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즈 파텔의 <경제학의 배신>이 보여준 문제의 근원
운동가이자 경제학자인 라즈 파텔은 자신의 저작 <경제학의 배신>(제현주 역)에서 19세기에 등장한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침투했는지 잘 보여준다. 시장 가격의 의미를 밝힌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시작으로 시장 가격에 모든 정보가 적절히 반영된다고 주장한 유진 파마, 자유방임주의를 실제 정책에 반영한 그린스펀까지 유럽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미국에서 꽃을 피웠고 서구 전체와 신흥국가들을 강타했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 현상이 아니었다. 개개인 삶의 양상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기득권 발 혁명이었다. 이것을 사회철학자인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이라고 불렀다. 칼 폴라니에 따르면 시장 메커니즘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시장은 인간의 지성과 함께 출연한 삶의 양식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와 신고전학파(경제학의 주류 학파)가 만나면서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을 '가격'으로 치환하고 '행복'이라는 개념 대신 '효용'이라는 개념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경제적 활동의 목표는 '효용 극대화'가 된 것이다.
주류 경제학이 말하는 '효용 극대화'를 뒷받침하는 철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효용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철학은 벤담에서 시작한 공리주의에 기반을 둔다. 게리 베커와 같은 경제학자는 삶의 대부분 문제를 효용과 관련하여 설명하려 한다. 심지어 사랑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어야 할 결혼조차도 효용의 문제로 다룬다. 그들에게는 결혼 마저도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욕구 추구의 일부일 뿐이다.
문제는 돈의 크기와 효용의 크기를 같은 것이라고 취급한데서 시작된다. 효용 극대화는 현대인이 추구해야 할 거의 유일한 목표가 되어버렸고 그것은 곧 돈을 많이 버는 것과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결국 모든 사람이 돈 버는 기계가 돼버렸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쓸 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는 사회가 된 것이다.
칼 폴라니는 특별히 노동의 상품화를 주목한다. 노동이 상품화되었다는 것의 다른 표현은 '노동이 자본화되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노동 자체가 갖는 의미보다는 노동으로 인해 얻게 되는 수익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의 윤리적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뜻한다. 노동이 삶의 목적이 아닌 단지 자본 축적의 도구가 된 것이다. 노동 자체보다는 노동으로 받는 '돈'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자기계발 사회는 노동하지 않고도 돈이 돈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만들라고 종용한다. 어차피 노동의 목적이 돈이기 때문에 노동하지 않고 돈이 생기는 방식을 아는 것이 자기계발의 끝판왕이다. 밀리니엄의 시작과 함께 전 세계를 강타한 기요사키의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가 바로 그런 이야기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주식투자와 부동산 관련된 책, 강연들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을 보면 '먹고사는 일'이 노동으로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정말로 큰 문제는 노동이 자본의 하위 개념으로 편입된 상황에서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한들 자본을 소유한 사람보다 앞서가기 힘들다는 점이다. 나의 노동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돈으로 환산했을 때의 가치는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운동장은 기울어졌고 자본주의가 심화될수록 운동장은 더 절벽에 가까워진다.
모두 억대 연봉을 꿈꾸지만 대부분이 처한 현실은 40대 중반이면 자리를 지키는 것도 아슬아슬하다. 자본의 일부인 노동력은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재화일 뿐이다. 아무리 자기계발을 열심히 해서 사다리를 올라간들 약간의 시간만 지나면 교체의 대상이 된다. 결국 교체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또 다른 자기계발에 매달려야 한다. 노동이 상품화된 우리 사회의 구조 내에서는 끊임없는 자기계발만이 생존의 방식이 된다. 그런 세상에서 행복을 발견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