로 바꾸어 놓는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임이 우리의 빈약한 자비심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고통의 원천이 바로 '나의 자유 추구'에서 온다고 본다. 그러니 우리에게 사회적 약자를 향한 윤리적 책임이 부과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다. 레비나스의 충고를 받아들여 윤리적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적 약자를 주목하고('봄') 그들의 고통이 나의 행복 추구에 기인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을 구체적인 삶의 언어와 행동으로 풀어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선행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고 그 자유를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약자들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주체성의 발견이고 진로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다.
레비나스는 우리 시대에 정말로 필요한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에는 고통받는 사람들이 천지에 흩어져있기 때문이다. 멀리 찾을 것도 없다. 바로 옆에 있는 내 친구의 모습이다. 지하철이나 버스 옆자리에 선 사람의 무표정하면서도 괴로운 얼굴들, 신문에 나오는 수많은 사건들, 몇 번이고 죽음을 생각하는 고등학생들... 모두 나에게 윤리적 책임을 요구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단 한 번 만나보지 못했고, 앞으로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약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은 궁극적으로 나의 이웃이다. 그들을 '봄'으로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구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 비단 사회 운동가를 꿈꾸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적용할 수 있는 조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