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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도현 Aug 06. 2018

자본주의적 인간에서 벗어나기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공동체적 인간으로

요즘 들어 공동체라는 말이 유행이라도 하는 듯 회자되고 있다. 사실 공동체는 인류의 시작과 함께 인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가장 획기적인 장치였다. 아니, 인간의 존재 양식 그 자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최근 들어 공동체라는 개념이 더욱 각광을 받고 있지만 사실 인간이 공동체라는 삶의 양식에서 벗어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인간이 공동체적 삶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시장의 발전과 관계가 있다. 우리는 보통 시장을 자본주의와 엮어서 생각하지만 사실 자본주의가 도래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시장은 존재했다. 단지 그때는 삶의 다양한 모습 중 하나였을 뿐이다. 자본주의 시대 이후 그러한 양상이 바뀌었다. 지금은 ‘삶’을 향유하기 위해서 무조건 ‘시장’이라는 판 위에 올라야 한다. 삶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시장에서 구할 수 있다. 아니, 상당 부분은 시장에서만 구할 수 있다. 시장이 삶이고 삶이 시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아담 스미스의 통찰력이 빛을 본 이후 소위 지식인들은 시장이라고 하는 아주 오래된 삶의 양식에서 사람의 얼굴을 배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 등장한 인간상이 다름 아닌 호모 이코노미쿠스다. 주류 경제학의 거의 대부분 이론은 인간이 합리적이고 이기적이라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전제 위에 세워져 있다. 문제는 이런 유의 인간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경제학의 배신', 라즈 파텔 저) 그런데 주류 경제학이라는 고전학파와 신고전학파는 그저 인간의 한 단면일 뿐인 이기성과 합리성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설정하고 그에 맞게 경제를 설계 해왔다. 그 결과 공동체는 점점 흐려지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과 그런 개인의 욕구를 한없이 받아들이는 자본주의 시장만 남게 되었다. 문제는 그렇게 디자인된 경쟁시장에서는 모든 개인이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지향하지 않으면 생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사람이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되고 만다. 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은가? 원래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계발을 아무리 한들 호모 이코노미쿠스로 살아가는 한 우리에게 행복은 요원하다. 

물론 자본주의의 역사가 이렇게 간단한 문장 몇 개로 재단할 수 있을 만큼 쉽지 않다. 약간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야 한다. 우리는 대체로 '신자유주의'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어감을 느끼지만 반대로, 그 본류라 할 수 있는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호감을 갖는 사람이 많다. 오랜 봉건사회 질서의 억압을 깨고 한 개인이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개인의 자유를 최고 가치로 생각하는 자유주의와 개인의 사유재산을 기본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의 만남이 필연적이라 여기는 식자들도 있다. 밀턴 프리드먼은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구와 자본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잘 어우러지는지 보여준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자유를 향유하기 위한 최적의 장치라는 것이다. 본래 자유주의자들의 바람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유주의가 자본주의와 결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자유주의가 진보의 가치인지, 보수의 가치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한국사회에서는 그 함의가 더욱 복잡하다. 스스로 '자유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상당히 진보스러운 경우가 많다. 그것은 한국의 자유주의가 군사독재와 대립하면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쌓아온 역사적 맥락은 독재를 철저히 거부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근대 서구의 신자유주의 물결 또한 극단적 집단주의의 반작용이라 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의 극악무도한 폭력성을 경험한 서구 사회에서 극단적 자유주의(신자유주의)의 출연은 어쩌면 필수 불가결한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호모 이코노미쿠스 이데올로기, 즉 모든 인간이 자신의 욕구에 충실할 때 좋은 사회가 된다는 이데올로기가 경제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마치 진리인양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자유의 추구가 극에 달았을 때 얼마나 파국적 결말에 도달할 수 있는지 바로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2008년 금융위기, 2011년 후쿠시마 원전 폭파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다시 출연하는 개념이 바로 공동체다. 극단적 집단주의의 반작용으로 자유주의의 극단 버전인 신자유주의가 사회를 장악했고 그 반작용으로서 다시 공동체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이클 샌델이 바로 공동체주의자다. 그의 대표 저작인 <정의란 무엇인가>는 미국에서 10만 부 남짓 팔린 평범한(?) 베스트셀러였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 엄청난 판매 기록을 세웠다. 인문학 서적이 100만 부 이상 판매된 것은 정말로 이상한 사건이다. 혹자는 마이클 샌델 신드롬이 한국사회의 변화를 예고하는 이정표라고 평가했다. 그만큼 공동체주의에 대한 궁금증이 우리 안에 쌓여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주목한다. 


공동체를 말하면서 봉건시대의 정주 공간, 즉 전통적인 마을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공동체라고 하면 다수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우리가 주목하는 공동체는 개인의 자유를 희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동체주의자들은 적극적으로 자유주의를 수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공동체주의자들이 주목받는 역사적 맥락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찾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 추구가 어떻게 커뮤니티 안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시너지를 낼 것인가에 대한 답이다. 단순히 ‘혼자 살 수 없으니 같이 살아 보자’의 차원이 아니라 어떤 삶의 양식이 진정한 행복을 담보할 수 있는지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이 자신의 사상적 결론에 도달하는 방법론을 보면 교조적 주장보다는 무수히 많은 질문을 던진다. 질문이야말로 공동체주의자들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다. 서로 질문을 하고 답을 주고받는 대화가 이들의 방법론이자 철학 그 자체이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다소 어색한 방법이지만 정말로 꼭 필요한 처방전이 아닐 수 없다. 
 
장황한 거대담론을 이야기했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런 지식적 유희가 아니다. 굳이 어려운 이야기로 시작한 것은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가 무조건 나쁘고 공동체주의가 무조건 옳다는 맹목적 시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어떤 주장을 하든지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주의는 역사의 발전 위에서 그만의 역할이 있었던 것이고 이제는 한계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삶의 방식 또한 변해야 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필요했던 자기계발형 삶이 아닌 새로운 길이 필요하다. 그런 흐름 위에 공동체주의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공동체를 통해서 어떻게 개인이 성장하고 있는지, 반대로 개인의 성장을 통해 어떻게 공동체가 풍성해지는지 발견하는 것이다. 이미 공동체적으로 풍성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누가, 어떻게,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지 함께 살펴보고 ‘다른, 그러나 행복한 길’을 우리도 걸을 수 있는지 모색하고자 한다. 


먼저 자기계발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보자. 자기계발 담론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삶’의 매뉴얼이기 때문이다. 그 피곤함을 먼저 들여다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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