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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거리에서 들려오는 이국적인 사운드

신종원의 『전자시대의 아리아』를 읽고

by 고전파


신종원의 전자시대의 아리아 표지.jpg




문학의 계보 중에서 음악과 깊은 혈연관계를 갖는 것은 명실상부 소설이 아니라 시다. 음악과 시가 태초에 한 몸이었다면, 서사시는 그 첫째 자식쯤이 될 것이고 서정시가 둘째 자식이 될 것이다. 서사시는 고대 신화들을 담고 있는 유구한 형식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일리아스』, 『오디세이아』가 이 계보에 포함된다. 그리고 이 서사시에서 소설이라는 근대적 형식의 문학 장르가 태어난다. 말하자면 소설은 음악과 시의 손자쯤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종원은 그 출생증명서 혹은 가계도를 부정하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마치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야곱처럼, 소설이 시와 음악의 첫 번째 자식이라고 주장한다. 소설은 산문 문학이므로, 모든 소설에 음악성이 전혀 없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시적인 소설, 음악 같은 소설은 꾸준히 있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혈연관계를 깃발로 내세운 채 육박해 오는 소설을 근래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자신의 소설집 『전자시대의 아리아』에 실린 8편의 소설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로 내밀고 있다. 그의 소설에서 시와 음악의 흔적은 곳곳에 산재해 있다. 다루는 소재 자체가 소리, 음향, 음악에 치중되어 있는 것이 그 시작이다.



노래는 까마득한 과거의 어느 한때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움. 기억들. 말하자면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프르동을. 어느 풍경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품질이 낮은 음향으로만 떠돌아다니던 전자, 유령, 기계들의 2진법 중얼거림을. 나는 돌려받기를 원하네. 나의 소중한 노래를. (「보이스 디펜스」, p.243.)



이 문장에는 신종원이 천착한 주제들이 모두 담겨 있는 듯하다. ‘품질이 낮은 음향으로만 떠돌아다니던 전자, 유령, 기계들’은 그가 8편의 소설에서 다룬 중심 소재들을 묶어서 호명한다. 도서관, 연구소와 그곳에 남겨진 소리들, 거미, 캠코더, 엘가의 바이올린, 「말도로르의 노래」 육필 원고, 전자문서, 음치 세이렌까지.

이와 같은 대상들의 내력을 톺아보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되곤 한다. 그 내력 안에 감추어진 더 깊은 내력을 더듬어 가는 것이 전체적인 골격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전개방식 중 가장 흥미로운 작품은 「옵티컬 볼레로」이다.

캠코더의 사용설명서처럼 읽히던 사뭇 건조하기까지 한 도입부는 천지창조, 이집트 신화 호루스의 눈까지 이어지며 끝이 난다는 점이다.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나는 야바위꾼에서 속은 멍청한 노름꾼 같은 낭패를 느꼈다. 분명 눈앞에서 공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공은 내가 지목한 컵이 아니라 반대편 컵에 들어 있었다.


또한 배관을 따라 이동하는 소리의 이미지들이 종종 반복되는데 이는 얼핏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의 이미지로 겹쳐 보인다. 이는 신종원에게 소리가 가지는 의미가 피와 같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없어서는 안 될 것,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즉각적으로 판단해 볼 수도 있지만, 이보다는 내 몸 안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특정한 경우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피는 상처가 난 경우에, 소리는 녹음을 해 파장을 이미지로 표출한 경우에만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신종원에게 서사는 다른 요소들보다 ‘덜’ 중요해 보인다. 기존의 소설들이 서사를 구축하고 이를 전개하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면, 그의 소설들은 차라리 이력서에 가깝다. 소설은 그에게 연주를 위한 악기이지 서사를 전달하는 보따리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형식에서는 음악을, 소재로는 매체를, 내용으로는 신화를 차용한다.


가장 마지막에 수록된 <작은 코다>는 그래서 더 특색이 있어 보인다. 다른 7편의 소설들에 비해 이는 얼마간 타협의 산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른 단편들보다 ‘문제적 인물’을 다루는 기존의 소설 방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세이렌 신화’를 가져와 그곳에 상상력을 더한 뒤 만들어낸 ‘음치 세이렌’ 때문이다. 노래로 사람을 유혹하는 존재가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된다니? 알래스카에 놓인 에어컨처럼 그 존재의 의의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문제적 인물’의 행보를 따라가는 구조였기에 다른 작품보다 읽기에 수월했다. ‘우리나라 전통 소리를 배우는 그리스 신화의 세이렌’이라는 소재는, 그가 구조적으로 타협했지만 나머지 부분에선 여전히 그의 관점을 관철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소설의 형식들은 어떤가. 이 소설들은 다분히 음악적이며 동시에 다분히 시적이다. 이를테면, 과감히 생략된 종결어미는 하나의 문장만 놓고 볼 때는 얼핏 낯설게 읽히지만, 그 뒤에 동반되는 문장들과 합해져 새로운 리듬을 구성한다.

또한 집요할 정도로 현재형으로 고정된 동사들은 어떤지.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했다.’, ‘-이었다.’처럼 과거형으로 끝내는 문장들보다 ‘-이다’, ‘-한다.’와 같이 현재형으로 끝내는 문장들이 발음상에서 부드러운 운율을 만드는 이점이 있다.


이를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시각적 장치는 문장부호다. 신종원의 문장에는 쉼표가 들어와야 할 자리에 마침표가 들어와 있다. 합쳐서 더 긴 전체의 문장을 구성해야 할 한 문장 안에 마침표를 찍어 읽는 이로 하여금 강제적으로 호흡을 끊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 마침표는 차라리 악보 상에 기입되는 쉼표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여기서 연주를 잠시 멈추라. 그리고 다시 이어서 연주하라.




확신할 수 있는 사실 한 가지가 있다면. 옵츄라의 전원이 더는 전기에너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오직 녹화된 이미지의 염기성 엑토플라즘만이 방전된 알칼리전지 안에 전해질 용액으로 바뀌어 전달될 뿐이다. (「옵티컬 볼레로」, p. 112.)
지금 잠시 상상해 보라. 심장 운동에 의해 반 뼘씩 밀려나는 혈액과 세포의 움직임을. 얼마간 더. 내가 당신을 그곳에서 꺼내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공중에 머무는 분자들이 당신의 고막과 충돌하며 내는 소리를.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를 듣게 될 텐데. 거기까지. 이제 내가 고함을 지르면, 1백 데시벨 크기의 음압이 도로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온다. (「보이스 디펜스」, p. 218.)



또 하나의 증거는 이것이다. 클래식 음악 안에서 주제 멜로디가 변형되어 곡 곳곳에서 반복되듯이, 이 소설들 중에서도 비슷한 형식이 차용된다. 도입부에 등장했던 문단이 후반부에 반복되는 것이다. (「전자시대의 아리아」, 「비밀 사보 노트」)


여기까지 이르게 된다면,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장악한 채 지휘하는 작가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대규모의 관현악 소리로 가득 차있지만, 한 사람의 지휘에만 복종하는, 그런 압도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교향곡. (이소, 「전자시대의 교향곡」, p. 283)



이 해설 속 문장을 읽고 나서야 내가 느꼈던 감정을 조금 정리해 볼 수 있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느낀 위압감. 내가 처음 듣는 소리들로 가득한 연주회를 압도당한 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앞에서 주변의 모든 것을 잊은 채, 심지어 자신이 지휘하는 악기와 연주자들조차 잊어버린 채, 아니 어쩌면 그가 연주해야 할 곡조차 잊어버린 채, 지휘를 수행하는 어느 지휘자를 보는 기분.

파시즘적이고 자폐적인 분위기. 지금 나는 이를 결코 부정적이거나 비난조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소설을 읽는 내내 느낀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소설을 덮는 순간, 나는 이 지휘자에게 한 판 잘 놀아났다는 허탈한 기분과 함께 참 신기하고 좋은 소설을 읽었다고 생각했다.


이는 곧,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다. 근래에 나는 한국 현대 소설들이 지루하고 비슷비슷하다고 느껴왔다. 그러나 그건 전적으로 이런 소설을 찾아보지 못한 게으름 탓이었다. 지금이라도 눈을 더 밝게 뜨고 찾아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이 왜 다른 출판사도 아니고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는지. 4대 문학 출판사라고 할 수 있는 ‘창비’,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 ‘민음사’에서 출판되는 문학들은 각각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 ‘문학과지성사’, ‘문지’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내놓는데 망설임이 없다. (문학의 장르 중 언어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장르가 시이고, 문지 시인선이 가지는 문단의 위상을 고려했을 때, 문지의 이러한 특색은 자연스럽다.)

낯선 스타일의 소설을 읽을 때 나의 즉각적인 반응은 소설의 국적을 의심하는 일이다. 외국 소설은 내게 여전히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동시대의 한국 문학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제조지는 한국인이지만, 원재료들은 외국에서 온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아마도 작가 자신의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동시대의 많은 목소리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닐까. 압도당하지 않는 게 아닐까.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며 아우성치는 목소리들.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서조차도 잘 알지 못하는데. 유행하는 것들이 곧 시대정신이라고 말한다면 글쎄. 시절은 그대로 가도 좋으니. (...) 오히려 그들 모두를 앞질러 가서, 아담의 말, 아브라함의 말, 카인의 말. 가능하기만 하다면, 빛의 말을 훔쳐 오고 싶다. 시시한 말들은 모두 저리 비켜. 나의 하느님이 죽어 몰락할 거라는 사실은 미리 예언되어 있고. 우리 앞에 놓인,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책들이 지금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중이니. (작가의 말, p. 302-303)



흉내를 내면서 끝내볼까 한다. 나는 이제 곧 볼 수 있게 될 그가 훔쳐온 말들이 기대된다. 디지털인 전자시대의 매체, 아날로그인 고전 음악, 신화시대의 이야기 또는 미신적이거나 종교적인 것들. 이 모든 것들이 공전하면서 만드는 소음 또는 노이즈. 아니면 음악. 혹은 노래. 어쩌면 소설이.


(『불새』라는 제목으로 출간이 예정되어 있다는데, 종교, 신화를 다룬 소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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