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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스 Aug 29. 2018

헤어컷 (하)

역시 시간이 약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훈련병 머리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머리가 짧으니 다음번 머리를 자를 때까지 시간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미국에 있는 동안 머리를 어디서 잘라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후 나는 운 좋게 내 마음에 쏙 드는 미용사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시는 데다가 낯가림 없이 편하게 내 머리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는 분을 만난 것이다. 그분은 바로... (두둥) 나의 아내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주변의 한국인 가족들에게 괜찮은 미용실을 수소문하다 보니, 결국 두 가지로 좁혀졌다. 하나는 한 시간 정도 차를 타고 한국인 미용사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가는 것. 다른 하나는, 집에서 직접 자르는 것. 아내와 상의한 결과, 우리도 집에서 한번 잘라보는 것으로 결정했다. 대부분의 여성분들이 그렇겠지만, 아내도 지금까지 바리캉(이발기)을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기에 일단은 워밍업 삼아 아마존에서 어린이용 바리캉을 주문했다.


며칠 뒤 주문한 이발기가 도착했고, 거실에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의자를 하나 놓아두는 것으로 헤어컷 세팅이 완료되었다. 그런데 머리카락이 옷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는 천(케이프)을 주문하는 것을 깜빡해버렸다. 어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커다란 비닐봉지에 구멍을 뚫은 뒤, 일단 그걸 뒤집어쓰고 의자에 앉았다.

이걸 거꾸로 뒤집어 쓴 모습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비장한 표정으로 앞치마를 두른 채, 한 손에 바리캉을 들고 다가온 아내. 아내는 설명서를 보면서 신중하게 내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어린이용이라고 해도, 지금까지 한 번도 바리캉을 사용해본 적이 없는 아내에게는 무척이나 힘든 작업이었다. 워낙 조심조심 자르다 보니 시간은 계속 흐르는데도 머리카락이 별로 줄어들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또 나대로 애로사항이 있었는데, 아까 뒤집어쓴 H&M 비닐봉지 때문에 공기가 안 통해서 몸에 점점 땀이 차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를 자르는 아내는 긴장해서 땀을 뻘뻘, 비닐봉지를 입은 나는 더워서 땀을 뻘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내가 이쯤에서 끝내면 될 것 같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땀으로 점철된) 우리의 첫 DIY 헤어컷이 끝이 났다. 나는 바로 비닐봉지부터 확 찢어버렸는데, 그 순간에 느꼈던 그 해방감과 시원함이란... 처음 사용해보는 바리캉으로 남편의 머리를 성심성의껏 잘라준 아내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뒤, 나는 바로 땀과 머리카락을 씻어내기 위해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화장실 문을 열고 거울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빵 터져버렸다.


아내가 짧은 훈련병 머리만은 피하자는 생각으로 머리를 깎다 보니, 결국 윗머리는 거의 건드리지 못하고 옆이랑 뒤만 바리캉으로 밀었던 것 같다. 그 결과, 내 머리는 슈퍼마리오에 나오는 "버섯돌이" 스타일이 되었다.


버섯돌이...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버섯돌이' 스타일이 좀 어색하긴 했지만, 훈련병 머리보다는 훨씬 좋았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 아내에게 머리를 맡기기로 했다. 다만, 다음번 머리를 자를 때에는 바리캉을 어린이용에서 어른용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제대로 된 케이프도 준비하기로 했다.

 



아마존에서 주문한 어른용 바리캉(이발기)이 도착했다. 지난번 사용했던 어린이용과는 달리, 확실히 이번에 구입한 것은 묵직하면서 무거웠고, 원하는 머리 길이에 맞춰 사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종류의 빗살캡도 들어있었다. 머리카락이 옷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는 전용 천(케이프)도 따로 구입을 했다. 덕분에 소박하지만 나름 미용실 느낌이 나는 것 같았다.


본격적인 이발을 위해 구입한 Wahl의 제품


이번에도 아내는 앞치마를 두르고, 비장한 표정으로 새로 산 바리캉을 한 손에 들고 내게로 다가왔다. 바리캉의 스위치를 켜기 전, 아내에게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했다.


실패해도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냥 과감하게 잘라봐.


아내는 나의 말에 용기를 얻은 것 같았다. 지난번 머리를 잘랐을 때는 차마 윗머리는 건드리지 못하고, 옆과 뒷머리만 조심조심 잘랐었는데, 이번에는 과감하게 바리캉으로 윗머리와 앞머리부터 공략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시간이 흐를수록 시원시원하게 잘린 머리카락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헤어컷은 머리카락이 바닥에 “스스슥”하며 떨어지는 이 소리가 핵심이지. 그 순간, 아내가 프로 미용사처럼 느껴져서 왠지 막 뿌듯하고 그랬다.


이윽고, 아내의 두 번째 헤어컷 시도가 끝이 났다. 그런데 아내의 표정이 좀 좋지 않다.


오빠. 머리가 좀 짧은 것 같은데...
괜찮아. 머리 자른다고 고생 많았어. 고마워. 씻고 올게.


그리고 호기롭게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봤는데... 아... 이건 예전에 드웨인 존슨 아저씨가 잘라주셨던 그 머리가 아니던가. (열심히 머리카락을 잘라준 아내에겐 미안하지만) 앞으로 내 머리는 ‘훈련병-버섯돌이-훈련병-버섯돌이’의 무한루프를 도는 것은 아닐까, 라는 불길함이 엄습했다.


하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과감하게 남편의 머리를 시원하게 한번 밀고 난 뒤부터, 아내의 미용 실력이 조금씩 발전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머리를 자르는 와중에, 빗살캡의 크기에 따라 머리카락이 어느 정도 잘리는지를 메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다음에는 어떻게 자르면 더 좋을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런 데이터들이 하나둘씩 쌓여감에 따라, 아내의 미용 기술도 날이 갈수록 발전을 했고, 급기야 어느 순간부터는 밖에서 자르는 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놓았다. 급기야 미국에 와서 얻은 뜻밖의 수확 중 하나로, 한 달에 한번 아내가 “우리 집 헤어디자이너”로 변신하는 것을 꼽을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내 머리를 잘라주는 아내에 대한 보답으로 나도 아내의 머리를 잘라주기 시작했다. 바리캉이라는 고급 미용도구를 사용하는 아내에게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내의 머리카락을 잘라주다 보니 나도 미용에 약간 소질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죄송). 주로 나는 아내의 앞머리와 뒷 머리카락을 담당했다. 아내가 원하는 길이에 따라 가위를 들고 머리카락을 자르다 보니, 여성의 헤어컷은 밸런스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머리 양쪽의 길이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중간중간 비뚤지 않게 자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하다 보니 점점 요령이 생기기 시작했고, 약간의 '감'을 바탕으로 쓱쓱 자르면 신기하게 머리카락이 전체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며 잘려 있었다. 머리를 자른 뒤에 거울을 보며 만족해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좀 우쫄해졌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우리는 다시 자연스럽게 미용실에 가서 전문가 선생님들에게 우리의 머리를 맡기고 있다. 미용 약품 냄새가 은은히 퍼져있는 미용실에서 가위 소리를 들으며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으면, 한 달에 한번 햇빛이 들어오는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서로의 머리를 잘라주던 미국에서의 추억들이 문득 문득 그리워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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