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작정 Jul 25. 2023

운동과 조금씩 얼굴 트는 중

안녕? 내가 28년 동안 낯을 가리다 아는 척을 하네...? ^_^;

'할 수 없다'라고 단정하고 마는 것은 왜 이렇게 쉬울까. '할 수 있다'와 딱 한 글자 차이인데.


살면서 '할 수 없다'라고 단정지은 것의 목록을 작성하려면 24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반면 '할 수 있다'라고 결론 내리기 위해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나는 여태껏 나 스스로를 신중론자라고 생각해 왔지만 사실은 아니다. 신중론자가 되려면 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까지의 과정도 신중해야 하는 법이니까.


이런 식으로 (편하게) 살다 보니 남들보다 경험의 양이 현저히 적어졌다. 더 어릴 때는 차이가 미세했었다면 나이를 점점 먹을수록 그 차이가 조금 더 뚜렷하게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무튼 그토록 오랫동안 '할 수 없는 것'이라 철석 같이 믿어 왔던 것 중 하나가 운동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체육과는 거리가 멀었다. 왜 그렇게 체육을 싫어했던 건지 생각해 보면 피구의 영향이 큰 듯하다. 내가 만난 체육 선생님들은 모두 체육을 가르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정해진 수업을 조금 하고 나면, 대개는 남자애들에겐 축구를 여자 애들에겐 피구를 시켰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날먹이네 싶지만 내 수업 태도 역시 날먹이었으니 문제 삼지 않겠다.) 약속이라도 한 듯 초등학교 선생님이나 고등학교 선생님이나 별반 다를 것 없는 수업... 그들은 모를 것이다. 초중고 12년 내내 피구를 하는 것이, 피구를 싫어하는 나에게는 얼마나 잔인했는지.


피구는 정말 이상한 게임이다. 피구의 본질은 공을 피하는 것. 피구의 '피'는 '피할 피(避)'이다. 하지만 피구는 단순히 공을 피해서만 되는 게임은 아니다. 피구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피구2 (避球) [명사]

[체육] 일정한 구역 안에서 두 편으로 갈라서 한 개의 공으로 상대편을 맞히는 공놀이.


이게 요렇단 말이다. 이름은 '피할 피'를 쓰면서 의미를 풀어놓은 것을 보면 '상대편을 맞히는 공놀이'라고 돼 있는 기만적인 게임. 사실 피구를 잘하려면 요리조리 공을 잘 피할 게 아니라 공을 잘 잡고 던져야 했다. 그런 아이들은 실수로 공을 맞아 죽었다고 하더라도 외야에서 활약을 했다. 그토록 좁은 코트 안에서 움직이는 공을 피하라니, 이게 살아서 보는 지옥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피구를 하자마자 죽는 사람인 줄 알겠지만 나는 의외로 오래 버티는 편에 속했다. 처음에는 다른 아이들 뒤에 숨어 있기 전략과 눈빛 피하기 전략을 사용한다. 공을 들고 있는 아이와 눈이 마주치지만 않아도 죽지 않을 확률은 높아지기 때문이다.


전략(?)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은 생존 본능에 가까웠다. 필사적으로 맞고 싶지 않은 마음이 빚어낸 자연스러운 행동양식이랄까.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다. 나를 보호해 주던 방패막들이 하나둘 사라지면 정말 꼼짝없이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대편에서 강스파이크라도 날릴 듯이 팔을 위협적으로 들어 올리거나, 뒤로 팔을 뻗어 가동범위를 넓히는 제스처만 취해도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가장 안 아플 것 같은 자세로 얼어버렸다. 앞보단 뒤가 덜 아프니까 보통 등을 갖다 대는 방식으로. 어물쩍 목숨을 부지하며 우리 편의 허수로서 소임을 다한 나는 '하 이제 끝났다... 그래도 덜 아프게 맞았어.' 하며 터덜터덜 코트 밖으로 나갔다. 물론 이 모든 작전이 실패하고 아프게 맞은 날엔 울기도 했지만.


"아니야ㅠ 괜찮.. 꺽 ㅠ 꺾 ㅠ...." (ㅅㅂ 피구 다시는 안 해ㅠ)


그렇게 28년째 운동과 담쌓은 채 살아오다가 이대로는 건강을 다 잃겠다 싶어 운동을 시작했다. 친구들 덕분이기도 했다. 나와 똑같이 운동과 절연한 채로 살아오던 두 친구가 헬스 pt와 필라테스를 하는 것을 보고 쟤들 참 대단하다 싶었는데 (빠른년생임을 감안했을 때) 나 역시 그들과 비슷한 시기에 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절감했다. 그렇게 하기 싫어하는 운동을 내가 돈을 주고 하는 날이 오다니.


그렇게 입문하게 된 운동은 필라테스. 일단 필라테스를 하게 된 계기는 우리 집 5분 거리에 센터가 생겼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2023년을 맞이해 23퍼센트 할인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라테스를 시도하기 가장 겁나는 이유 중 하나가 (어이없게도) 레깅스를 착용해야 한다는 점이었는데 그래도 대부분이 여성 회원이고 선생님들도 다 여성이라는 점에 용기를 얻고 해 보기로 했다.


처음엔 1:1 레슨으로 시작했다. 당연히 나에겐 코어 힘이라는 것이 1도 없었고, 기본적으로 체력이 처참할 정도로 비루했기 때문에 일과 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대개는 일이 늦게 끝나니까 처음엔 아침 시간을 활용해 운동을 해보려 했다. '운동을 하고 나면 너무 피곤하지 않을까요?'라는 나의 질문에 상담하던 선생님이 '아니요~? 오히려 개운하죠!'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하지만 운동을 하고 나니 개운하기는커녕, 정말 피곤해 죽을 뻔했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일을 쉬는 날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게 나에게는 목요일과 일요일이었는데, 목요일은 거의 이틀밤을 꼬박 새우고 가야 했기 때문에 컨디션이 좀처럼 올라오지가 않았다. 선생님도 나를 가엾어하며 수업 강도를 자꾸만 낮춰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극심한 근육통에 시달렸는데, 과연 운동을 해서 건강해지는 것이 맞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친구는 필라테스 할 때 식단까지 병행해서 체중 감량도 했다는데 여전히 나는 배달음식만 달고 살았고, 아니 어쩌면 운동을 했다는 보상 심리에 평소보다 더 정크 푸드 같은 것들에 손이 갔다.


그렇게 어영부영 15회 레슨이 끝났고 재등록의 기로에 서 있었다. 하지만 23% 할인이 들어가지 않은 레슨비는 너무나 고가였고, 일단은 퇴사 후에 여수에 2주 동안 머물기로 했으니 이 생각은 덮어두기로 했다. 그리고 여수에 다녀오고 새롭게 시작된 백수 라이프. 집에는 나 말고도 비경제활동 인구가 많아서 집은 늘 과포화 상태였다. 이 놈의 지긋지긋한 집구석. 꼴 보기 싫었다. 어디론가 또 떠나고 싶은 마음에 엉덩이가 들썩들썩했고 강원도 고성에 있는 숙소까지 알아봤지만 그래도 서울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 다시 정을 붙여보고 싶었다.


그때 생각난 것이 필라테스였다. 어영부영 시간이 지나갔다고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운동이 내 일상에 스며들었나 보다. 그동안 나는 내가 땀 없는 체질인 줄 알았는데 그냥 움직이지 않아서였다는 것을 필라테스를 하고 나서 알았다. 또,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것을 기다릴 때 제대로 두 발로 서지 못한다는 것도. 구부정하게 서 있거나 철퍼덕 엎드려 폰을 할 때도-아직도 매우 매우 습관이 안 좋지만- 조금은 의식하고 자세를 고치게 되었다. 무엇보다 운동을 하고 느껴지는 뿌듯한 기분을 처음으로 체득했다.


때마침 원래 다니던 필라테스 센터의 다른 지점에서 30%를 할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래 다니던 곳보다는 거리가 좀 있었지만 남는 게 시간이니 나쁘지 않았다. 우선은 체험권으로 1:1 레슨을 받았는데, 오랜만에 땀을 쭉 빼서 그런지 기분이 더 좋았다. 이렇게 운동 뽕 차오를 때 시작해야지 싶어 단김에 30회 등록을 했다.


하지만 첫 정식수업은 정말이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선생님의 독점 마크를 받는 개인레슨보다는 그룹레슨이 좀 더 쉽지 않을까 했는데... 나는 개인 레슨보다 그룹 레슨이 훨씬 힘들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나보다 오래 하고 잘하는 사람이 훨씬 많으니 난도가 상향조정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쭈구리가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전에는 숨만 잘 쉬어도 칭찬을 받아 (필라테스는 호흡이 중요하니까) 아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당시 내게 필라테스는 회사에서 축난 마음을 채워주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래서 돌아온 것이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잘하는 다른 회원님들과 함께이고, 내가 봐도 내가 제일 뒤처지고 있는데 칭찬이 들리겠냐고. ㅠㅠ 게다가 근육통은 왜 이렇게 심한지, 체력을 기르려고 필라테스를 시작한 건데 필라테스만 다녀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근육통은 이틀이고 삼일이고 지속돼서 다음 운동을 가기가 무서웠다. 다른 사람들은 근육통이 있으면 오늘 운동 좀 잘 먹었다고 좋아한다던데. 흥 변태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기간 나에게 몰입할 것은 필라테스밖에 없었기 때문에-그래 봤자 주 2회 가는 게 전부였지만- 조용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느려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는 알 수 있는 작은 변화들. 가령 헌드레드 동작을 할 때 처음엔 복부에 힘이 너무 없어 상체를 일으키지 못하고 고개만 간신히 들어 동작을 진행하다가 숨이 막혔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 왕초보 딱지는 뗀 듯하다. (아님 말고) 호흡이 항상 엉망이었는데 요즘은 호흡이 좋다는 칭찬도 받는다. 예전엔 운동 끝나고 집 가는 길에 힘들어 주저 앉은 적도 많은데 요즘은 확실히 그런 날이 덜하다. 근육통도 서서히 견딜만한 것 같다. 연 이틀 필라테스는 죽어도 못 갈 것 같았는데 오늘 드디어 해냈다.


사실 이런 말을 하기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피구는 12년 동안이나 재미를 못 붙였는데, 필라테스는 30회 만에 재미를 붙였으면 이거로 대단한 거 아닌가? 그러니 시작하기 전에 할 수 없다고 단정 짓지 말기. 나이키 선생님께서 저스트 두잇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체육 꼴찌의 반란 이제부터 시작이란 이 말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