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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스 Aug 28. 2018

헤어컷 (상)

어렸을 때부터 매달 한 번씩 미용실 가는 것이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었다. 까칠까칠한 머리카락이 옷에 들어가는 게 싫었고, 머리를 자르는 내내 혹시라도 내가 원하던 헤어스타일이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것도 싫었다. 그리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수다스러운 미용사 선생님이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한국에 있을 때도 나는 미용실 한 군데를 정해놓고 쭉 거기만 가곤 했다. 다른 곳들보다 가격은 좀 있었지만, 예약한 시간에 맞춰 미용실에 도착해서 내 머리를 담당하는 선생님 앞에 앉으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마치 초밥집의 오마카세(お任せ)처럼, 그냥 편하게 의자에 앉아있으면 미용사 선생님이 알아서 그냥 머리를 잘라주셨다. 내 스타일을 잘 아시는 분이라, 선생님은 불필요한 대화 없이 오로지 머리를 자르는데만 집중하시고, 나는 눈을 감은채 사각사각 거리는 가위질 소리와 그 너머로 잔잔하게 들리는 노라 존스의 음악을 감상한다. 그러면 어느새 머리카락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고, 머리를 감은 뒤 다시 돌아오면 미용사 선생님이 헤어드라이어로 스타일링을 해주시며 오늘은 어떻게 머리를 잘랐는지를 설명해주신다. 매번 똑같은 스타일인 것 같지만, 계절이나 트렌드에 맞춰서 머리 모양이 조금씩 달라져 있는데 그게 이질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 딱 적절한 수준을 항상 유지했다. 만족감을 느끼며 미용실에서 나온 뒤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가는 것이 한 달에 한번 머리 자르는 날의 내 루틴이었다.


하지만 미국에 오게 되면서 이 루틴이 깨져버렸고, 모든 것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맞는 선생님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한국에서처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시는 그런 미용사 선생님을 찾기 위해서는 일단 여기저기 많이 다녀보면서 시행착오를 겪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헤어 스타일을 과연 영어로 잘 표현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이를테면, "옆이랑 뒤는 시원하게 밀어주시고요. 윗머리는 깔끔하게 다듬어만 주세요"를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왔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새 내 머리는 장발이 되어가고 있었다. 며칠 동안 학교를 오가며 학생들이 많이 가는 곳이 어딘지를 탐색했고, 하루는 날을 잡아 그 가운데에서 가장 괜찮아 보이는 "이발소"로 들어갔다. 그렇다. 미용실이 아니라 이발소. 테스토스테론이 가득 흘러넘치는 남자들의 공간. 머리를 잘라주는 분도 남자. 소파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도 남자. 기다리는 내내, 가슴이 괜히 두근두근했다. 이발소도 신기했고, 미국에서 머리를 자르는 것도 신기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영화배우 드웨인 존슨을 닮은 아저씨가 검은 천을 내게 둘러주시며, "어떻게 잘라줄까?"라고 물어보신다. 소심하게 나는 "short, but not too short"이라고 대답했다. 제발 아저씨가 내가 원하는 "short"의 의미를 잘 파악하셨길 바라며...


드웨인 존슨 닮은 아저씨가 머리를 잘라주셨다


언제나처럼 나는 눈을 감고, 귓가에 울리는 바리캉(이발기) 소리를 들으며 이따금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머리의 위치를 옮겼다. 앗. 그런데 갑자기 귀 뒤쪽이 따끔하다. 이건 분명 귀 뒤쪽 머리를 자르다가 실수로 바리캉 날이 내 귀의 뒤를 살짝 스쳤을 때의 그 느낌이다. 피가 날 정도는 아닌 것 같았지만, 아무튼 따끔하긴 했고, 이때부터 뭔가 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역시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아저씨가 다 되었다고 말해서 눈을 떴는데, 거울 속에 웬 신병 훈련소에 입소하는 훈련병이 한 명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아니, 내가 분명히 "not too short"이라고 말했건만, 이건 "very short"이었다. 내일 수업 들어가서 학생들 앞에서 강의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이 머리로 들어가나 생각하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나의 그런 마음도 모른 채, 드웨인 존슨 아저씨는 카드 결제기를 들고 오신다. 한국이었으면, 아까 귀 뒤쪽이 아팠다고 클레임이라도 했을 텐데, 환하게 웃고 있는 드웨인 존슨 아저씨 얼굴을 보니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머리도 마음에 안 들고, 아까 바리캉으로 귀를 아프게 했으니 팁은 없습니다. 앞으로는 머리를 자를 때 좀 더 주의를 기울여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선한 미소의 드웨인 존슨 아저씨에게 현금으로 팁을 드리며 공손하게 인사한 뒤 이발소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걸어오는데 마음이 답답했다. 앞으로 과연 내 머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드웨인 존슨 아저씨에게 다시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조선 시대처럼 상투를 틀 수도 없지 않은가. 사소한 것 같지만, 의외로 중차대한 미국에서의 머리 자르기에 대한 고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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