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 작가의 <거대한 사기극> 그 기막힌 현실에 대하여
자기계발서 제목을 읽다 보면 참 답답하다. 어른이 되려면 흔들려야 한다느니, 핑계 대지 말라느니 하는 언어가 참 거슬린다. 그런가 하면 뇌를 비롯하여 신체와 관련된 자기계발서 행렬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식의 자기계발은 오로지 한 방향을 지향한다. 바로 '나'이다. 그것도 많은 경우에 '돈을 많이 버는 나'로 귀결된다.
심지어 인문학을 빗대어 쏟아지는 자기계발서도 마찬가지다. 인문학이 무엇인가? '인.문.학.' 바로 사람, 책, 공부다. 이 순서가 정말 중요하다. 사람에 대한 기록이고, 사람에 대한 공부. 우리가 인문학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사람'에 대한 이해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인문학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이 가리키는 '사람'은 누구일까? 말할 것도 없이 '타자'다. 그런데 고전을 읽으라고 하는 자기계발서들은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다.
이런 흐름이 불편한 것은 단순히 덜 이기적이고 타자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옳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계발이 지향하는'나' 중심적 사고가 행복을 찾는 이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자기계발이라는 단어가 우리를 얽매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더 나은 나, 더 통제된 나는 과연 '행복'을 향하고 있을까? 아니면 자기계발은 또 다른 경쟁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인가? 자기계발의 필요를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모습보다 더 발전하고픈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데 과연 현대적 자기계발 프레임이 그 길을 제시하고 있을까?
<거대한 사기극>의 저자 이원석은 자기계발의 계보를 훑으면서 우리 사회가 왜 자기계발에 목메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자기계발은 거대한 기업 집단의 한 일원으로서 최적화된 개인을 지향한다. 말단 사원에게 CEO 마인드를 가지라고 격려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아무리 CEO 같은 태도를 가지고 직장생활을 한들 CEO가 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회사가 원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 엄청난 열정을 쏟아붓는다. 앞서 같은 길을 걸었던 선배들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무수히 목격하면서도 말이다.
이원석 작가는 자기계발의 중요한 모티브 중 하나로 청교도적 윤리를 거론한다. 자기계발이라는 사조가 비록 영국에서 출발했지만 미국에서 꽃 피웠고 그 배경에는 청교도들의 노동 윤리관이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청교도적 윤리란 무엇인가? 물론 복잡한 종교 윤리를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이 매우 부적절할 수 있다. 윤리학자들이 보면 너무나도 피상적인 통찰이라고 문제 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자기계발'이라는 현상의 배경으로서 작동하는 윤리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그냥 한 마디로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열정을 다해 노동력을 투입하면 그만큼 결과가 나와야 한다. 반면 주어진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다른 말로 하면 '돈을 벌 수 있었는데도') 노력이 부족해서 그리 하지 못한 것은 비윤리적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면 말단 직원도 CEO의 태도를 갖는 것이 적절하고 합리적이다. 종국에 CEO는 될 수 없더라도 그 노력에 대한 결과는 반드시 주어지기 때문이다. 노력과 보상이 긍정적 선형 관계를 이룬다.
자기계발의 전설적인 모델들이 산업혁명 직후 주로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시대에는 열심히 노력하면 돈도 어느 정도 벌 수 있었다. 한국 사회도 양상은 비슷했다. 예를 들어, 지금은 자영업자라는 계층이 마치 빈곤층으로 진입하는 입구로 인식되고 있지만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음식 장사해서 건물 올린 사람이 꽤 되었다. 자영업자는 휴일을 포함하여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지만 열심히 하기만 하면 그만큼 경제적 보상이 주어지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자영업자라는 단어가 차상위계층의 또 다른 표현이 돼버렸다. CEO적 마인드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열정적인 자기계발이 경제적 보상으로 이어진 경우가 얼마나 될까?
이원석 작가의 분류에 따르면 자기계발은 스티브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으로 대표되는 윤리적 자기계발과 <시크릿>으로 대표되는 신비주의적 자기계발로 나뉜다. 윤리적 자기계발은 열심히 자신을 계발하면 그것이 경제적 보상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내용이고, 신비주의적 자기계발은 긍정적인 생각이 현실을 이끈다고 하는 일종의 자기 최면이다. 이원석 작가는 전자가 보편성을 상실할수록 후자가 더 성황 한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시크릿>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이 바로 그런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한국사회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결과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노력에 대한 보상이 불확실한 사회, 그것은 단지 한국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기계발의 원조격인 스마일스의 <자조론>이 처음 나온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노동은 자본주의의 중요한 축이었다. 특별히 20세기 중반 미국의 노동자들은 생산력 극대화라는 목표를 착실히 이뤄냈고 열심히 일하면 보상받는 세상이 온 것처럼 보였다. 생산의 3요소가 있다지만 그래도 생산의 주체는 노동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개개인이 자기계발을 통해 노동력의 질을 높이려는 동기도 충분했다. 노동의 질 향상은 곧 생산성의 증대를 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미국 노동자들의 상실감은 생각보다 심각했던 것 같다. 심지어 '트럼프 미국'이라는 기괴한 상황까지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 미스터리 한 변화의 원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