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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스 Aug 02. 2020

강사가 되다

박사과정 3년 차가 시작되기 몇 주 전, 학과 사무실에서 이메일을 한통 보내왔다.


축하해. 토마스. 전공과목을 강의할 강사(Instructor)로 네가 뽑혔어. 다음 학기부터 너는 거시경제학을 가르치게 될 거야.


지난 2년 동안의 강의 조교(TA) 신분을 벗어나, 이제부터는 강사로서 독립적으로 한 과목을 책임지고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성적을 부여하는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미국 경제학 박사과정은 대부분 석/박사 통합과정이라, 퀄 시험을 통과하고 코스웍까지 마치게 되면 중간 단계로서 석사(Master) 학위를 받게 된다. 우리 학교는 석사를 받게 되면 강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는데, 강의를 할 수 있는 과목 수가 제한이 되기 때문에 결국에는 성적순으로 강사를 선발한다.


나는 박사 과정을 통해 미국이 철저한 경쟁 시스템을 통해 돌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사 선발도 그 예 가운데 하나이다. 제한된 숫자의 강의를 놓고, 박사과정 3년 차부터 5년 차까지의 학생들이 전부 경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가르치고 싶은 과목명을 먼저 제출하면, 학과 사무실에서는 지원자들의 성적과 강의 평가 점수를 합산해서 가장 점수가 높은 학생에게 그 과목을 우선적으로 배정한다. 강사로 선발되지 못하면 강의 조교(TA)를 해야 하는데, 가끔은 동기가 강의하는 과목의 조교가 되는 상황도 발생하게 된다.


다행히 나는 박사 과정 첫 2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성적이 상위권이었고 조교를 했을 때 평가 점수도 좋은 편이어서 강사로 선발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운 좋게 내가 1 지망으로 지원한 '거시경제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학과 사무실에서는 다음 학기에 강의를 하며 내가 받게 될 월급 액수 및 여러 가지 부가적인 계약 조건이 적힌 계약서를 첨부 파일로 보내주었다. 계약서에 서명을 하자, 다음 학기부터 정말 강사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다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조교를 할 때 보다 월급도 올랐다!)


내가 가르치게 될 거시경제학은 3학점 짜리 수업으로 경제학을 전공하는 2학년 또는 3학년 학생들이 주로 수강을 했다. 강사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강의계획서(syllabus)를 만드는 것이었다. 다행히 학과 홈페이지에 이전 수업들의 강의계획서들이 전부 업로드되어 있어, 그것들을 하나하나 참조하면서 나 나름의 강의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교과서는 어떤 것을 써야 할지, 시험은 몇 번을 보게 할지, 숙제는 어떻게 내고, 최종 성적은 어떻게 평가할지, 수업 진도는 어떻게 나가야 할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내가 결정해야 했다. 게다가 외국인으로서 미국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보니, 강의계획서의 영어 단어 하나까지도 신경이 쓰였다.


학교 포탈 시스템에 접속해서, 내 수업을 신청한 47명의 학생들의 이름과 사진이 나와있는 출석부를 출력했다. 학생들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보고 있노라니, 왠지 모를 사명감이 느껴졌다. 과거 내 경험을 떠올려보면, 어떤 과목에 대한 이해도와 흥미를 느끼는 정도는 누가 가르쳤는가에 아주 큰 영향을 받았다. 과목 자체에서 다루는 주제들이 아무리 재미있어도 가르치는 사람이 별로이면 그 수업에 대한 흥미가 점점 떨어지고 결국에는 배운 내용에 대한 이해도도 떨어져 버리는 경향이 강했다. 적어도 그런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누군가에는 내 수업이 앞으로 그/녀의 인생에서 듣는 처음이자 마지막 거시경제학일 수도 있고, 내 수업을 바탕으로 거시경제학에 대한 평생 동안의 이미지가 결정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의 강의 중 실제 판서 자료 사진 :)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수업의 목표를, 학생들이 '언제, 어디서건 주변 사람들이 거시경제 현상에 대해 물었을 때 직관적으로 쉽게 답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으로 정했다. 내가 가르치는 과목이 다양한 수식을 사용해 경제 모형을 배우는 것이다 보니 자칫 작은 나무에만 집중하다가 큰 숲의 모습은 놓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나는 각 챕터의 시작과 끝에는 항상 '우리가 왜 이 모형을 배우고, 실제 경제 상황에 어떻게 적용이 가능한지'를 학생들과 토의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과연 생각한 대로 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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