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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전파 Mar 23. 2020

신체의 훼손에 관한 단상

조선작의「영자의 전성시대」를 읽고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소설을 접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곤 한다. 그 불편함은 주로 음지에서 암암리에 행해지는 일을 전면에서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할 것이다.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던 문제를 마주하는 것은 조금(아니 어쩌면 아주 많이) 괴로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자의 전성시대」는 이러한 문제를 다소 완화시켜준다. 난폭하지만 천진난만한 구석도 있는 화자 ‘나’를 통해 유쾌한 분위기로 소설을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실로 이런 우연한 자리에서 영자를 다시 만나보게 되리라고는 꿈엔들 생각해 보았을까?’, ‘나도 알고 있지만, 이런 것이 바로 나의 기특한 점인 것이다.’, ‘아무튼 내게도 그 천재적인 영감이라는 것이 전혀 없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와 같은 문장들이 그러한 효과를 내고 있다. 물론 소설의 끝부분에선 영자의 죽음으로 인해 숙연해지지만, 전체적으론 활극과 같은 느낌으로 소설이 진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무거운 주제와 가벼운 분위기가 적절히 조화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이 더욱 암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영자는 외팔이 창녀다. 외팔이 창녀가 표상하는 것은 무엇일지에 대해서 고민을 했다. 뚜렷한 답을 내리지는 못했으나 어렴풋한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소설 속에도 언급되는 ‘외팔뚝이 검객’들의 영화는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과정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외팔이 영자’는 그렇게 형성된 국민국가에 의해 희생된 이주 노동자들을 표상하는 것은 아닐까?


 국민국가가 형성됐으나 아직도 경제 성장이라는 과제가 남아 있다. 외화벌이, 수출 증대 등으로 대변되는 국가 경제의 성장을 위해서 우리의 부모들은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조국의 전쟁이었던 한국전쟁과 달리 남의 전쟁이었던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어머니들은 『전태일 평전』에 생생히 묘사된 것처럼 환기조차 되지 않는 닭장과 같은 곳에서 먼지를 마시며 재봉틀을 돌려야만 했다.


 이러한 희생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신체의 훼손’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와 같은 사례 중 가장 극단적인 것은 공장 노동자들의 신체 훼손일 것이며, 이 관점에서 영자는 국가 경제 건설을 위해 희생된 노동자인지는 조금 적절치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관점을 조금 달리 해 그녀가 일자리를 찾아 시골에서 서울까지 올라온 이주 노동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그녀 역시 국가 산업화에 의해 희생된 인물로 볼 수 있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에서도 신체를 보존해온 ‘나’의 존재는 이러한 영자의 처지를 더욱 부각시킨다. 영자는 전쟁을 겪은 것도 아닌데 신체가 훼손되었다.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설 수 밖에 없는 ‘여성 이주 노동자’의 신체 훼손이라는 점에서 이 부분은 더욱 중요하다. 이는 은유적으로 산업화되는 사회 속에서 ‘여성 이주 노동자’들의 삶이 남성의 입장에선 전쟁에 나서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영자가 시골에서 올라와 식모로 일할 때, ‘나’를 포함해 주인집과 그 아들, 그리고 하숙생들에게 신체가 범해질 위협에 놓인다. 그 위협을 피해 ‘여차장’ 일을 시작하지만, 얼마 안가 사고로 인해 신체가 훼손된다. 또한 그러고 나서 흘러들어온 ‘오팔팔’에서도 외팔이라는 이유로 멸시받는다.


 이러한 ‘신체의 훼손’은 패전 직후의 일본과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이후의 우리나라에서 등장했던 상이군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국가의 어두운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상이군인들은 국가를 지키다가 신체가 훼손되었으며, 노동자들은 국가 경제 발전 과정 속에서 신체가 훼손되었다. 즉, ‘국가에 의한 개인의 상처’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국가는 스스로의 어두운 모습들을 비가시화하고 싶어 한다. 상이군인에게는 연금을 주며 그 목표를 달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 속 영자는 제도권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생존을 위해 스스로 음지로 들어가면서 비가시화 된다. 그러나 그 음지마저도 ‘불도저 작전’ 같은 국가의 공권력 앞에서 파괴된다. 끝내 영자는 그 음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영자의 죽음은 직접적으로 국가와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그녀와 같은 여성 이주 노동자가 산업화 사회에서 위협을 받고, 신체가 훼손되고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국가가 방관했다는 점 역시 부인하진 못할 것이다. ‘산업화’, ‘경제 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달성하기 위해 노력한 국가라면 더욱 그렇다. 또한 국가의 성장이 많은 부분을 이러한 ‘(여성) 이주 노동자’들에게 빚지고 있음을 떠올린다면 국가의 방관은 여러 모로 무책임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결국 이 소설의 결말은 국가의 무책임 속에서 이러한 이주 노동자들이 훼손된 신체를 끌고 갈 수 있는 곳은 음지 중의 음지인 ‘죽음’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절망이 가장 절망스럽게 느껴지는 때는 ‘실낱같은 희망’이 보였다가 사라져버리는 순간이다. ‘오팔팔’을 힘겹게 빠져나와 잠시나마 ‘나’와 영자는 평범한 일상을 꿈꿨으나 이는 영자의 죽음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의 결말이 보다 암울하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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