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하는 새집으로 이사하며 가장 먼저 들인 건 인형장이다. 이사할 집의 구조를 머릿속에 그리며 가장 먼저 인형장을 어디에 둘지부터 생각했으니. 이사를 도와준 친구에게 인형장 조립을 함께해(?) 주길 부탁(재촉)했다. 친구가 빠르게 조립해 준 인형장에 인형을 넣고 보니, 아직 풀고 정리하고 치울 게 한 짐인데도 이사가 벌써 다 끝난 것만 같이 만족스러웠다. 이제 되었다, 싶었다.
인형과 피규어를 모으는 건 나의 오랜 취미다. 여행지에서 기념품으로 인형을 데려온 것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여행이 이유가 아니라도 독특하거나 무언가 기념이 될 만한 인형과 피규어를 함께 모으고 있다. 인형과 피규어를 좋아하는 걸 알고는 주변에서 내게 선물하기도 한다(고맙게도 내 생일에 국립현대미술관 반가사유상 미니어처를 선물해 주거나, 여행지에서 그곳 인형을 사서 선물해 주는 식이다). 그렇게 여러 경로로 모은 인형들은 이제는 뭔가 친구, 동거인, 반려물의 느낌이다. 독립하며 새집에 인형장부터 들이고는 하나둘 인형을 안착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덕분에 새집에 금세 정이 붙었고.
인형장을 꾸미고서는 사진부터 붙였다. 언젠가 한 유튜버가 처음 혼자 살아 보면서 편하고 즐거운 일도 많지만, 독립 직후에는 왠지 쓸쓸한 마음이 들어서 가족과 친구들 사진을 집에 붙여두었고 그러고 나니 혼자라는 쓸쓸함이 줄었다고 영상을 통해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나도 그렇게 해야지 싶어서 미리 어떤 사진을 붙일지 고민하고 골라두었다. 집에 들고날 때 바로 볼 수 있게 현관문 안쪽에 사진들을 붙여두었다. 그러자 적적함도 해소되었고, 이사 온 집이 내 공간이라는 포근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집 곳곳을 꾸미기 시작했다. 인형장에 빼곡히 여행인형과 피규어를 진열해 두고, 좋아하는 책들과 내가 쓴 책들과 내가 만든 책들을 내 나름의 큐레이션과 규칙으로 책장에 배치하고, 미리 사둔 커튼을 잔주름이 예쁘게 만들어지게 치고, 역시 준비해둔 천으로 서랍장을 예쁘게 덮었다(서랍장의 모양과 색이 마냥 귀여워서 이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긴 스탠드 몇 개와 작고 낮은 스탠드 몇 개를 집 곳곳에 간접 조명으로 두어서 포근한 빛이 머물도록 연출했고, 패브릭 포스터와 포스트카드를 벽면에 붙였다(블루택을 사용해 붙여서 나중에 흔적 없이 떼고, 다른 것들을 붙일 수 있도록 신경 썼다).
와, 정말 너 같다. 본인처럼 꾸며놓았네. 아기자기해서 집이 아니라 카페 같아, 라는 말을 들으면 그렇게 기분 좋을 수 없었다. 내가 내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 것 같아서였다. 사람에게는 자기표현과 타인과의 연결 욕구가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잘 표현될 때 그것은 곧 다른 이에게 나의 존재가 온전하고도 적절하게 가닿은 것과 같으니까. 그런 표현과 연결, 상호 이해가 나의 공간에서 이루어졌다는 게 기쁘고 즐거웠다. 아, 이게 자기 공간을 갖는 매력이구나, 싶었다.
나의 공간을 나의 취향으로 꾸민 것은 이렇게 ‘나를 드러내는 것’인 한편, ‘내가 누리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일종의 나의 사회경제적 성취를 드러내는 것이다. 내가 산 소품들과 내 책장에 둔 내가 만든 책과 쓴 책 그리고 산 책, 장식장에 둔 인형과 피규어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뭘 필요로 하는지,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나의 사회경제적 성취(그게 미약한 성취일지라도)로만 채워진 내 공간이 퍽 대견했다. 내가 나의 마음의 방향을 따라온 길을 보는 것만 같아서였다. 본가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본가는 나의 집이 아니라, 나의 부모님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나의 취향이 담기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본가에서 나의 취향은 지엽적으로 담겼다. 나만의 것이 온전히 그리고 전체적으로 구현된 곳이라고 할 수 없었다. 부모님의 취향과 성향, 선택이 바탕이 된 곳이었다. 나는 부모님의 집보다 작고, 대신 나를 더 많이 담은 나의 공간을 대하는 게 뿌듯했다.
머무는 곳은 취향을 드러낸다. 그곳에 사는 사람의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반영한다. 마음 상태나 사회경제적 상황도 나타낸다. 어지러이 더러운 공간도 깨끗이 치워진 공간도 나타내는 것은 실은 같다. 그곳에 머무는 이를 대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머무는 곳은 이야기를 지닌다. 내가 머무는 곳에는 나의 이야기가 머문다. 나와 누군가의 관계, 나의 사회경제적 성취로 이어지는 나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